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을 벗어난 문명사


제 2 편 농업사회 - 계급체제

제 4 장 문화공동체 : 보편교회

2.4.1. 공동체의 집합표상
2.4.2.농업사회의 집합표상 헤게모니
2.4.3. 중세 보편교회의 문화공동체
2.4.4. 교권과 속권: 집삽표상 헤게모니와 권력 헤게모니
2.4.5. 일본의 천황제도
2.4.6. 이슬람과 중국의 집합표상 헤게모니
2.4.7. 헤게모니 계급과 문화공동체




2.4.1.공동체의 집합표상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는 데는 정신적 기반이 있다. 이러한 정신적 기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또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물고기가 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전혀 다른 사회(공동체)로 여행을 해보면 즉각 그 사회가 자신이 속했던 사회와 정 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시대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중세사 회로 간다면 그 정신적 기반이 우리와는 전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기반은 집합표상으로서 개개인의 의식에 내장되어 있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정 신적 기반은 개개인의 의식에 있어서의 공통성이다. 사회의 정신적 기반이란 결국 개개인의 집합 표상의 동질성인 셈이다. 그러나 사회의 정신적 기반은 개인적 집합표상에 그치지 않고, 집합표상 에 관여하는 사회적 기관이나 조직에도 달려있다. 가령 교육기관은 집합표상의 일부(특히 지식) 를 세대를 통하여 전달하는 기관으로 정신적 기반이 된다.

한편 사회를 형성하는 집합표상에는 정당성에 대한 집합표상이 있다. 정당성에 대한 집합표상 은 개개인의 행동에 대하여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성의 집합표상에 영향을 미치고 정당성의 집합표상을 상징하는 인격체를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인격 체는 사회구성원들에 대하여 정신적 권위를 가진다. 이러한 정신적 권위야말로 집합표상헤게모니 의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적 권위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하나의 정신적 공동 체로 통합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 권위를 가진 인격체를 존중함으로써 그것이 인간을 공동체로 통합시키는 것이다. 중세의 교황이나 현대의 입헌군주국의 국왕이 바로 그러한 존재이 다.

이것은 인간의 공동체는 권력이나 자본과 같은 요소만이 아니라 정신적 요소(집합표상)에 의 해서도 통합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집합표상헤게모니는 본질적으로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헤게 모니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힘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집합표상헤게모니는 때 로는 자본이나 권력 나아가서는 폭력에 대해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태국에서는 17회에 걸쳐 쿠데 타가 일어났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7차례는 국왕의 추인을 받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가장 최 근에 일어난 1992년 2월에 진행된 쿠데타도 국왕의 개입에 의하여 실패하였다.주6) 폭력(군사력) 에 의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쿠데타가 물리력이 전혀 없는 국왕의 추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야 말로, 집합표상헤게모니의 위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국왕의 정신적 권위는 일체의 물리 력의 근원이며 동시에 일체의 저항의 근원이다.

근대 이후의 정치이론은 권력헤게모니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헤게모니에 의해서 공동체 의 정치적 차원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권력헤게모니 자체가 집합표상헤게모니 에 토대를 두는 측면도 있다. 권력의 정통성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인류역사상 왕이나 황제의 기 능은 정당성의 상징이었고, 말하자면 집합표상헤게모니를 가진 정신적 권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농업사회에서 주요한 집합표상은 무엇인가?

2.4.2. 농업사회의 집합표상헤게모니

농업사회를 본다면 농업생산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농업생산에 필요한 지식은 지식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러한 지식은 농부로 자라면서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농업생산에 관련된 지식은 인간의 집합표상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기상, 기후, 자연의 힘, 삶과 죽음, 선과 악 등의 해석에 관한 집합표상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농업사회에 서 인간의 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집합표상의 내용은 '사회와 자연의 해석'에 관한 집합표상이었 다. 결국 그것은 도덕적 종교적 집합표상이었다.

농업사회의 사람들에게는 사실에 관한 지식(집합표상) 보다는 가치에 관한 집합표상이 더욱 중요하였다. 왜냐하면 사실에 관한 지식들은 지식으로 규정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농부가 농 사를 짓는 기술, 전사가 전쟁을 잘하는 기술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기술이지 지식이 아니다. 그러한 기술은 체계화되고 개념화되어 지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집합 표상에서도 중요하지 않다. 집합표상이란 개념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도덕이나 종교와 같은 가치에 관한 집합표상이야말로 중요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것이고 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 라는 종교적 집합표상이 <사실에 관한 진술>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질적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관한 가치관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 을 사실에 관한 진리로 믿는 것은 그에 내재된 가치관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다.

농업사회에서의 신분계급의 철칙은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차원, 집합표상헤게모니에 있어서도 지켜졌다. 집합표상헤게모니의 확립이 바로 하나의 신분계급을 형성하는 것이다. 서구 중세의 승 려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집합표상의 원천이 되는 지식을 독점함으로써 하나의 계급(승려)이 이 루어지는 것이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음으로써 지식을 독점하였다. 또한 지식을 독점함으로써 종 교 자체가 일정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정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집합표상헤게모니의 영역은 문화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집합표상헤게모니가 작용하는 영역 내 의 사람들은 집합표상헤게모니에 의하여 동질적 집합표상을 가지게 되고, 동시에 모두다 그 집합 표상헤게모니에 정신적으로 승복함으로써 문화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공동 체의 영역은 권력헤게모니의 영역(국가)과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다. 한편 이러한 집합표 상헤게모니는 다른 헤게모니와 결합하여 헤게모니계급을 형성하였다.

2.4.3. 중세 보편교회의 문화 공동체

중세 유럽(5C-15C)에서는 앞에서 본대로 정치적 통일이라는 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 었다. 메르빙 왕조, 카로링 왕조, 카페 왕조, 오토 왕조 등의 왕조가 있었으나 권력은 대체로 단 명하였고 미약하였다. 중세시대에 유일하게 장기간 왕권다운 왕권을 휘두른 사람은 샤를마뉴 (Charle agne: 카알 대제, AD.800년에 즉위) 뿐이었다. 그 이외에는 중앙집권적인 권력은 존재하 지 않았다. 중세 사람들은 지역적이었고 장원의 영주에게만 신분적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자기 고장의 말(言語) 이외에는 몰랐고, 다른 곳의 사람들과 교류할 필요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중세의 사람들은 지배자이건 피지배자이건 국가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실제로 영토적 주권 이 작용하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적인 통합이 없고 서로 고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사람들은 강한 유 대로 결합되어 있었다. 중세유럽을 하나의 세계로 결합시킨 유대는 그리스도교 신앙이었다. 즉 정 치적 경제적으로는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유럽은 전체가 하나의 공동 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유럽사람들은 그 생활양식과 의식, 그리고 문화에 있어서, 오직 한 사람 교황의 종주권 밑에 있었다.

이처럼 중세유럽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한 것은 경제나 권력이 아니라 종교적 집합표상 이었다. 적어도 16세기까지의 서구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태어날 때 국가에 소속되어 출생하는 것처럼 당시의 사람들은 교회에 소속되어 출 생하였다. 그리고 가토릭 교회의 의식에 의하여 결혼하고 또 죽었다. 당시의 왕이나 영주들은 백 성이 교회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고, 교회에 대한 공격은 당연히 처벌되어 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정치적 권력, 국가적 통합이 없는 세계에서 종교적 헤게모니(즉, 집합표상헤게모니)가 사실상 사회적 강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강제력은 결코 폭력의 독점에 기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구원(救援)이었다.

중세의 사람들에게 내세의 구원은 지상의 삶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구원 을 도와주는 지상의 제도적 기구였다. 영혼의 구제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사(聖事)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영세, 견진, 성체, 고해, 종부, 신품, 혼배성사로 이루어진 성사는 교회의 권한이었다. 성사를 받는 것이 구제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성사의 보류는 심각한 벌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성사의 보류가 바로 파문(excommunication)이었다. 완전파 문은 고위 성직자나 교황이 선포하는 것으로서, 파문을 받은 사람은 교회의 모든 의식에서 분리 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파문당한 사람과 왕래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파문 된 사람은 사람들과의 사회관계에서 배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바로 사회적 커뮤니케이 션의 단절(excommunication)이다. 이것은 심각한 사회적 압력이며 사회적 강제력인 것이다. 이처 럼 서구중세에서는 집합표상헤게모니가 파문 등의 종교적 제도를 통하여 사회적 심리적 강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집합표상헤게모니는 권력헤게모니에 의하여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세속의 왕이나 영주가 이러한 파문을 승인한다면, 그는 세속적인 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법자로서 법적 보호 밖으로 추방되는 것이었다.

한편 13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늘어나는 이단과 맞서 싸우고 유럽의 종교적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재판소 제도를 만들었다. 종교재판소는 이단이라고 혐의를 받은 사람의 신앙을 신문 하는 제도였다. 종교재판은 그에 회부된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이단을 고백하게 하고, 포기를 맹 서하고, 고해를 통하여 순종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나아가 교회의 승려나 수 도원장은 현실적으로는 봉건영주였다. 그들은 장원주로서 장원내의 농민들로부터 봉건적 세금을 거두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주군에게 봉건적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교회의 종교 적 헤게모니는 현실적인 권력헤게모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체제는 분리된 정치체제와는 달리 전유럽에 걸쳐서 하나의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법은 전유럽을 통하여 보통법으로 작용하였으며 세속의 군주가 교회의 보통 법을 바꿀 수는 없었다. 오늘날은 국가가 공공정책의 하나로 종교의 자유를 어느 범위까지 허용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러나 중세는 정반대로 세속의 군주가 교회의 제한을 감내해야 했으며, 세속 군주의 권력의 영역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보편교회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세유럽은 보편 교회체제가 유럽전체를 통합하고 지배하는 하나의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말하자면 '종교적 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전유럽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고 있는 보편교회 체제는 정치적인 제국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중세 유럽의 가토릭제국은 결코 로마제국은 아닌 것이다. 교황은 결코 황제가 아 니고 교회의 헤게모니는 결코 권력이 아니다. 권력은 물리적 폭력의 독점에 근거한 강제력이다. 그러나 교황이나 교회의 헤게모니는 결코 물리적 폭력의 독점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집합표상에 근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심리적 헤게모니(집합표 상헤게모니)가 그 본질인 것이다.

교회의 성사에 대한 권한이나 파문의 권한은 설사 실질적으로 강제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성격이다. 성사를 베풀지 않는 것은 사제의 부작위(不作爲)이며 결코 민 중에 대한 강제가 아니다. 그리고 파문 역시 일종의 선언행위(宣言行爲)이며 역시 강제가 아니다. 파문의 결과 다른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을 단절하는 것 역시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세속 권력이 법의 보호를 박탈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권력의 행위이며 교회의 행위가 아니 다. 그러나 한편 중세에서 교회나 수도원은 봉토를 소유하며 영주와 같은 지위에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는 강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교회나 수도원이 세속적 지위를 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강제력은 이러한 세속적 권력에서 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집합표상헤게모니와 권력헤게모니 그리고 자본헤게모니가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세의 전유럽을 통합한 기독교 공동체의 성격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국가나 제국과 같은 공동체는 결코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동체를 집합표상 공동체 또는 문화공동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것은 국가와 같은 권력적 공동체와는 구별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2.4.4. 교권과 속권 : 집합표상헤게모니와 권력헤게모니

중세유럽은 위와 같이 문화공동체였고 그것을 통합하는 헤게모니는 종교적 헤게모니 내지 집 합표상헤게모니였다. 그러나 중세의 교회나 수도원은 종교적 조직인 동시에 세속적으로 봉토를 가지고 민중을 지배하는 장원의 영주와 같은 지위에 있었다. 이러한 점이 세속적 권력과 갈등을 야기하였다.

원칙적으로 왕과 권력은 인간의 세속적인 삶을 관장하는 것이었으며, 교황과 교회는 인간의 정신적 삶을 관장하는 것으로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중세에서도 이러한 구별은 이론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세와 오늘날의 다른 점은 경제적인 측면에 있다. 중세는 토지자본 이 자본의 전부였으며 장원을 소유하는 것은 곧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중세의 교회나 수도 원은 토지자본 즉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러한 점에서는 엄연히 세속적인 권력적 지위를 겸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장원을 소유한 주교의 서임을 두고 교회와 세속적 권력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교는 교회의 사제이면서 동시에 왕의 봉신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교는 결혼하지 않기 때문에 왕의 입장에서는 그 봉토를 주교의 사망시에는 항상 왕이 선택한 다른 기사에게 수여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이것은 왕권의 강화에 편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주교의 서임권을 둘러싸고 세속권력과 교황간의 갈등이 중세의 역사를 수놓고 있다.2.4.5.일본의 천황제도

1988년 9월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裕仁)가 병석에 누웠을 때, 수많은 일본인들이 황궁 앞 광장 에 모여 천황의 회복을 빌었고, 축제는 취소되었고, 결혼식은 연기되었다. 3개월의 투병끝에 천황 이 사망하였을 때, 황궁 앞에 엎드린 시민들은 통곡하였고 천황폐하의 뒤를 따르겠다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천황에 대한 숭배는 일본 국민의 통합에 유력한 요소가 되고 있다. 모든 일본인들은 천황의 적자이고 천황은 수천년을 이어져 온 신의 후손이라는 집합표상이 일본국민의 의식을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그것이 신화라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명백한 구체적 진리 보다 명백한 신화를 더 가치있는 신념으로 믿는다.)

일본의 신화를 본면 천황은 태양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의 후손이다. 하늘나라에 사는 천조대신 은 손자에게 수행신들을 딸려 지상의 나라로 내려보낸다. 이같은 천손강림(天孫降臨)의 신화는 많 은 나라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한국에서도 하늘에 사는 신(神)인 환인(桓因)이 수행신을 딸 려 아들인 단군(檀君)을 지상의 나라로 내려보냈고,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하는 것이 단 군신화이다. 그러나 단군의 후손에 의하여 지배되던 고조선은 멸망하고 만다. 이에 비하여 일본은 이러한 신화에 의하여 규정되는 천황이 왕조와 권력의 변화와 무관하게 만세일계(萬歲一系)로 오 늘날의 천황에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독특하다. 일본에서 최초의 천황인 신무천황 (神武天皇)은 천조대신의 후손으로 서기전 660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있다. 오늘날의 천황은 이 최초의 천황으로부터 계산하여 125대 째의 천황이다. 그것이 사실인가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이 러한 집합표상이 천황이라는 정신적 권위를 만들어 내고 나아가서 천황에 대한 숭배가 일본국민 을 통합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서구 중세의 교황의 권위가 전사문명에 의하여 채울 수 없는 정신적 권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일본사에서도 전사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막부정권(幕府政權) 시대에 천황이 정신적 권위 로 작용하여 왔다. 일본의 천황이 권력헤게모니를 장악한 시대는 고대국가시대로서 그것은 다른 어느 나라와도 동일한 왕조국가였다. 아스카(飛鳥) 나라(奈良) 평안(平安)시대에는 중국 당나라 황 제와 마찬가지로 천황은 국왕이었다. 그 이후 1333년 건무(建武)의 중흥이라 불리는 불과 2년의 천황친정(天皇親政)기간이 있었지만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천황이 요시노(吉野)로 도주함으로써 친 정은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10세기 중반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천황은 상징적인 존 재이다. 일정한 직위의 관료가 사실상의 실권자로서 권력을 행사하던 섭관(攝關)시대에는 후지와 라(藤原)씨가 실권을 장악하여 섭정(攝政)을 하였고 섭정(攝政), 관백(關白)의 지위를 세습했다. 가 마꾸라(鎌倉) 막부시대에는 미나모토(源)씨와 호조(北條)씨가 세습왕권을 쥐고 있었고, 무로마치 (室町) 막부시대에는 아시카가(足利)씨가 2백년을 넘게 세습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도꾸가와 (德川) 막부시대에는 260여년 동안 도꾸가와씨의 세습왕조였다.

일본의 중세시대가 서구의 중세와 다른 점은 통일된 권력헤게모니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다. 그것은 막부라 불리는 무사계급의 권력조직이었다. 그러나 일본 역시 서구 중세와 같이 전사 계급의 권력헤게모니와 함께 종교와 집합표상에 기반을 둔 상징적 천황의 집합표상헤게모니가 제 도적으로 공존한 체제였다. 전사계급은 권력과는 별도로 집합표상헤게모니체제를 필요로 하였다. 서구의 샤를마누 대제가 집합표상헤게모니를 필요로 하였던 것처럼, 일본의 막부정권의 장군도 천황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막부의 성립자체가 천황의 권위를 옹호하고 받든다는 명분으로 전국의 지배에 대한 정당성의 집합표상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천황은 서구 중세의 교황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헤게모니였으며 (그것은 막부자체가 일본 전체의 통일된 정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권력헤게모니와 집 합표상헤게모니의 대립은 심각하지 않았다. 막부시대의 천황의 권한은 제사 등 의례의 집행, 작력 권(作曆權), 개원권(改元權), 서위(敍位) 및 관직임명권이 있었을 뿐이다. 추수감사제와 같이 신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 등의 의례의 집행이 천황의 권한이었다. 이것은 신에 의하여 지상의 나라를 통합하고 대표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와 동시에 달력을 만드는 권한은 중 국에서 사용되는 역을 수입하는 것이었지만, 역의 채용은 천황의 권한으로서 천황을 거쳐야 정식 역으로 인정받게 된다(작력권). 동시에 고대 중국에서 생겨난 연호의 결정과 갱신 역시 천황의 권 한이었다(개원권). 이러한 권한은 <시간에 대한 집합표상>을 지배하는 의미를 지닌다. 가령 서기 연도가 아니라 소화 몇년, 평성 몇년이라고 부르고 표기할 때마다 국민의 의식에는 천황의 존재 가 스며드는 것이다.

또한 궁중의 관직은 천황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막부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 이었다. 행정, 군사, 외교 등의 전권은 천황으로부터 막부의 대장군(征夷大將軍)에게 위임되어 있 었다. 이것은 전사집단의 권력의 정당성을 천황의 위임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권 력의 정당성은 국민의 동의에 있다. 그러나 근대이전의 일본의 막부권력의 정당성은 천황으로부 터의 위임에 있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집합표상헤게모니는 권력헤게모니의 정당성의 원천이었 던 것이다. 그리고 천황의 권위는 궁극적으로 일본국민들의 종교적 감성에 있다. 천황의 권위를 형성하는 것은 합리적 사상적 집합표상도 아니고 법률적 집합표상도 아니다. 그것은 신화와 역사 그리고 신도(神道)라는 종교적 집합표상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2.4.6. 이슬람과 중국의 집합표상헤게모니

서구 중세의 사회체제는 집합표상헤게모니를 가진 계급이 하나의 신분계급을 형성하였다. 그 것은 일하는 자(농노), 싸우는 자(기사)와 함께 또 하나의 신분계급인 기도하는 자(승려)였다. 그 리고 이러한 승려계급의 헤게모니체계가 광대한 영역에 걸쳐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것이 다. 이러한 공동체의 구조는 다른 문명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그러나 형식적인 공동체 의 구조를 떠나 사회의 문화적 차원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농업사회가 유사한 집합표상의 차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도 천황이라는 정신적 권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체계가 폭 력의 독점에 기반하는 권력헤게모니의 체계와 분리되어서 독립된 헤게모니 구조를 형성하고 있 다. 이것은 서구 중세와 거의 동일한 구조이다. 다만 천황의 헤게모니는 권력헤게모니와 결합되지 않았으며, 자본헤게모니 계급을 형성한 것도 아닌 순수한 집합표상헤게모니였다.

한편 아랍문명의 사라센제국은 일본의 경우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곳에서는 집합표상헤게모니 가 바로 모든 헤게모니였다. 일체의 헤게모니--자본헤게모니, 권력헤게모니, 집합표상헤게모니-- 는 종교적 집합표상헤게모니에 포괄되었다. 오늘날에까지 이러한 신정정치(神政政治)의 영향이 남 아 있다. 신정정치란 종교적 집합표상헤게모니가 권력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열된 아랍의 여러 국가를 통합한 것은 종교적 집합표상헤게모니였다. 이슬람교는 종교의 영역 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삶을 종교의 내용으로 포괄하였으며, 그것이 하나의 통합된 문화 와 정치경제공동체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알라는 유일신이고 마호케트는 최종적 예언자라는 것은 종족을 넘어 모든 아랍사람들의 공통된 집합표상이 된다. 우상숭배, 음주, 도박, 돼지고기에 관한 금기 그리고 4명의 부인까지 허용하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을 통합하는 법률헤게모니이다. 이자의 금지와 보시의 의무는 부자와 빈자를 통합하는 경제적 계율이다. 매일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고 단식을 하고 평생 한번 이상 메카를 순례하도록 하는 계율은 의례적 행위에 의하여 모든 이슬람 교인들을 종족을 넘어 하나의 문화공동체로 통합하는 것이다. 또한 이슬람교의 포교는 전쟁하는 것, 개종하는 것, 조공을 바치는 것 중의 하나를 상대방에게 선택하도록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포 교를 위한 전쟁은 성전(聖戰)이었다. 이것은 종교가 군사적 헤게모니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렇 게 하여 이슬람교는 중세에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종교적 집합표상헤게모니에 의하 여 일체의 헤게모니를 포괄한 예이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제자백가라 일컬어졌다. 이 가운데 전국시대의 진나라가 법가의 사상을 채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마침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 였다. 진제국은 불과 몇십년만에 농민의 반란으로 붕괴하고, 이어서 한제국으로 교체되었다. 한제 국은 무제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유교를 국교로 채용하였으며 그 이후 유교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2,000여년간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등 아시아 여러나라의 집합표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중국에서의 집합표상헤게모니는 종교적 형식을 취하지 않았다. 유교의 경전은 관료를 충원하 는 과거시험의 과목으로 되었으며, 그리하여 중국의 관료계급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집합표상이 되었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집합표상과 문화는 자연스럽게 일반 인민의 집합표상을 지배하게 되 었다. 유교는 단순한 집합표상을 넘어 일상생활의 관습과 예(禮)의 차원에서 실천적 규범으로 작 용하였다는데 특징이 있으며, 이러한 유교적 집합표상헤게모니가 광대한 중국과 동아시의 문화적 통합의 기반이 되었다. 말하자면 유교의 집합표상헤게모니는 관료계급의 권력헤게모니에 결합되 어 있었으며 그 최고의 상징은 황제나 왕이었다. 중국문화권의 집합표상헤게모니의 특징은 종교 의 형식이 아니라 <관습적 예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지배계급의 정신 적 차원이 되어 지배계급의 의식과 문화를 형성하였고, 그것을 통하여 공동체 전체의 문화적 통 합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또한 송나라 이후에는 유교적 지식은 지배계급에 들어 갈 수 있는(과거 시험을 통하여) 요건이 되었다.

한편 한국에서의 집합표상헤게모니는 종합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고려시대에는 불 교가 공동체의 집합표상을 형성하였으며, 최고의 집합표상헤게모니는 왕사 내지 국사라고 불리는 최고의 정신적 권위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억압되었고 유교가 국교로 채용되면서 중국과 동일하게 과거제도를 통하여 충원된 관료계급에 의하여 집합표상헤게모니가 문화의 형식으로 작용하였다.

2.4.7. 헤게모니 계급과 문화공동체

공동체는 헤게모니의 영역과 체계라고 정의하였다. 농업사회를 예로 든다면 공동체 조직방식 은 신분계급이었다. 신분계급이 바로 헤게모니의 배분체계였던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신분이 헤 게모니 계급과 비헤게모니 계급으로 나뉘어지는 것이 농업사회에서의 공동체 구조인 것이다. 헤 게모니 계급은 토지의 지배권을 내용으로 하는 자본헤게모니, 폭력의 독점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 헤게모니, 그리고 문화적 종교적 집합표상에 의해 의식을 지배하는 집합표상헤게모니를 장악하였 다. 이러한 헤게모니를 장악한 사회집단이 지배계급을 형성하는 것이 농업사회의 공동체양식인 것이다.

그러나 각 사회와 시대에 따라서 신분계급의 내용은 다르다. 비헤게모니계급은 가축과 같이 매매대상이 되는 노예계급인 경우도 있고, 토지에 긴박되어 거주이동의 자유가 없는 농노계급인 경우도 있고, 단순히 토지가 없어 소작인의 성격을 띠고 여타 헤게모니에 접근할 수 없는 평민계 급인 경우도 있었다.

한편 헤게모니 계급 역시 여러가지 성격을 갖고 있었다. 도시국가에서 헤게모니 계급은 공동 체의 정치군사적인 결정에 참여하는 시민계급이었다. 서구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폭력을 담당한 기사계급과 종교를 담당한 승려계급이 있었다. 중국사회에서는 토지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한 호 족계급이 지배하다가, 나중에는 집합표상(유교)헤게모니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한 관료계급이 지배 계급이 되었다. 사라센제국에서는 집합표상헤게모니에 권력헤게모니와 자본헤게모니가 포괄된 종 교국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폭력을 담당한 무사계급과 순수한 집합표상헤 게모니만을 가진 천황제도가 있었다. 중요한 점은 어떠한 농업사회에 있어서도 집합표상헤게모니 는 헤게모니계급의 형성과 그 성격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이다.

농업사회에서의 공동체는 헤게모니계급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서구 중세사회와 같이 전사계 급과 승려계급이 독립적인 지배계급을 형성할 때에는 국가공동체와 문화공동체가 분화된다. 즉 집합표상헤게모니를 가진 승려계급이 토지자본을 독립적으로 지배함으로써 전사계급과 분리독립 된 지배계급이 될 때, 국가공동체와 문화공동체가 분리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경우에 국가공 동체와 문화공동체가 영역을 달리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이점이 서구 중세사회가 다른 문명과 다 른 점이다.

일본 역시 전사문명이 지배하였지만 집합표상헤게모니는 자본헤게모니를 가지지 못하였고 동 시에 하나의 신분계급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다만 하나의 가문에 지나지 않았고 상징적 존재였다. 이러한 경우 국가공동체와 문화공동체는 일치하고, 다만 헤게모니가 수직적 체계를 가 지는 것이다. 즉 상징적인 집합표상헤게모니와 실질적인 권력헤게모니가 수직으로 조직되는 것이 다.

중국과 한국에는 집합표상헤게모니계급이 권력헤게모니계급과 완전히 동일하였다. 그리고 전 사계급은 소멸하였다. 전사는 단순히 국가의 한 조직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도 역시 국가 공동체와 문화공동체는 일치한다. 지배계급이 권력적 헤게모니와 동시에 집합표상헤게모니를 가 지고 있고 그 작용영역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한편 전사계급이 소멸하였기 때문에 전사문명이 아 니라 문인문명이 된다. 지배계급의 성격이 집합표상헤게모니를 가진 경우, 특히 지적(知的) 헤게 모니를 그 성격으로 할 때, 문인문명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근대이전의 시대를 포괄적으로 논의하였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왜냐하면 현대를 규정하기 위하여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현재는 서구 근대문명이 세계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과거는 서구 근대문명 이전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인류의 과거를 포괄하여 하나로 해석해 왔다. 이러한 관점이야말 로 인류사, 세계사의 관점이었다. 이제까지의 역사해석은 <서구인의 해석>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적 역사해석은 보편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현대가 부디치고 있는 자유, 환 경, 전쟁, 기아의 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체제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해 왔다. 이제 우리는 체제를 초월하여 더욱 포괄적인 차원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 것은 문명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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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1백여명의 사망자를 낸 태국의 유혈사태가 푸미폰 국왕의 중재로 진정국면에 들어섰다. 푸미폰 국왕은 20일 밤 12시(한국시간 21일 새벽2시) 수친다 크라프라윤 총리와 야당지도자인 잠 롱 스리무앙을 왕궁으로 불러 사태해결을 지시, 수친다 총리가 21일 새벽 TV방송을 통한 대국민 연설에서 잠롱의 즉각석방과 헌법개정을 약속했다. 잠롱도 사태수습을 위해 정부와 협력하겠다고 밝히고 국민들에게 시위자제를 호소했다. 전총리인 프렘과 산야타를 배석시킨 가운데 이들을 접 견한 푸미폰 국왕은 {두 사람이 적대할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해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 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수친다 총리는 생중계된 대국민연설에서 {오는 25일 국회를 열어 현사 태를 해결하기 위한 헌법개정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히고, 이번 시위와 관련돼 체포된 모든 사람들을 즉각 사면, 석방할 것을 약속했다. 잠롱은 이어 {국왕의 개입으로 상황이 호전됐다}면서 {나라의 평화를 위해 최대한 사태해결에 협조할 것}이라며 국민들의 시위자제를 호소했다. 이에 따라 21일 오전 시위도중 체포된 3천여명의 시위대들이 풀려났으며, 시위진압을 위해 시내에 배 치되었던 군병력들도 모두 병영으로 철수했다.(1992.5.22 조선일보)

주2) 서임권을 둘러싼 교권과 속권의 갈등은 11세기 독일의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 스 7세의 충돌에서 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인리히 왕과 교화은 이탈리아의 밀라노 주교의 선출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후보를 밀면서 대립하였다. 교황에게 밀라노는 로마 바로 다음으로 중요한 교구였고 따라서 그 선임권을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북부 이탈리아에서 황 제권을 다시 회복하려고 기도하고 있던 하인리히는 롬바르드 평원에서 가장 큰 도시인 밀라노의 통치자를 자신의 지배아래 두는 것이 필요하였다. 하인리히가 자신이 미는 밀라노 주교후보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자 교황은 파문과 폐위의 위협을 담은 서한을 하인리히에게 보냈다. 이에 대 응하여 하인리히는 독일주교들을 소집하여 교황이 찬탈자이며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 표케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은 하인리히 왕을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하였다. 교황의 이러한 선언은 중앙집권적인 왕의 통치를 꺼려하던 독일제후들에게 반란의 구실을 주었다. 심지어는 하 인리히 왕을 지지하던 제후들도 교황의 파문에 당황하여 등을 돌렸다. 마침내 하인리히 왕은 굴 복하였다. 그는 자신이 왕위에 복귀할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귀족 주교들의 회의를 감 수하였다. 그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고 있던 교황을 카놋사(Canossa)에서 기다리다가 겸손한 참회자로서 맨발로 나타나 온순하게 자기 죄를 고백하고 사면을 애걸하였다. 왕을 3일동안 기다 리게 한 교황은 결국 왕의 청원을 받아들이고 사면하였다. 여기까지는 교황의 승리였다. 그러나 독일은 내란상태에 빠졌고, 4년 후에 루돌프를 지원하던 교황이 다시금 하인리히를 파문하였을 때에는 상황이 달랐다. 루돌프를 쳐부수고 승리를 거둔 하인리히는 다시금 교황을 찬탈자라고 비 난하고 대립교황을 임명한 뒤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하인리히는 로마를 점령하고 자신이 세운 교황에 의해 베드로 성당에서 황제로 대관받았다. 도망간 그레고리우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 망디인에게 지원을 호소하였고, 용맹하나 야만스러운 노르망디족은 로마를 약탈하고 교황을 데리 고 남쪽으로 철수하였으며 교황은 그 몇달 뒤에 죽었다.

이처럼 심각하였던 교권과 속권의 투쟁은 주교들이 세속적인 영주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야 기된 것이었다. 왕은 주교들의 왕의 토지를 보유하고 세속 사법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주교임명권 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교들이 모든 봉건적 영지와 세속권을 포기하면 주교들은 다시금 순수한 영혼의 목자로 돌아오고 왕들은 주교의 임명에 간섭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 리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적 삶과 세속적 삶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이었다. 교권과 속권의 갈등에 대하여 교황 빠스칼(Pascal) 2세가 바로 이러한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이러한 제 안은 이미 세속적 이권을 가지고 있던 주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빠스칼 2세의 제안은 주교와 추기경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그때 만약 교회가 이러한 길을 택했다면 전 기독교 세계가 강력한 정신적 제국으로 통합되어 서양 문명의 미래가 온통 달 라졌을 것이라고 가정한 바 있다.(서양 중세사 p.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