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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 15년 공연사의 의미 - 전통과 동시대성 사이에서
2001년 10월, 이윤택 (극작 연출가)

한국 창작무용 집단 ‘짓’이 창단 15주년을 맞았다. 이는 연극집단 ‘연희단 거리패’와
같은 공연사이기도 하다. 86년, 어둡고 긴 긴장의 시대 막바지에 날개짓을 시작한
‘짓’은 긴장의 시대 만큼이나 강한 사회적 상징성을 드러내면서 출범했다. 88년 부산
가마골소극장 공연을 거쳐 서울 공간소극장으로 이어졌던 ‘짓’의 80년대 창작춤은
딱딱한 사회적 메시지를 온몸으로 붙안고 솟구치는 모습으로 기억된다. 동아대 한국
무용 전공 김은이 교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짓’ 동인은 볼거리 위주의
한국 전통춤 양식을 극복하면서 춤의 사회적 의미를 찾으려 한 인텔리 춤꾼 집단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80년대 ‘짓’동인의 춤은 사회적 긴장과
역동적 삶의 솟구침이란 춤 미학을 확보한 셈이다. 당시의 ‘짓’ 춤은 연속되는 속도감
과 에너지의 분출, 그리고 삶의 해방감을 향해 질주하는 상승에의 의지로 표현될 수
있다.

<얼굴벗기>(87년 창단 공연작/신진 대본, 최인식 작곡, 김은이 안무)는 당시 한국 창작춤의 기본 틀을 상당히 벗어난 모더니즘적 구성으로 추상적 정서를 표현해 내려 했다. 한국 춤 집단의 창단 작품이 상당히 도시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색채로 출발했다는 자체가 ‘짓’ 동인의 미래 방향을 예견하게 했다. 상황과 상황 속의 인간이란 긴장 관계는 원래 극적인 구조이다. 이런 극적인 구조를 춤의 구성으로 수용한다는 자체가 극무용(Tanze Theater)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극무용이란 형식 자체가 유럽 무용의 산물이고, 한국춤 양식으로서는 표현하기 힘든 장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국춤은 비록 그 원형이 집단무용으로 출발했다 하더라도, 결국 한국춤이 근대성과 만나면서 솔리스트의 춤판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한국 전통무용은 아무개의 살풀이, 아무개의 태평무 등 솔리스트 구성이 지배적이었고, 이런 한국 전통춤의 솔리스트적 속성은 춤의 극적 구성을 어렵게 하기 마련이다. 김은이와 ‘짓’은 바로 이런 솔리스트적 전통춤을 현대적인 극무용 구성으로 종합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춤의 구성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게 되는 셈이다. <달동별곡>(87년 작)이 그 대표적 사례로서 한국 전통춤양식으로 완월동 사창가의 사회적 메시지를 담으려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성이 강한 한국춤, 전통적이면서도 극무용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창작춤의 세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고 초기 ‘짓’ 동인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짓’의 표현양식도 변화를 겪는다. 맞서야 할 적이 보이지 않는 90년대 세기말적 상황속에서 그들의 사회적 긴장은 벽에 부딪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들의 관심 또한 세기말적 상황에 대한 탐색으로 변모되었다. 90년대 ‘짓’의 춤은 주로 소돔과 고모라성 같은 현실 속에서 구원의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이 과정에서 김은이류의 창작 제의무용(Ritual Dance)이 등장하는데, 그녀의 제자이기도 한 ‘짓’ 동인은 종교적 구원과 사회적 상징이라는 90년대적 화두를 붙안고 몸부림친다.

<랑겔한스 섬 가문날의 꿈> <일식>등 안무가 김은이의 대표작에 중심 춤군으로 참여했던 ‘짓’동인들은 스승의 대작 위주 공연과는 달리 자기식의 소극장 공연을 펼쳐왔지만, ‘짓’동인들의 춤 또한 안무가 김은이가 추구했던 한국춤의 구성주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일식>(96년 작)에서 김은이와 ‘짓’ 무용단의 제의무용은 절정의 단계를 맞는다. 전통춤양식에서 추출될 수 있는 춤의 제의성, 그리고 세기말적 상황인식에서 비롯되는 사회성, 여기에 종교적 구원의 문제까지 종합되면서 상징적이고 구성적인 극무용양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스케일과 구성력을 보여준 셈이다. 이 작품은 스케일과 주제의식에 걸맞는 춤양식의 디테일이 확보된다면, 한국 전통춤의 동시대적 작업으로서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것이라 믿는다.

<지금 부재중>(98년 작)은 안무가 김은이의 개인사적 고통과 자아회복에의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90년대 사회적 상황과 인간의 관계가 개인성의 문제로 변모되는데, 여기서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개인적 삶의 고통과 그 회복에 대한 풀이의 미학이다. 안무가 김은이가 직접 출연하기도 한 이 작품은 운동성이 강한 에너지 위주의 춤양식에서 절제와 균형감각을 생명으로 하는 전통춤(태평무)양식에서 현대적인 몸짓을 변형시켜 내었고, 그 만큼 정적이고 세련된 도시적 감성으로 표현되었다. 결국 김은이와 ‘짓’은 사회적 상황에서 개인적 고백으로, 민속춤양식에서 정제된 궁중무양식으로 관심이 옮겨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춤의 소재들이 개발된다.

<이반의 시대>(2000년 작)는 동성애자의 문제를 다룬 이색적인 작품인데, 춤양식은 이전의 태평무의 변형이 계속된 춤이었다.

김은이의 태평무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의 의지는 <지금 부재중> <이반의 시대>외에도 <태평무 변주>란 이름으로 종합적인 변형의 과정을 맞이한다. 전통춤의 해체와 재구성에 대한 그의 의지는 그가 원래 전공했던 태평무를 오늘의 양식으로 재창조하려는 의미로 집약될 수 있다. 결국 집단 제의무의 성격을 지녔던 태평무가 근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솔리스트의 춤으로 변형되었고, 이를 다시 집단적이고 현대적인 춤양식으로 되살려내려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셈이다. 그렇다. 한국 전통춤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구성주의적 창작무용. 이것이 ‘짓’동인의 춤양식을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실로 한국 전통춤은 다양하고 정제된 춤양식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통춤양식은 전통의 율격에 갇혀 있는 한 동시대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김은이와 ‘짓’동인은 바로 이 전통과 동시대성 사이에서 나름의 한국춤의 세계를 개척해 나갔던 것이고, 이 작업이 어언 15년이란 세월을 견디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그들의 작업이 언젠가 한국 창작춤의 한 방법론으로 개념화되고 제대로 의미매김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