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Helen Keller)는 눈 멀고 귀 먹은 벙어리였다. 그녀의 의식은 텅 비
어 있었고, 다른 사람이나 사회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회적 인간이
아니었다. 어느날 설리반(Ann Sullivan) 선생이 헬렌 켈러를 펌프장으로 데려가
그녀의 손을 펌프꼭지에 갖다 대고는, 차가운 물을 퍼올려 손에 물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W-A-T-E-R(물)'라고 써 주었다.
그 순간 그녀는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하나의 세계에 들어가는 전율에 휩싸였다.
그녀는 그 위대한 순간을 훗날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샘터로 이르는 오솔길로 걸어 내려갔다. 그 샘터를 덮은 인동덩굴나무
의 향기에 매혹되었다. 누군가가 물을 푸고 있었고, 나의 선생은 내 손을 물주둥
이 밑에 댔다. 찬 물줄기가 한 손에 흘러내리자, 그분은 나의 다른 손에 물이란
단어를 처음엔 천천히, 그리고 나서 빨리 썼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서서 나의 모
든 주의를 그분의 손가락의 움직임에 집중시켰다. 갑자기 나는 무엇인가 잊어버
렸던 것을 희미하게 의식하는 듯함--생각을 되찾은 것 같은 오싹함--을 느꼈
다. 헬렌 켈러의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운 액체를 다른 것과 구별하여 'WATER'
라고 이름짓고 그것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 !
이것은 인간과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그것을 공통의 매개로 하여 다
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고, 이러한 인간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 의하여 사
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WATER라는 이름으로 손에 느껴지는 차가운 액체라는
이미지를 가지는 것과 같이, 모든 사물과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이러한 이미지의
집합을 '집합표상(集合表象)'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집합표상(集合表象): 모든 사물과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이미지의 집합.
헬렌 켈러가 설리반 선생의 지도로 달라진 것은 그녀의 의식 속에 수많은 이미
지들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때 헬렌 켈러의 의식에 형성된 수많은 이미지들이
바로 집합표상이다. 우리는 인간의 사회가 바로 이러한 집합표상을 기반으로 하
여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집합표상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것은
고기에게 물과 같은 것으로 우리의 사회를 형성하는 기초인 것이다.
설리반 선생을 만나기 전의 헬렌 켈러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를 상상해
보라. 그곳의 인간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고 그리하여 사회가 아니다. 이것을
우리의 사회와 비교해 보자. 그러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바로 사람들이 집합표
상을 가지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의 기초인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집합표상이란 인간의 의식, 생각, 정감, 개념, 사고방식, 가치관,
세계관, 윤리의식, 미의식,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 개념이다. 집합표상은 인간의 의
식이 인위적으로 형성된 <표상들의 집합>이라는 뜻에서 규정된 것이다.
(원래 저자는 이 개념을 주역의 상(象)과 불교의 상(相)의 개념에서 빌려온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