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눈으로 보는 문명사


제 2편 농업사회 - 계급체제


제 3 장 국가공동체 : 계급국가

2.3.1. 권력 헤게모니와 국가공동체
2.3.2. 서구 중세의 봉건왕국
2.3.3. 계급국가
2.3.4. 평민계급과 계급국가
2.3.5. 문명의 성격에 따른 피지배계급의 지위




2.3.1. 권력헤게모니와 국가공동체

(圈域과 値域)

국가는 권력헤게모니의 공동체이다. 권력헤게모니는 질서폭력의 독점에 기반하는 강제적 헤게 모니이다. 질서폭력에 의한 강제적 헤게모니가 국가공동체의 본질적 요소이다.

권력헤게모니의 성격은 크게 두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권력의 '치역'(値 域range)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권역'(圈域scope)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의 치역은 피지배자에게 권력이 가할 수 있는 행위의 강도(强度)를 의미한다. 아프리카의 이가라 왕국의 왕 은 식사를 하는 동안 시종이 기침을 했다는 이유로 찔러죽이는 것이 당연하였다. 이 경우는 권력 의 치역이 매우 큰 경우이다. 치역이 좁은 국가에서 이렇게 권력을 행사하였다면 그는 굉장한 비 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가라 왕국에서는 오히려 더 많이 더 자주 사람을 죽여야 훌륭한 권력자로 인정되었다.주4) 이에 대하여 권력의 권역은 권력이 통제할 수 있는 피지배자의 행위영 역의 범위를 말한다. 근대국가는 모든 국민의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에까지 통제를 가한다. 가령 모든 국민은 몇년 동안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며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한다. 이것은 권력이 국민의 삶의 상당한 기간 동안 그의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일반 시민들도 교통법규에서 각종 사업의 신고와 허가등 지극히 많은 부분을 통제한다. 이러한 통제를 가하는 행위의 종류의 범위가 권력의 권역인 것이다.

(근대국가)

근대국가는 권력의 치역은 좁으나 권역은 대단히 넓다. 이에 대하여 농업사회의 국가는 권력 의 치역은 넓으나 권력의 권역은 대단히 좁았다. 우리는 흔히 근대의 자유주의 이전의 국가에서 는 마치 자유가 없었던 것처럼 상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유를 권력의 치역과 권 역이 모두 작은 것으로 해석한다면(즉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농업사회에서의 국가에서는 권력의 권역이 좁았고 오히려 자유로왔다.주5)

권력이 인간의 많은 종류의 행위를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비 록 권력의 치역이 컸기 때문에 심각하게 인권을 유린당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자유는 권력의 치역 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또한 근대이전의 국가에서는 민주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권력이 국민 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력을 행사한 것처럼 상상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실과는 달랐다. 왜냐하 면 권력의 권역이 좁았고, 많은 부분에서 권력적 결정은 국민의 자유와는 무관하였다.

이러한 자유의 문제는 농업사회에서의 국가가 어떤 것이었던가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농업사회에서의 경제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국가공동체에도 신분계급이 그 핵심적인 성격을 형성한 다. 농업사회에서는 국가와 국민의 '공적인 권력관계'라기 보다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 또는 신분계급 내부의 관계가 존재할 뿐이다. 물론 헤게모니계급(지배계급)과 비헤게모니계급(피 지배계급)의 갈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국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헤게모니계급 (지배계급)의 내부적 관계야말로 국가의 문제인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국가는 국민을 다스리는 체 계가 아니라, '지배 신분계급의 내부적 체계(계급국가)'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역시 서구 중세의 봉건국가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2.3.2. 서구 중세의 봉건왕국

서구 중세사회에서는 왕이 질서폭력(권력)을 독점할 수 없었다. 왕은 기사를 군대로 편성하여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비용을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질서폭력은 전사계급(장원의 영주계 급이기도 하다)들 개개인에게 분산되어 있었으며, 왕은 이러한 전사계급 상호간의 계약에서 계약 상의 충성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소위 봉건계약으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전사계급과의 상호간 계약관계는 주군(主君:왕)이 종신 (從臣:영주)에게 봉토를 수여하고 그 대가로 종신은 주군에게 복종의 의무를 지는 것이었다. 종신 의 계약상의 의무는 우선 자신이 받은 장원의 수에 해당하는 기사를 동원하는 군사적 의무가 있 었다. 또한 종신은 주군의 법정에 배석해야 하고, 생산물의 일부를 주군에게 헌상할 의무가 있었 다. 이에 대하여 주군은 종신의 봉토에 대한 침입자를 격퇴하고 종신을 보호해야 한다. 주군은 종 신의 봉토내에 함부로 성곽을 건축할 수 없으며, 종신의 처자를 해칠 수 없으며, 종신의 명예를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봉건계약에서 최고의 주군이 국왕이었고 그 영역이 봉건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중세의 국가의 모습이고 근대이전의 모든 농업사회에서의 국가의 전형적 모습인 것 이다. 국가란 결국 전사계급 상호간의 계약관계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계약상의 맨 아래에 위치한 영주가 자신의 장원에 소속된 농민들에게 행사하는 지배력도 있다. 그러나 이 것은 국가적 현상은 아닌 것이다. 왕은 그에 대하여 간섭할 수 없다.

봉건국가란 지배계급 상호간의 계약관계이며, 국가란 순전히 최고 영주(국왕)의 사적(私的)인 관계라고 요약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장원이 영주의 개인 재산이듯이 국가는 최고 영주인 왕의 개 인 재산이다. 권력이란 순전히 이러한 국왕의 사적인 계약상의 권리인 셈이다. 그리하여 국왕의 아들이 세사람이면 봉건왕국은 세개로 분할하여 상속되었으며, 국왕의 딸이 다른 국왕의 아들과 결혼하면 국가영토의 일부는 지참금으로 할양되었다. 실제로 영국왕은 결혼의 지참금으로 받은 광대한 영역을 프랑스에 가지고 있었다.

한편 왕의 권력은 위와 같이 하위 영주들에 대한 봉건계약상의 권리였으므로 농민들에게 직 접 미치지 않았다. 또한 전쟁은 기사계급이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농민들은 전쟁과 무관하였다. 말 하자면 국민들은 전쟁에서나 조세에서나 권력에서나 국가나 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중세 봉건국가는 국민(농민)과는 무관한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익숙한 근대의 국가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왕이 가지고 있는 권력은 그 권역이나 치역에서 일반 국민(농민)과는 무관한 것이다. 한편 영주를 국가기관으로 간 주한다고 하더라도 권력의 권역은 대단히 좁았다. 왜냐하면 왕이나 영주는 권력의 권역을 넓힐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권력의 치역은 대단히 넓 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를 통치한다기 보다는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한 사적인 착취 나 억압이었기 때문이다.

농업사회에서의 국가는 계급국가이다. 계급국가라는 의미는 극단적으로 말하여 헤게모니 계급 (지배계급) 내부의 상호관계이며, 국민(농민)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국가와 국가의 투쟁(전쟁)도 전쟁을 담당한 지배계급(기사계급)의 일이었다. 왕가(王家) 상호간의 결혼이 사적(私的)인 친교였 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도 사적인 투쟁(私鬪)이었던 것이다.

계급국가에서는 국민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계급국가에서는 국민은 존재 하지 않는다. 계급국가는 지배계급의 내부적 위계체제인 것이다. 평민과 지배계급과의 관계는 규 정할 수 있지만, 평민과 권력자(왕)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민은 국가가 어떻게 변 화하더라도 상관없으며 여전히 신분계급체제에 의하여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설령 국민(평민)과 의 관계에서 변동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것은 권력 자---가령 왕---가 평민을 의식하지 않았다거나 나라를 의식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왕들은 백성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평민을 의식하는 것도 신분계급에 의하여 형성된 사회체제를 전제로 하였다.

2.3.3. 계급국가

봉건국가에 나타나는 계급국가의 성격은 서구 중세라는 특수한 시공(時空)에서 형성된 특수한 국가의 모습이 아니다. 봉건국가는 농업사회에서 형성된 국가의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모습 이다. 농업사회는 신분계급사회이고, 국가는 이러한 신분계급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 급국가적인 성격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신분계급이 폐지되어야 하는데, 농업사회에서는 그것이 불 가능하다.(이것을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신분계급의 철칙'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계급국 가는 농업사회, 그리고 인류 역사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국가의 보편적 모습이다. 계급국가는 국민 의 국가가 아니라 그들(상위의 신분계급)의 국가인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최전성기의 고대국가인 스파르타의 인구는 약 40만명이었다. 그 중 지배계급은 약 2만명이었 다. 지배계급은 생산에서 벗어나(경작은 전적으로 노예들이 하였다.) 오직 정치와 군사에만 종사 하였다. 그들은 시민계급으로 불리워지나 사실 이것은 적절한 명칭은 아니다.(오늘날 시민은 국민 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나 고대 그리이스의 시민은 국민이 아니라 지배계급인 것이다.) 스파르 타의 지배계급은 엄격한 병영적 생활을 하였다. 한편 스파르타와는 정반대로 민주정치를 하였다 는 아테네도 마찬가지로 시민계급(지배계급)의 국가였으며, 민주정치는 소수의 시민계급이 참가하 는 것이었다. 결국 그리이스의 민주주의라는 것도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인 것이다.

이처럼 계급국가의 성격은 지배계급 내부의 헤게모니 체계가 어떠한 모습인가 하는 것에 의하 여 좌우된다. 즉 스파르타의 지배계급 내부의 체계는 군대적 조직이었다면, 아테네의 지배계급 내 부의 관계는 민주적 합의 과정이었다. 로마의 계급국가적 성격은 지배계급(귀족)들이 원로원을 구성하여 왕을 견제하는 공화정이었다. 나중에는 황제가 독재적 권력을 가지고 이에 복종하는 귀 족계급들의 체계를 형성하였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에도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가 국가였다는 점 에서는 변함이 없다. 이것이 중세에서는 지배계급이 하나의 <조직체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상호 간에 계약관계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한편 동양에서는 거의 전역사에 걸쳐서 국가가 하나의 거대한 관료체제를 형성하고, 지배계급 은 이러한 관료체제와 결합되어 있었다. 이들 국가들은 모두다 지배계급의 국가였으며,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가 군대조직이건, 민주적 합의체이건, 사적인 계약관계이건 그것이 계급국가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로마는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를 명확하게 제도화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효과적인 민 주정도 아니었고 세습왕정도 아니었다. 이것이 로마멸망의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 왕위계승절차가 없는 것이 로마멸망의 중대한 원인이었다. 중국의 왕조국가는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가 관료체제 였다. 중국에서의 계급국가는 대단히 발달된 조직으로 되어 있었다. 관료체제로서 그 업무와 조직 은 세분되고 통합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서구 봉건국가에서는 독립적인 지배계급의 계약관계였다 면, 중국에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적 거대조직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관료제의 관료들은 당(唐)나라 이후로 과거시험이라는 시험제도에 의하여 충원되 었다. 그렇지만 과거시험도 초기에는 무력국가(武力國家)의 성격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호족들의 관료에 대한 사실상의 독점을 폐지할 수 없었다. 과거시험은 기존의 귀족계급이 관료체제를 형성 하는 절차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경향은 반전(反轉)되었다. 즉 과거 시험이 토지를 획득하고 지배계급에 소속하는 가장 중요한 통과문이 되었다. 이것은 계급에 의하 여 국가가 형성되었던 것이 거꾸로 국가(과거시험)에 의하여 계급이 형성되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동양왕조는 아주 발전한 계급국가였다. 그러나 동양의 왕조국가 역시 계급국가라는 성격 을 본질 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2.3.4. 평민계급과 계급국가

평민은 계급국가에서 국가의 구성 요소가 아니었다. 신분계급제도의 구성요소일 뿐이었다. 근 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국가 이전에 신분계급제도가 있었고, 국가는 그것을 전제로 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국왕이 평민들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국왕은 평민을 염려하지만 그러한 염려는 신분계급체제를 전제로 하여--그것을 당연한 조건으로 하여-- 염려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계급국가라는 것은 신분계급체제라는 구조위에 성 립할 수 밖에 없는 객관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어떠한 권력자도 신분계급을 근원적으로 타파 하고 국왕과 평민을 직접 조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화 폐가 일반화 되면서 신분계급은 무너졌다.) 국가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동시에 신분계급체제를 유 지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계급국가의 성격이다.

계급국가가 조세(租稅)를 걷는 것도 오늘날과 다르다. 계급국가에서는 국가에서 직접 조세를 거두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조세를 걷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배계급이 소득을 얻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었다. 가령 노예체제의 경우 노예에게 조세를 수취할 필요가 없다. 봉건국가의 경우에 는 조세수취(租稅收取)가 개별 영주의 권리였으며, (장원이 국가가 아니라면) 그것은 조세수취라 고 할 수 없고, 다만 토지를 보유한 영주의 수입인 것이다. 봉건국왕은 자신의 장원에서 수입을 얻었으며, 국민으로부터 조세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봉건국가와 다른 시대의 계급국가에서는 조세수취가 어떠한 형태로든 평민에게 미친다. 그러 나 국가가 직접 모든 평민에게 조세를 수취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는 지 배계급으로부터 조세를 수취하고 지배계급은 이것을 평민에게 전가(轉嫁)하는 방식이 된다. 결국 농민은 합계된 조세를 지배계급에게 납부하는 것이다. 로마와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조세권을 아 예 매도(賣渡)하는 조세청부제도가 있었다. 관료체제가 발전한 동양의 왕조국가에서도 중앙정부가 지방관료기구로부터 일정율의 조세를 부과하면, 지방관료기구는 그에 자체의 비용을 부가한 비율 로 평민들로부터 조세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송나라 이후 재정국가(財政國家)로 변화하면서 평민에 대한 수취체제는 국가의 가장 중대한 업무가 된다. 중국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고전과 시문에 능해야 했지만, 그들이 관료 로 충원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야 하는 일은 조세의 수취였다. 그러나 가장 효율적이었던 중국의 관료체제국가도, 지방관료기구를 효율적으로 통제하여 그들의 탐욕을 억제하고 국가가 필 요한 만큼의 조세수취를 성공적으로 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평민의 조세는 중간기구들의 착취(搾取)가 추가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장 발전된 계급국가의 경제적 모습인 것이다.

계급국가에서 국왕은 거시적 관점에 서게 된다. 그는 평민 전체에 대하여 헤게모니를 행사하 고 동시에 평민전체로부터 조세를 수취한다. 따라서 그는 평민이 부유하지 않으면 그 자신의 운 명도 위험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개별귀족은 그러하지 않다. 그는 평민전체에 대한 영향력이 없 으며 평민전체의 부유함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도 아니다. 국왕의 목적과 지배계급의 목적은 서로 다른 것이다. 국왕의 관점에서는 지배계급을 억제하는 것이 평민을 부유하게 하는 것이고, 동시에 국가의 재정(財政)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귀족계급은 자신의 소득(수 입)을 더 많이 얻는 것만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왕조의 역사는 국왕이 귀족계급을 억제하는 정책의 성패에 의하여 흥망이 좌우 되었다. 국왕이 귀족계급을 억제하는 제도가 성공적으로 작동할 때 국가는 부유하고 평화스럽다. 그러나 국왕의 권력이 쇠퇴하면 귀족계급이 평민을 심하게 착취하게 되고, 국가의 재정은 빈약 해지고, 농민들은 도적이 되고, 마침내 반란이 야기되거나 이민족의 침입으로 왕조는 붕괴하는 것 이다.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는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 하였다. 중국의 한(漢)제국은 태평도(太平道) 와 오두미교(五斗米敎)라 불리우는 농민반란으로 붕괴하였다. 당(唐)제국도 안록산의 난에 뒤이은 황소(黃巢)의 난 그리고 이민족의 침입에 의하여 붕괴하였다. 그 뒤의 송(宋), 명(明), 청(淸) 모두 왕권(王權)의 약화, 비대해진 지배계급의 분열, 농민의 반란, 이민족의 침입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이처럼 계급국가에서 권력은 지배계급 내부의 통합과 갈등의 관계이다. 귀족계급을 억제하려 는 국왕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평민을 보호하는 정책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지배 계급 내부의 관계에 그 기초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계급국가는 국민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 이 아니라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신분계급이 국가의 전제이고 본질이다. 권력의 성격도 이것에 의하여 규정된다.

계급국가에서는 평민에 대한 권력의 권역(圈域)은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와 무관한 것이기 때 문에 좁은 것이다. 한편 평민은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체계와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외부에 버려져 있기 때문에-- 평민에 대한 권력의 치역(値域)은 넓은 것이다. 평민의 권리는 평민이 직접 국가에 참여할 때 강화된다. 그것은 평민이 병사(兵士)로 충원되는 경우이다. 평민이 계급국가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은 국가의 폭력(군대)에 참여하는 것이다. 로마의 평민은 군인으로 참가하였을 때 가장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경우에만 권력의 치역은 제한될 수 있는 것이다.

2.3.5. 문명의 성격에 따른 피지배계급의 지위

농업사회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성격은 문명의 성격에 따라서 변해온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간적 선후관계에 따라서 노예제, 농노제, 자유인(근대의 국민) 등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 다. 농업사회에서 계급국가라는 점은 보편적이고 법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배계급이나 피지배 계급의 성격이 역사법칙에 따라 발전되어 온 것은 아니다. 인민(평민)이 어떠한 삶을 사는가--노 예인가 농노인가 평민인가---하는 것은 문명(문명)의 성격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은 노예, 농노, 평민으로 그 성격의 차이가 있었다. 노예는 거대한 농 장을 기업적으로 경영하는 경우에 필요한 생산동력이었다. 거대농장이 아니라 농민에게 소작을 주는 경우에는 노예 대신에 농노와 평민의 성격을 가졌다. 농노와 평민의 차이는 농민을 토지에 결박(結縛, 緊縛)할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에 의하여 좌우된다. 생산성이 낮아 농민의 주거이동을 금지할 필요가 있을 때 토지에 결박된 피지배계급이 농노(農奴)이다. 서구에서는 고대 노예사회에 서 중세 농노사회로 바뀐 것은 중요한 변화였다. 그러나 다른 사회가 반드시 이와 같은 경로를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토지가 일찍부터 사실상 사유화 (私有化)되었다면 따라서 생산의 차원에서 노예가 생겨나지 않았다. 또한 서구 중세와 같이 농민 을 장원에 결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농노도 중요한 의미가 없다.

지배계급의 성격도 농업사회에서 모두 동일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의 가장 고전적인 유형은 전 사계급(戰士階級)이다. 즉, 폭력을 담당하는 전사계급이 지배계급을 형성하며, 토지자본이나 지식 은 전사계급이 부수적으로 장악하는 것이다. 그리이스의 민주정치는 전사계급인 지배계급(그리이 스의 시민계급) 내부의 관계이다. 지배계급의 성격이 전사계급일 경우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가 평 등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그리이스에서는 민주주의로 나타나고 중세 봉건국가에서는 계약관 계로 나타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이스의 민주정치는 국민에 대한 통치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 계급인 전사계급 내부의 합의양식이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의 송나라 이후 그리고 한국의 조선 시대의 지배계급은 문인계급(文人階級)이었다. 지배계급의 성격이 문인 관료계급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교적 이념에 바탕을 두고 과거시험에 합격한 지식인인 문인에게 권력과 토지자본이 주 어져 지배계급을 형성하는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지배계급의 또 하나의 유형은 상인계급(商人階級) 내지 지주귀족(地主貴族)이다. 이들도 토지를 보유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들은 전사나 문인이 아니다. 전사계급이나 문인계급이 지배계급인 경우 토지의 보유는 지배계급의 부수적(부수的) 특 권이다. 적어도 그들은 토지보유 이외의 업(業)--전쟁,학습-- 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 인계급 내지 지주귀족은 토지보유와 그 유지와 확장이 그들의 주요한 업(業)이다. 우리가 상인과 지주를 동등하게 보는 이유는 그들의 토지의 보유와 관리를 업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이 전사나 문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등하기 때문이다. 토지를 보유하지 않은 순수한 상인은 농업사회에서 는 지배계급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그리이스나 로마와 같이 원거리교역(遠距離交易)에 기반한 해 양문명(海洋文明)에서도 순수한 상인이 아니라, 영지를 보유하고 교역에 종사한 상인이야말로 지 배계급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방에 있는 경우에는 전사를 거느린 호족(豪族)이 되고 중 앙집권적인 경우에는 궁정의 귀족(貴族)이 된다.

피지배계급이 노예이든 농노이든 평민이든, 또 지배계급이 전사이건 귀족이건 문인이건 상관 없이, 모든 농업사회는 신분적 계급체제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또한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가 군대조직이건(스파르타)이건, 민주적 합의양식(그리이스)이건, 사적(私的)인 계약관계이건(서구중 세), 관료체제를 형성하고 있던(중국의 송나라, 한국의 조선시대), 그것 역시 신분계급체제인 것이 다. 국가는 이러한 신분계급체제를 전제로 한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로서 '계급국가'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인류의 과거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마치 근대가 가장 발전한 시대 이고 근대 이전의 시대는 대단히 뒤떨어진 사회, 계몽되지 못한 사회로 생각한다. 또한 모든 인류 역사가 마치 근대사회로 이르는 중간의 도정(道程)인 것처럼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농업사회에서는 <신분계급의 철칙>이 지배하였다. 그러나 신분계급의 철칙을 제약조건으로 하여 얼마나 높은 문명에 도달했는가 하는 것으로 과거사회를 평가해야 한다.

근대사회를 기준하여 근대사회와 유사성이 많을 수록 무조건 발전된 사회로 평가하는 것은 잘 못이다. 가령 헤겔의 말과 같이 '인류의 역사는 자유의 의식에 있어서의 진보이다' 와 같은 기준 은 잘못된 평가기준이고 잘못된 역사의식이다. 그것은 직선적 시간관을 전제로 하는 서구근대인 의 자기중심성에서 연유한다. 그는 동양왕조체제에서는 오직 1인만이 자유로운 체제--가장 야만 적인 체제--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는 동양의 왕조체제야말로 과거 그 어떠한 사회에 비해서도 가장 발전된 사회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점에 관하여 우리는 제5장에서 재론할 것이 다.

************************

주4) 아프리카 왕의 주된 속성들 가운데 하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권력이었다. 그가 퍼뜨리는 공포는 엄청났았다. "당신은 이제 아타(왕)입니다. 당신은 삶과 죽음에 대한 권력 을 갖고 있읍니다.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나 죽이십시오." 이것이 이가라 (나이지라 북부에 있던 왕국)의 왕의 즉위식에서 낭독하는 헌사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죽였는 데 아무런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는 살인에 대해 해명할 필요 가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직접 자기 손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 서 그를 대신해서 그 일을 하는 사형집행인은 그의 궁정에 없어서는 안되는 관리였다. 다호메이 에서처럼 그런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관리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결국에는 수상이 되건, 아샨티에 서처럼 일종의 카스트를 형성한 수백명의 사형집행인들이 있건, 처형이 빈번하거나 특별한 경우 에만 행해지건 간에, 사형선고의 공표는 언제나 논란의 여지없는 왕의 권리였으므로, 왕이 그 권 리를 행사하지 않는 채 상당한 시간을 보내면 그의 권력에 필수적인 공포는 상실되었다. 그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경멸을 받았다.

왕은 사자나 표범으로 여겨졌다. 이 동물이 그의 조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도 그랫지만, 그가 그 동물의 직계자손이 아니면서도 그 자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랬다. 그가 지닌 이른바 사자의본질 또는 표범의 본질은 이 동물들처럼 죽여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동물들이 그러듯이 그가 죽이고 공포를 퍼뜨리는 것은 옳고도 타당했다. 그의 살해의 성향은 상 대적이어야만 했다.

우간다의 왕은 혼자서 식사를 했는데 아무도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아서는 안되었다. 그의 아내들 가운데 하나가 그에게 음식을 건네주고는 그가 식사하는 동안에 등을 돌리고 있어야만 했 다. "사자는 혼자서 식사한다"고 이야기 되었다. 음식이 그의 기호에 맞지 않거나 충분히 신속하 게 바쳐지지 않으면 그는 담당자를 불러 창으로 찔러 죽이곤 했다. 그의 시중을 드는 아내가 그 가 식사하는 동안에 기침을 하면 그녀 역시 살해당했다. 그는 항상 손에 창 두자루를 쥐고 있었 다. 누군가가 우연히 들어와서 식사하는 왕을 놀라게 만들면, 그는 현장에서 창으로 꿰뚫렸다. 그러면 백성들은 "사자가 식사를 하다가 아무개를 죽였다"고 말했다. 어떤 인간도 왕이 남긴 음 식에 손대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찌꺼기는 그의 애견들에게 주어졌다. 키타라의 왕에게는 그의 요 리사가 음식을 먹였다. 요리사는 음식을 가져와서 포크로 고기 한 점을 찍어 왕의 입에 넣었다. 그는 이것을 네차례 했는데 만약 그가 우연히 포크로 왕의 이빨을 건드리면 그는 사형을 당했다.

(Canetti 저 Masse und Macht 반성완 역 군중과 권력 한길사 p.489-490)

주5) 권력의 권역과 치역의 개념은 Karl Wolfgang Deutsch 의 저서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는 권역과 치역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할 용어인 이値域은, 권력 소지자(power-holder)가 그의 정의역(domain)내의 어떤 사람에게 부여할 수 있는 - 혹은 가할 수 있는- 最高의 價値報償 혹은 價値附與(indulgence)와 最惡의 價値懲戒 혹은 價値剝奪(deprivation)간의 差이다."

"權力圈域이란, 이것(권력)에 효율적으로 隸屬되는 모든 特定 種類나 等級의 行爲關係와 事件의 群(set) 혹은 集合體를 의미한다. "

Karl W.Deutsch 저. The analysis of international Relations(국제정치의 분석). 구영록 역 p 58,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