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눈으로 보는 문명사


제 1편 헤게모니와 공동체


제 1 장 사회의 세 차원

1.1.1 집합표상( 集合表象 : imagery ) - 헬렌켈러의 경험
1.1.2.연대를 위한 매개수단
1.1.3. 사회의 세차원




1.1.1 집합표상( 集合表象 : collective image ) - 헬렌켈러의 경험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눈 멀고 귀 먹은 벙어리였다. 그녀의 의식은 텅 비 어 있었고, 다른 사람이나 사회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회적 인간이 아니었다. 어느날 설리반(Ann Sullivan) 선생이 헬렌 켈러를 펌프장으로 데려가 그녀의 손을 펌프꼭지에 갖다 대고는, 차가운 물을 퍼올려 손에 물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W-A-T-E-R(물)'라고 써 주었다. 그 순간 그녀는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하나의 세계에 들어가는 전율에 휩싸였다.
그녀는 그 위대한 순간을 훗날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샘터로 이르는 오솔길로 걸어 내려갔다. 그 샘터를 덮은 인동덩굴나무 의 향기에 매혹되었다. 누군가가 물을 푸고 있었고, 나의 선생은 내 손을 물주둥 이 밑에 댔다. 찬 물줄기가 한 손에 흘러내리자, 그분은 나의 다른 손에 물이란 단어를 처음엔 천천히, 그리고 나서 빨리 썼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서서 나의 모 든 주의를 그분의 손가락의 움직임에 집중시켰다. 갑자기 나는 무엇인가 잊어버 렸던 것을 희미하게 의식하는 듯함--생각을 되찾은 것 같은 오싹함--을 느꼈 다.란 내 손 위에 흘러내리는 그 놀라운 찬 것을 의미한다는 것 을 알아냈다. 그 생생한 단어는 나의 영혼을 깨워 주었고, 빛과, 희망과, 즐거움을 주었으며, 마침내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문화의 개념 p.22-23)

헬렌 켈러의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운 액체를 다른 것과 구별하여 'WATER' 라고 이름짓고 그것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 !

이것은 인간과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그것을 공통의 매개로 하여 다 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고, 이러한 인간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 의하여 사 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WATER라는 이름으로 손에 느껴지는 차가운 액체라는 이미지를 가지는 것과 같이, 모든 사물과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이러한 이미지의 집합을 '집합표상(集合表象)'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집합표상(集合表象): 모든 사물과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이미지의 집합.

헬렌 켈러가 설리반 선생의 지도로 달라진 것은 그녀의 의식 속에 수많은 이미 지들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때 헬렌 켈러의 의식에 형성된 수많은 이미지들이 바로 집합표상이다. 우리는 인간의 사회가 바로 이러한 집합표상을 기반으로 하 여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집합표상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것은 고기에게 물과 같은 것으로 우리의 사회를 형성하는 기초인 것이다.

설리반 선생을 만나기 전의 헬렌 켈러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를 상상해 보라. 그곳의 인간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고 그리하여 사회가 아니다. 이것을 우리의 사회와 비교해 보자. 그러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바로 사람들이 집합표 상을 가지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의 기초인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집합표상이란 인간의 의식, 생각, 정감, 개념, 사고방식, 가치관, 세계관, 윤리의식, 미의식,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 개념이다. 집합표상은 인간의 의 식이 인위적으로 형성된 <표상들의 집합>이라는 뜻에서 규정된 것이다.

(원래 저자는 이 개념을 주역의 상(象)과 불교의 상(相)의 개념에서 빌려온 것 이다.)

1.1.2.연대를 위한 매개수단

사람들이 모두 도둑질을 적당히 용납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 다면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방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도둑질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염려를 할 필요없 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다. 우리는 의식, 가치관, 사고방식 기타 인간의 모든 '생 각들'을 집합표상(集合表象)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예를 들면, 도둑질은 나쁘다 는 생각은 '도덕적 집합표상'에 속한다. 따라서 사회는 여러가지 집합표상으로 유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관점(觀點)에 따라서 사회는 다르게 보인다. 사회를 투쟁의 장(場)이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투쟁이야말로 인간사회의 숙명이 된다. 그러나 사회를 연대의 장(場)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이 서로 협력하고 상호의존하여 살아가는 장이 된다. 관점에 따라서 우리는 전혀 다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협력하고 상호의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간에 공통된 생각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새로운 관점에서 인간의 연대를 생각해 보자.

인간은 먹어야 살 수 있다. 따라서 식량은 생산되어야 하고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토지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산의 과정에서 토지를 매개로 하 여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처럼 생산에 필요한 공통의 자산을 우리는 '자본'이라고 부를 것이다. 토지자본도 집합표상과 같이 인간이 (생산과정에서) 상호협력하도록 매개물(intermediary) 구실을 한다. 인간은 그냥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와 같은 자본을 매개로 하여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다.

한편 우리가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는 폭력(전쟁, 살인)이 억제되어야 한다. 언제 폭력이 행사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서로 믿을 수 없고 따라서 협력 과 연대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폭력을 억제하는 현실적인 방법은 질서를 정 하고, 그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은 사적(私的)인 폭력에 대해서 처벌할 수 있는 공적(公的)인 폭력을 마련하 는 것이다. 이러한 공적인 폭력장치가 권력이다. '권력'은 폭력을 억제한다는 점 에서 연대의 매개 수단이 된다. (인류는 아직 공적인 폭력장치 없이 사적인 폭력 을 억제하는 방법을 발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러한 발명을 시도하 고 있다.)

인간의 협력과 연대는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고 하여 당장 사랑이 충만한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 간의 연대에는 현실적인 많은 제약이 있으며, 사회는 이러한 현실적 제약을 해 결하는 방식이다. 인류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 연대를 이룩하는 방식으로 여러가 지 매개수단을 발전시켜 왔다. 언어(言語)는 서로 다른 생각(集合表象)이라는 현 실적 제약을 전제로 서로간의 생각을 조정하는 매개수단이다. 권력은 폭력이라는 현실적인 제약을 전제로 폭력을 억제하며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수단이다. 자본(즉 자본에 관한 제도)은 생산의 과정에서 협력하는 방식과 생산의 결과를 나누는 방식에 관한 매개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회(인간의 연대)를 구성하는 매개적 요소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연대의 매개수단은 그 성격에 따라서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정치적 차원, 경제적 차원 그리고 문화적 차원 이 그것이다. 권력은 정치적 차원의 매개수단이고, 자본은 경제적 차원의 매개수 단이며,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 집합표상은 문화적 차원의 매개수단이다.

1.1.3. 사회의 세차원

우리는 사회를 세개의 차원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기로 한다. 즉 사회를 정치적 차원, 경제적 차원, 문화적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다. 앞에서 정치적 차 원을 형성하는 연대의 매개수단은 권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제적 차원의 매 개수단은 자본이고, 문화적 차원은 매개수단은 집합표상(의식)이라고 하였다. 그 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외에 다른 매개수단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의 정 치적 차원을 매개하는 요소는 권력 이외에 법률이 있다. 우리는 법률을 매개로 하여 행동하고 협력한다. 법률이 없다면 우리는 그때 그때마다 모든 규칙을 일일 이 정해야 할 것이다. 법률은 인간이 상호간에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보편적인 규칙이다. 이러한 규칙을 매개로 하여 인간은 서로간에 협력하는 것이다. 그리하 여 정치적 차원에서 인간연대의 매개수단은 권력과 법률이다. 즉, 권력과 법률의 세계가 바로 사회의 정치적 차원이다.

우리는 앞에서 경제적 차원을 매개하는 자본으로서 토지를 들었다. 그러나 산 업사회에서는 토지만이 아니라 공장과 기계설비 그리고 화폐자본도 생산에 필요 한 자산으로서 자본이다. 또한 우리의 경제적 생활에는 자본 이외에 또 다른 매 개수단이 있으니, 그것은 화폐이다. 화폐란 경제적 가치를 교환하는데 사용하는 매개체이다. 우리는 화폐가 <가치의 매개체>라는 의미에서 '가치매체(價値媒體)' 라고 부르기로 한다. 결국 사회의 경제적 차원은 자본과 가치매체(화폐)에 의하여 매개되는 차원이다.

한편 우리는 인간이 부여하는 의미의 세계를 문화로 규정한다. 가령, 보통의 물 과 성수(聖水)는 물질적으로는 동일하지만 그 의미는 큰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 이에서 보는 것처럼 문화적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앞에서 말한 집합표상의 세계야말로 사회 의 문화적 차원이다. 문화란 결국 공통의 집합표상위에서 상호간의 의사소통 (communication)에 의하여 형성되는 생활양식의 총체이다. 집합표상이란 커뮤니 케이션의 전제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 언어야말로 인간을 결합하고 연대하는 또 하나의 중대한 매개수단이다. 이처럼 언어와 그것에 의하 여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문화적 차원의 또 하나의 매개요소이다. 즉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의 세계가 사회의 문화적 차원이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 하면 사회적인 매개수단은 다음과 같다.


표1> 사회의 세 차원과 매개수단

사회의 차원

매개수단

정치적 차원

권력
법률

경제적 차원

자본
가치매체(화폐)

문화적 차원

집합표상(의식)
커뮤니케이션


우리는 권력, 법률, 자본, 가치매체, 집합표상,커뮤니케이션을 인간연대의 매개 수단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매개수단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관점을 달리하면 이러한 매개수단은 다른 인간에 대하여 행사할 수 있는 힘이다. 권력은 폭력을 억압하는 인간연대의 매개수단이 되지만 권력적 억압과 지배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힘이다. 자본은 어떠한 방식이든 서로 협력 하여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연대의 매개수단이다. 그러나 자본은 억 압과 착취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 역시 다른 인간에 대한 사회 적 힘이다. 다른 매개수단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러한 매개수 단의 성격에 대하여 좀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

(우리가 이 장에서 사용한 두개의 새로운 개념--<집합표상>, <가치매체>--은 제1권과 제2권에서 논의한 개념이다. 제1권, 제2권을 읽지 않은 분은 <補論 I>을 참고하기 바람. 사회를 세개의 차원으로 나누는 것은 단순하게 보이지만 서구 근 대의 사회이론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이에 관한 서구이론의 개요는 <補論 II>를 참고하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