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농업사회에서의 교역과 도시
농업은 일정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도시가 형성될 수 없다. 도시란 농업이외의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토지공간이 필요없는 사람들-- 의 취락이다. 도시는 농업이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제공동체이다.
도시는 농촌보다 더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서, 대부분의 경제적 재화는 외부에서 유입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외부에서 경제적 재화가 유입될 수 있는 근거는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충분한 양의 경제잉여를 획득하는 자본헤게모니 계급이 집결하여 생활하는 곳이거나, 아니면 국가재정에서 그 소득을 획득하는 관료계급들이 집결하는 곳이다. 그들을 수요 자로 하여 원거리 교역과 상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거대한 영역의 농촌에 서 생성된 경제잉여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원거리 교역과 상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역과 도시에 의하여 농업사회에서도 화폐는 널리 사용되고 대상인자본(大商人資本)이 등장하기 도 한다. 그러나 화폐나 상업자본은 농업사회에서는 결코 사회의 주요한 범주가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기반은 농업적 경제잉여이기 때문이다.
자본(토지)헤게모니 계급이 농촌 장원의 성(城)에서 살았던 서구 중세 사회에서는 도시가 발전 할 수 없었다. 서구 중세 장원의 생산력은 자본헤게모니계급으로 하여금 도시생활을 가능하게 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오래된 로마제국에서는 제국의 전 영역에서 획득되는 농업적 경제잉여가 로마시에 집결되었다. 로마가 제국화함에 따라서 로마의 속주이었던 이집트, 갈리아, 스페인, 브리타니아에서 농업생산물이 유입되었다. 그에 따라서 이태리 반도에서의 농업은 쇠퇴하 고 포도, 올리브 등 과수재배로 전환하였다. 로마제정에서의 귀족은 속주에서 광대한 토지를 가진 자본헤게모니 계급이었다. 상업도 급격히 발달하여 통상과 항해의 범위는 인도, 중국에까지 이르 렀다. 지중해는 내해였다. 로마는 곡물, 견, 면, 직물, 향수, 보석, 파피루스 등을 수입하였고, 로마 제국의 속주인 스페인 등지에서는 광산이 개발되었다. 로마시는 최성기에는 인구가 백만이 넘었 고, 상하수도, 극장, 목욕탕, 경기장 공공건조물과 문화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한편 로마 이외에 도 많은 자유시가 발전하였으며 전성기인 제정초기의 로마는 도시와 도시를 도로로 연결하는 망 상조직이었다.
한편 로마의 번영과 유사한 시기인 중국 한제국(漢帝國)에서도 상업과 도시는 크게 발달하였 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연소득 20만전을 얻어 봉건제후와 대등한 생활을 한 부유한 상인 이 묘사되어 있다. 로마의 교역과 상업은 쇠퇴해버리고 그 후 서구 중세 1,000년은 농촌사회였지 만, 중국에서는 한제국에 뒤이어 통일한 당제국에서 찬란한 도시문화를 이룩하였다. 당시 중국 당 의 수도 장안(長安)은 많은 인구를 가진 거대도시였다. 중국인들은 서양사람들의 옷, 음식, 음악에 도 익숙한 세계화된 시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당의 세계적 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사 라센 제국이었으며, 동북아에서는 신라(新羅)의 장보고(張報皐)가 해상무역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에 개척된 실크로드를 통하여 이어지던 동서교역은 7세기경부터 유라시아 대륙 남안 을 연결하는 해상교역로(머린 루트)와 함께 세계화가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동서교역의 중간지대 에 있던 이슬람에서는 이미 9세기 경에 세계사에 관한 책이 출판되었다.
당에 이어 성립한 중국의 송제국(960-1240)에서도 상업과 교역은 크게 발달하였다. 송대 전기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이나 후기(남송)의 수도 임안(臨安)도 각각 인구가 100만이 넘었으며, 그외 많은 도시가 있었다. 이때 이미 도시에서는 시민문화가 발전하였으며, 인쇄술의 발달에 의하 여 책이 출판되고 다수 시민이 독서를 하였다. 또한 화약이 출현하였고 석탄이 연료로 사용되었 고 석탄을 이용해 철이 제련되었다. 도자기 산수화 등 예술도 많은 수요를 바탕으로 발전하였 으며 말하자면 시민문화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도시생활이 나타났다. 이어서 몽고제국은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형성함으로써 세계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몽고제국에 뒤이어 성립한 명제국은 대함대를 건설하여 동남아시아의 해안을 거쳐 아프리카 동해안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많은 화교가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여러 제국과 마찬가지로 명나라나 청나라도 농업에 기반을 둔 지주관료계급의 국가였 으며, 그리하여 상업과 상인계급을 철저하게 억압하였다. 이러한 점이 오히려 중국보다 훨씬 늦게 해외탐험과 교역에 나선 서구유럽에 뒤지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근대문명이 유럽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제국 이후 동양의 번영을 기반으 로 확대된 해양무역이 발전하고, 그에 의하여 동양의 기술과 문화가 유럽에 전파되면서, 침체해 있던 유럽이 마지막으로 해양무역에 뛰어들면서 근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해양 무역을 가능하게 하였던 모든 것은 그 이전에 동양에서 제공되었던 것이다. 2.2.5. 농업사회와 근대사회
농업사회에서도 거대한 도시가 있었고, 도시문명이 꽃피었다고 하여, 도시가 농업사회의 중심 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농업사회의 도시란 농촌의 장원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업사회의 경제공동체는 어디까지나 농업적인 장원인 것이다. 도시 는 장원과는 달리 상업적인 공동체이다. 그러나 농업사회의 도시는 광대한 영역의 농업지역을 배 후지로 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즉 도시는 배후지의 농업적 경제잉여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로마나 당, 송, 명, 청의 수도 등의 도시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배계급에 의하여 수취 된 경제잉여가 여기에 집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환은 주로 원거리교역에 의하여 이루어 졌으며 시장이 먼저 발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도시는 이러한 원거리 교역의 중심기지였던 것이 다. 농업사회에서의 교역도시는 농업적 장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반대로 교역과 상업이 농업 을 발전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점은 근대사회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근대사회는 상업과 교역이 농업과 공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걸었다. 공업의 발전에 의하여 농업이 교환경제에 편입된 것이 시장인 것이다. 즉 농업이 시장판매를 위한 생산으로 변화된 것 이다. 그리고 시장이 형성됨으로써 경제공동체는 장원에서 시장으로 변화한 것이다. 경제공동체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농업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장원이라는 점에서 농업사회의 사회적 연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장원은 소규모의 공동체이다. 다시말하면 농업사회에서 사회는 대규모의 공동체를 형성할 경제적 이유나 필연성이 없었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넓은 영역에 걸쳐 대규모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나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또 농업사회의 도시 역시 대규모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가 없다. 도시는 다만 배후지로서 넓은 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따라서 농업사회에서의 대규모 공동체는 경제적 이유보다는 주로 폭력(정복)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그것을 유지시킨 것은 권력헤게모니이다. 자본(토지)헤게모 니 자체는 거대한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제국을 유지시킨 것은 권력이다. 중 국의 거대제국들을 유지시킨 것도 권력이다. 거대 제국은 권력헤게모니와 그에 의존하는 지배계 급이 경제잉여를 취득하고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유지하게 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공동체를 규정한 요소는 주로 폭력(정복)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근대에는 사회의 경제적 차원 그 자체 가 거대한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이 근대이전의 사회와 근대사회의 근본적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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