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눈으로 보는 문명사


제 2편 농업사회 - 계급체제


제 2 장 경제공동체: 장원

2.2.1. 농업사회의 경제공동체
2.2.2. 서구 중세의 장원 --영주와 농노의 신분계급사회
2.2.3. 중국의 경제공동체:장원 -- 호족(귀족), 사대부와 전호(佃戶)의 신분사회
2.2.4. 농업사회에서의 교역과 도시
2.2.5. 농업사회와 근대사회




2.2.1. 농업사회의 경제공동체

어떤 헤게모니가 미치는 영역을 그 헤게모니의 공동체라고 정의하였다. 인류역사에서 제일 먼 저 나타난 공동체는 역시 경제공동체였다. 농업사회의 경제공동체는 바로 토지에 대한 권한을 중 심으로 형성되었다.

농업사회는 자급자족적 사회였다. 농업사회에서는 한 가족이 생산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대단히 빈곤하였다. 동시에 자급자족적인 농가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마을이나 더 넓은 영역에 걸쳐 상호의존하는 경제적 공동체가 불필요하였다. 농업사회에서는 자연적으로 형성 된 마을이 하나의 경제적 공동체이다. 그것은 자연적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농업은 토지에 의존하는 생산이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지배권이 특정한 소수에게 있 다면 그 토지에 의존하는 생산자들은 하나의 공동의 관계 속에 놓일 수 밖에 없다. 즉 토지자본 에 의한 공동체, 토지의 자본헤게모니 체계가 경제적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농업사회의 경제공동체는 자연부락과 토지의 지배권을 매개로 하여 경제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만일 한 사람의 토지소유자가 수개의 마을에 걸치는 토지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 수개의 마을 은 그 토지소유자에게 지대를 바치는 관계를 토대로 하여 여러가지 경제적 연관성을 갖는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토지소유자 이외에 국가에 대 하여 조세를 납부한다면 조세수취체제로서 경제관계가 얽혀들게 된다. 그러나 조세의 수취 영역 은 경제공동체가 아니라 국가공동체이다. 그리고 국가가 중간의 지주를 배제하고 완전한 조세수 취를 행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국가공동체를 배제한다면 농업적 경제공동체 는 여전히 자연부락이었다.

이러한 경제공동체가 역사상 전형적으로 나타난 것은 서구 중세의 장원(莊園)을 들 수 있다. 장원은 자연부락이 하나의 독립적인 경제공동체로 형성한 예이다. 이러한 독립적인 경제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에는 교환경제의 결여, 장원소유자의 정치적 독립성 등의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농업사회에서도 교환경제는 상당히 발전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경우에는 농업적인 경제공동체 이외에 상업적인 도시공동체가 발생하였다. 또한 장원소유자가 정치적으로 독립한 경 우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경우 장원소유자는 호족이나 귀족이 되어 국가공동체의 신분계급이 되 고, 농민은 지주와 국가로부터의 규제라는 2중의 구속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관심 을 갖고 있는 '자본헤게모니'의 영역은 소규모의 부락에 한정되어 있었다.

2.2.2.서구 중세의 장원 --영주와 농노의 신분계급사회--

서구 중세의 장원은 보통 기사 한 사람이 소유한 토지를 범위로서 하나 또는 여러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은 장원은 10가구 정도의 농민이 각각 30에이커 정도를 보유하는 300--400에 이커의 크기였다. 큰 장원은 50가구정도로 구성되어 5,000에이커 정도였다. 장원 내의 토지는 민 가를 중심으로 경작지, 목초지, 황무지, 삼림 등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경작지 일부는 영주의 직 영지이며, 그것은 농민들이 부역으로 경작된다. 농경지는 춘파지(春播地), 추파지(秋播地),휴한지 (休閑地) 세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비료가 없었기 때문에 지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돌아가며 일정 부분은 경작을 하지 않는 윤작방식이었다.

장원은 영주의 재산이며 수입원이었다. 토지의 소유권은 영주에게 있으며 농민은 영주의 토지 를 경작하는 농노였다. 농민의 의무는 부역과 공납을 바치고, 영주의 시설을 사용하는데 따른 사 용료를 지불해야 했다. 부역은 일주일에 2-3일간 주역(week-work)과 그 외 부정기적인 특별부역 이 있었다. 하는 일은 영주 직영지의 경작, 도로수선, 운반 등이었다.

공납은 보통 생산물로 직접 납부하였으며, 그 외 인두세(head- tax)를 연 1회 이상 납부해야 했다. 농민의 딸이 장원 밖의 사람과 결혼할 때에는 혼인세를, 사망으로 가축 등을 상속하는 경우 에는 상속세를 내어야 했다. 또 영주는 제분시설, 빵 제조시설, 등을 독점하고 있어, 농민이 포도 주, 밀가루, 빵 등을 만들게 되는 경우, 시설 사용료를 현물로 받았다. 또한 재판도 주요한 영주의 수입원으로서 고소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하고 쌍방으로부터 소송비를 징수하였다. 농민들 대부분 은 농노의 신분이었는데, 그들은 토지에 얽매여 있었고 영주의 승낙없이 장원을 이탈할 수 없었 다. 이와 같이 토지자본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하여 부역과 공납이 이루어졌고 심지어 재판까지 이루어졌다. 이것은 토지자본 헤게모니에 의한 경제공동체가 권력적인 힘까지 같이 갖고 행사한 것으로, 철저한 신분계급사회였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서구 중세의 장원은 두가지 점에서 농업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장원이 서로 독립적인 자급자족적 경제공동체라는 것이다. 물론 중세에도 미미하나마 물물교환이 있고 일부 화폐가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무시해도 좋다. 농민의 생활은 대단히 빈곤하였으 며 기근상태에 있었다. 농민들의 주식은 검은 빵이었고, 달걀, 양배추, 무우, 콩 등의 부식이 있었 다. 옷은 조잡하였으며 자가생산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집은 흙벽과 흙바닥에 짚뭉치를 깔로 침상 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창문은 벽에 뚫은 구멍에 불과하였고,겨울에는 짚으로 막는 것이었다.

두번째 특징은 중세 장원의 토지에 대한 지배권, 말하자면 '자본헤게모니'는 영주에게 있었다. 국가나 왕은 자신의 직령지를 가지고 있으며 말하자면 왕은 가장 큰 영주에 불과하였다.(때때로 부하 영주보다 장원이 작은 경우도 있었다.) 왕(즉 국가)과 영주의 장원과의 관계가 차단되어 있 으며, 따라서 농민은 국가(왕)에 대한 조세를 내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면 중세의 농민은 농노계 급이었을 뿐 국가의 국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농업사회의 특징은 서구 이외의 다른 곳에 서도 보편적이다.

2.2.3. 중국의 경제공동체: 장원
-- 호족(귀족), 사대부와 전호(佃戶)의 신분사회 --

경제공동체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를 살펴 보자. 중국의 역사는 토지 자본의 헤게모니를 어 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역사다. 왕조의 생성과 쇠퇴는 토지 자본 헤게모니에 의하여 좌우되었 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토지제도는 약 3,000년 전 주(周)나라에서 시행되었다는 정전법(井田法) 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 주나라에서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인데, 아홉지역 을 한 경제단위로 묶어서 분배하고, 그 중 한 지역을을 공전(公田)으로 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은 세금을 납부하고 동시에 공전에 부역을 하였다. 토지는 3등급으로 나누어, 상지(上地)는 매년 농 사를 지을 수 있는 불역(不易)의 땅이고, 중지(中地)는 한해 쉬고 한해 농사짓는 일역(一易)의 땅 이고, 하지(下地)는 두해 쉬고 한해 농사짓는 재역(再易)의 땅이었다.

고대중국에서는 씨족 공동체의 몰락으로 자영 소농민 위에 고대제국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 러나 이렇게 자영소농민에게 분배된 토지가 점차로 매매되어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호족(豪族)계 층이 성장하고 있었다. 한(漢)의 무제(武帝)시대(BC 147-87)의 동중서(董仲舒)는 토지소유의 불균 형이 심하였고, 토지매매가 자유롭기 때문에 부자는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빈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고 한탄하면서, 토지와 노비의 소유한도를 정하는 한전책(限田策)을 제기하였다. 이것은 한나라 시대에 이미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호족들이 등장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토지를 소유한 호족세력은 그 뒤 여러왕조의 토지개혁에도 불구하고 없어지지 않았다. 후한의 왕망(王망)은 정전법의 이상을 되살리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삼국시대에 위나라의 조조는 국가 자신이 호족적 경영을 하는 국유토지인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수나라와 당나라에서는 모 든 토지를 국가가 환수하여 농민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하였으나, 호족(귀 족)계급과 장원을 없애지는 못하였다. 균전제에서는 노비와 소에게도 토지를 분배하였는 바, 이것 은 노비와 소를 소유한 호족에게는 광대한 장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호족(귀족)계급은 중앙권력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소되지 않았으며, 반대로 국가가 바로 이러한 호족계급의 지지 위에 성립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귀족이 장원형식 으로 자본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러한 자본헤게모니 계급을 토대로 하여 국가가 성립한 것이다.

당나라까지의 중국의 국가는 무력국가(武力國家)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무력집단에 의하 여 왕조국가가 형성되고, 그 무력집단은 바로 호족(豪族)이었다. 이 전사계급(戰士階級)이 자본헤 게모니를 장악하고 전사계급의 조직적 위계체제가 국가였던 것이다. 관료적 조직과 봉건 계약과 의 차이는 있지만, 전사계급에 기초한 국가라는 점에서는 서구 중세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송나라(960--1234)에 와서는 국가의 성격이 재정국가로 변화되었다. 즉 국가가 조세를 수취하여 그 재정으로 군대를 양성하고 국가관료의 중추는 문관으로 형성되었다. 과거에 무력으 로 자본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렇게 획득한 토지를 그 후대가 상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나라 에 와서는 누구든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것이 토지를 획득하는 방법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호족은 송나라에 와서 몰락하였다. 당나라 말기의 무력이 만능이었던 오대(五代)의 혼란 속에서 몰락해 버린 호족(귀족)들이 재건되지 못했다. 또한 송나라의 건국에 참여한 전사계급도 새로운 호족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경제와 교통의 발전으로 국가가 군대를 직접 양성할 수 있는 충분한 조세수 취가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로이 등장한 계급은 과거시험에 합격한 문관관료로 서 사대부계급을 형성하였다. 사대부계급은 국가의 과거시험을 거친 문관으로서 국가 관료체계에 흡수되어 있으며 호족(귀족)과는 달리 독립된 지방의 세력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이 러한 사대부계급도 점차로 광대한 장원을 소유한 자본헤게모니계급으로 변해갔다. 결국 '장원'이 야말로 중국에서도 자본헤게모니가 통합하는 경제공동체였던 것이다.

서구의 장원영주는 자신의 무력을 가지고 왕과는 계약상의 의무관계에 있는 독립된 지배자였 다. 그러나, 중국의 호족(귀족)이나 사대부는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는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다. 이 러한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가 장원이라는 경제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장원은 물론 서구 중세의 장원과는 다르다. 중국의 장원은 제도적 장치라기 보다는 토지의 매매, 겸병, 수탈 등으로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지배계급이 막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상의 이유에 의하 여 성립한 경제공동체였다. 광대한 중국에서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나 권력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한편 중국호족의 장원에 소속되어 가장 부자유스럽던 농민계층인 전호(佃戶)도 서구 중세의 농노와는 다르다. 전호는 소작인이었으며, 토지에 완전히 긴박되지 않았다. 호족은 전호을 신분 적으로 지배하지 않았고, 전호가 다른 전호의 토지를 동시에 빌려 소작할 수도 있었고, 전호가 계 약을 파기하고 소작을 그만 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호족이나 사대부와 서구 중세의 영주 와의 권력적 차이, 그리고 전호나 농민과 서구 중세의 농노와의 차이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 러한 차이는 시대적 문화적 특수성에 불과하다. 이러한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장원'은 신분계급 이 형성하는 경제공동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서구 중세의 장원체제와 봉건체제를 역사의 한 시대에 나타나는 특이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농업사회에서는 항상 나타나는 자본헤게모니 계급과 경제공동체의 양식(樣式)으로 전형 적인 양식인 것이다. 농업사회에 있어서 토지에 관한 자본헤게모니가 소수의 계급에 귀속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신분계급을 형성하며, 토지를 중심으로 장원이라는 경제공동체가 성립하는 것 은 보편적인 것이다. 이러한 자본헤게모니 계급 없이 국가의 권력헤게모니에 의하여 모든 인민이 국가에 직접 통합되는 체제는 불가능한 것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자본 헤게모니계급 없이 인민을 권력헤게모니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2.2.4.농업사회에서의 교역과 도시

농업은 일정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도시가 형성될 수 없다. 도시란 농업이외의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토지공간이 필요없는 사람들-- 의 취락이다. 도시는 농업이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제공동체이다.

도시는 농촌보다 더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서, 대부분의 경제적 재화는 외부에서 유입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외부에서 경제적 재화가 유입될 수 있는 근거는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충분한 양의 경제잉여를 획득하는 자본헤게모니 계급이 집결하여 생활하는 곳이거나, 아니면 국가재정에서 그 소득을 획득하는 관료계급들이 집결하는 곳이다. 그들을 수요 자로 하여 원거리 교역과 상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거대한 영역의 농촌에 서 생성된 경제잉여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원거리 교역과 상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역과 도시에 의하여 농업사회에서도 화폐는 널리 사용되고 대상인자본(大商人資本)이 등장하기 도 한다. 그러나 화폐나 상업자본은 농업사회에서는 결코 사회의 주요한 범주가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기반은 농업적 경제잉여이기 때문이다.

자본(토지)헤게모니 계급이 농촌 장원의 성(城)에서 살았던 서구 중세 사회에서는 도시가 발전 할 수 없었다. 서구 중세 장원의 생산력은 자본헤게모니계급으로 하여금 도시생활을 가능하게 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오래된 로마제국에서는 제국의 전 영역에서 획득되는 농업적 경제잉여가 로마시에 집결되었다. 로마가 제국화함에 따라서 로마의 속주이었던 이집트, 갈리아, 스페인, 브리타니아에서 농업생산물이 유입되었다. 그에 따라서 이태리 반도에서의 농업은 쇠퇴하 고 포도, 올리브 등 과수재배로 전환하였다. 로마제정에서의 귀족은 속주에서 광대한 토지를 가진 자본헤게모니 계급이었다. 상업도 급격히 발달하여 통상과 항해의 범위는 인도, 중국에까지 이르 렀다. 지중해는 내해였다. 로마는 곡물, 견, 면, 직물, 향수, 보석, 파피루스 등을 수입하였고, 로마 제국의 속주인 스페인 등지에서는 광산이 개발되었다. 로마시는 최성기에는 인구가 백만이 넘었 고, 상하수도, 극장, 목욕탕, 경기장 공공건조물과 문화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한편 로마 이외에 도 많은 자유시가 발전하였으며 전성기인 제정초기의 로마는 도시와 도시를 도로로 연결하는 망 상조직이었다.

한편 로마의 번영과 유사한 시기인 중국 한제국(漢帝國)에서도 상업과 도시는 크게 발달하였 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연소득 20만전을 얻어 봉건제후와 대등한 생활을 한 부유한 상인 이 묘사되어 있다. 로마의 교역과 상업은 쇠퇴해버리고 그 후 서구 중세 1,000년은 농촌사회였지 만, 중국에서는 한제국에 뒤이어 통일한 당제국에서 찬란한 도시문화를 이룩하였다. 당시 중국 당 의 수도 장안(長安)은 많은 인구를 가진 거대도시였다. 중국인들은 서양사람들의 옷, 음식, 음악에 도 익숙한 세계화된 시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당의 세계적 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사 라센 제국이었으며, 동북아에서는 신라(新羅)의 장보고(張報皐)가 해상무역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에 개척된 실크로드를 통하여 이어지던 동서교역은 7세기경부터 유라시아 대륙 남안 을 연결하는 해상교역로(머린 루트)와 함께 세계화가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동서교역의 중간지대 에 있던 이슬람에서는 이미 9세기 경에 세계사에 관한 책이 출판되었다.

당에 이어 성립한 중국의 송제국(960-1240)에서도 상업과 교역은 크게 발달하였다. 송대 전기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이나 후기(남송)의 수도 임안(臨安)도 각각 인구가 100만이 넘었으며, 그외 많은 도시가 있었다. 이때 이미 도시에서는 시민문화가 발전하였으며, 인쇄술의 발달에 의하 여 책이 출판되고 다수 시민이 독서를 하였다. 또한 화약이 출현하였고 석탄이 연료로 사용되었 고 석탄을 이용해 철이 제련되었다. 도자기 산수화 등 예술도 많은 수요를 바탕으로 발전하였 으며 말하자면 시민문화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도시생활이 나타났다. 이어서 몽고제국은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형성함으로써 세계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몽고제국에 뒤이어 성립한 명제국은 대함대를 건설하여 동남아시아의 해안을 거쳐 아프리카 동해안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많은 화교가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여러 제국과 마찬가지로 명나라나 청나라도 농업에 기반을 둔 지주관료계급의 국가였 으며, 그리하여 상업과 상인계급을 철저하게 억압하였다. 이러한 점이 오히려 중국보다 훨씬 늦게 해외탐험과 교역에 나선 서구유럽에 뒤지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근대문명이 유럽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제국 이후 동양의 번영을 기반으 로 확대된 해양무역이 발전하고, 그에 의하여 동양의 기술과 문화가 유럽에 전파되면서, 침체해 있던 유럽이 마지막으로 해양무역에 뛰어들면서 근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해양 무역을 가능하게 하였던 모든 것은 그 이전에 동양에서 제공되었던 것이다. 2.2.5. 농업사회와 근대사회

농업사회에서도 거대한 도시가 있었고, 도시문명이 꽃피었다고 하여, 도시가 농업사회의 중심 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농업사회의 도시란 농촌의 장원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업사회의 경제공동체는 어디까지나 농업적인 장원인 것이다. 도시 는 장원과는 달리 상업적인 공동체이다. 그러나 농업사회의 도시는 광대한 영역의 농업지역을 배 후지로 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즉 도시는 배후지의 농업적 경제잉여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로마나 당, 송, 명, 청의 수도 등의 도시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배계급에 의하여 수취 된 경제잉여가 여기에 집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환은 주로 원거리교역에 의하여 이루어 졌으며 시장이 먼저 발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도시는 이러한 원거리 교역의 중심기지였던 것이 다. 농업사회에서의 교역도시는 농업적 장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반대로 교역과 상업이 농업 을 발전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점은 근대사회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근대사회는 상업과 교역이 농업과 공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걸었다. 공업의 발전에 의하여 농업이 교환경제에 편입된 것이 시장인 것이다. 즉 농업이 시장판매를 위한 생산으로 변화된 것 이다. 그리고 시장이 형성됨으로써 경제공동체는 장원에서 시장으로 변화한 것이다. 경제공동체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농업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장원이라는 점에서 농업사회의 사회적 연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장원은 소규모의 공동체이다. 다시말하면 농업사회에서 사회는 대규모의 공동체를 형성할 경제적 이유나 필연성이 없었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넓은 영역에 걸쳐 대규모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나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또 농업사회의 도시 역시 대규모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가 없다. 도시는 다만 배후지로서 넓은 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따라서 농업사회에서의 대규모 공동체는 경제적 이유보다는 주로 폭력(정복)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그것을 유지시킨 것은 권력헤게모니이다. 자본(토지)헤게모 니 자체는 거대한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제국을 유지시킨 것은 권력이다. 중 국의 거대제국들을 유지시킨 것도 권력이다. 거대 제국은 권력헤게모니와 그에 의존하는 지배계 급이 경제잉여를 취득하고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유지하게 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공동체를 규정한 요소는 주로 폭력(정복)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근대에는 사회의 경제적 차원 그 자체 가 거대한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이 근대이전의 사회와 근대사회의 근본적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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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엔닌은 우리들이 아는 한, 아마 중국으로부터 일본이 문화를 수입하는 최초의 시기에 마 지막을 장식한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대륙에서 만났던 '신라인'들은 세계사의 새로 운 그리고 더 극적인 국면에 참여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세계 해상무역 시대의 초기 단계에 참 여하고 있었다. 이 시대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무역시대의 시작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 당대가 되기까지 세계적인 규모의 해상무역이 인류 경제를 본질적으로 수정할 정도로 성장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것이 성장하게 되자 궁극적으로 그 경제구조를 통하여, 정치적, 사회적 생활도 수정되기 시작했다.

...당나라의 흥륭에 이어 수세기간의 엄청난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주요한 정치형 태가 사회조직과 함께 그대로 살아남아 이 급속한 성장기의 마지막까지도 마치 항구적인 것처럼 확고하였던 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조직과 사회조직이 매우 뛰어난 수준과 안정성을 보존하였 던 결과이다. 이 경제적인 혁명 결과의 일부로서 더 극단적인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처음으로 이 루게 하는 역할은 이후 세계무역에 참가한 나라들에게 남게 되었다. 십자군이나 마르코 폴로에 의하여 유럽반도의 상대적으로 빈곤하고 뒤떨어진 사람들이, 아시아의 위대한 나라들로부터 서쪽 을 향하여 뻗어온 문명의 풍부함과 찬란함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대양무역에 참가한 결 과였다. 이 무역상품의 유통에 따른 부차적인 영향은 서서히 유럽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는 세계 한 부분의 불안정한 봉건사회에서는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었다.

....유럽의 경제성장과 그 결과인 정치적 사회적 변혁은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서유럽 사람 들이 그때까지 수세기 동안 존재하였던 세계해양무역의 주도권을 급속히 장악하게 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역사가가 이때부터를 근대 서양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더 광범위 한 세계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근대의 시작을 당대 세계무역발전의 시기에서 구하고 이 세계무역 에 유럽인이 참가한 것을 근대의 중요한 시대구분의 시작으로 보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타당성이 있다. 또한 현재 아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대변동이 오래 지체되었던 것도 이 세계 해상무역 시대 가운데 다른 중요한 시대구분의 시작을 의미할 것이다.

(중국중세사회로의 여행--라이샤워가 풀어쓴 엔닌의 일기-- 조성을 역. 한울 p.270-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