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눈으로 보는 문명사


제 2편 농업사회 - 계급체제


제 5 장 농업사회의 문명

2.5.1. 집합표상, 문화, 문명
2.5.2. 문명의 논리
2.5.3. 전사문명, 상인문명, 문인문명
2.5.4. 문명과 가치유형
2.5.5. 문명, 인간, 가치, 이상, 현실




2.5.1. 집합표상, 문화, 문명

우리는 사회를 정치적 차원, 경제적 차원, 문화적 차원으로 구분하였다. 문화를 정치나 경제와 구분되는 하나의 차원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이 주요한 내용을 형성하 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양식을 인간 의식의 내용(집합표상)과 연관해서 파악하는 것이 문화인 것 이다. 이러한 문화적 차원에서 체제적 문제는 바로 집합표상헤게모니이다. 문화란 공통의 집합표 상이 형성하는 생활양식의 총체인 것이다.

사회를 정치, 경제, 문화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두 포괄하여 하나로 파악하는 것 이 문명이다. 문명은 사회의 차원으로 구별되는 개념이 아니라, 시대와 지역에 따라(즉 시공간적 으로) 구별되는 생활양식의 총체이다. 한 시대가 다른 시대와 구분되고, 한 지역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삶의 양식의 총체, 이것이 문명이다.

문화나 문명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형성한 것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고, 그것을 집합표상과의 관련에서 규정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다만 역사적으로 다른 시간대의 문화, 공간적으로 다른 지 역의 문화들을 비교하여, 한 공동체(사회)의 문화적 특징의 총체를 문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조선시대를 문인문명(文人文明)으로 표현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표현한 것 이다.

문명도 그 사회의 집합표상의 기반 위에 성립하는 것이고, 또한 그러한 집합표상의 유형을 형 성하는 생활양식의 총체이다. 다만 문명을 규정하는 집합표상은 '정감적 집합표상'이다. 일체의 집합표상이 녹아내려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지극히 당연한 집합표상의 경향이 정감 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감도 생활양식과 사회체제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이다.

2.5.2. 문명의 논리

문명은 사람들의 정감적 집합표상이 무엇에 의하여 규정되는가에 따라 정해진다.

첫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일에 종사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집합표상은 영향 을 받는다. 가령 농부와 상인은 서로 다른 집합표상과 문화를 형성한다. 이러한 문화가 사회전체 의 지배적 성격을 형성할 때 그것을 문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둘째, 사회에 어떠한 가치가 풍부한가에 따라서 문화가 달라진다. 풍부한 가치는 모든 사람들 이 추구하는 가치가 되고, 그것이 사람들의 집합표상과 생활양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 여 희소한 가치는 사회전체의 사람들이 획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집합표상을 형 성하지 못한다.

세째, 문명의 기반을 형성하는 집합표상은 정감적 집합표상이다. 그것은 합리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부러움이나 동경과 같은 정감적 태도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떠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개인이 합리적 성찰에 의하여 그것이 가치있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일 반적 집합표상(집합의식)에 영향을 받아 그것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어떠한 가 치를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일 때, 그것이 형성하는 집합표상과 문화의 유형이 바로 문명이다.

네째, 이러한 가치에 대한 정감적 집합표상, 풍부한 가치, 종사하는 업(業)을 형성하는 배경에 는 결국 사회체제가 있다. 사회체제는 인간의 생활양식을 규정하고, 생활양식은 인간의 가치관과 정감적 집합표상을 형성한다. 동시에 굳어진 정감적 집합표상에 기초하여 생활양식과 사회체제가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은 문명에 관한 일반적 관찰이다. 우리는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문 명을 유형화할 수 있다.

2.5.3. 전사문명, 상인문명, 문인문명

농업사회-계급체제에서는 지배계급이 결국 사회전체의 문화를 지배한다. 지배계급이 문화적으 로 피지배계급을 지배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성격이 문명을 규정하는 가장 중대한 요소이다. 이 것이 계급체제에서 문명이 규정되는 기제(機制)이다.

그러나 서로 같은 농업사회-계급체제라고 하더라도 동일한 문명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농 업사회-계급체제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더라도 체제의 구체적 내용이 다르고 지배계급의 성격이 나 가치관과 정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농업사회-계급체제에서의 문명을 전사문명, 상 인문명, 문인문명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전사문명(戰士文明)은 전사적 인간이 사회의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그들의 문화가 전사회에 보 편화된 문명이다. 전사는 인간의 육체적인 힘을 단련하고 그것을 고양시키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 인간에게는 분명히 이러한 전사적 본능이 있다. 오늘날 스포츠맨은 이러한 전사의 후예이 다. 마라톤 선수를 비롯하여 모든 스포츠선수는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초인적인 육 체적 능력을 함양하고 발휘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경향이 있다. 인간에게는 경제적 이익이나 정신적 가치와는 다른 육체적 능력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스포츠를 넘어서는 투쟁(전쟁)은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것이다. 이러한 엄숙한 투쟁 (전쟁) 앞에서 모든 가치는--적어도 생명보다는 중대한 가치가 아니기 때문에--침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투쟁에 종사하는 사람이 전사(戰士)이다. 그러나 전사라고 하여 야만적인 것은 결 코 아니다(전사가 야만적으로 된 경우에는 이미 그것은 문명이 아니다). 생명을 거는 투쟁은 하는 인간은 생명을 걸만한 가치를 추구한다. 신이나 국가 또는 아름다운 숙녀에 대한 충성이 그러한 것이었다. 중세의 종교적 문화나 여성을 존경하는 기사도(騎士道)는 바로 이러한 전사문명의 한 모습이다.

전사문명에서는 전사가 가장 많은 물질적 가치를 차지하지만, 그 자체가 투쟁과 삶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약탈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차지하는 것이다. 전사가 경제적 이익을 탐한다는 것은 서구근대인들의 사고방식이다. 물론 전사도 곤궁하면 먹을 것을 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사자왕 '리처드'가 오직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싸운 것은 아니다. 상인들에게는 명예가 중대한 가 치가 아닐지 모르나 전사에게는 명예는 실로 중대한 가치이다. 그리하여 전사문명에서 물질적 가치는 부차적인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 제정 이전까지의 로마, 서구 중세,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일본의 전국시대, 한 국의 삼국시대는 모두 전사문명였다. 지배계급이 전사계급이기 때문에 전사들의 문화가 보편화되 어,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풍토가 전사문명이 되는 것이다.

상인문명(商人文明)은 상인적 인간이 사회의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그들의 문화가 전사회에 보 편화된 문명이다. 상인은 육체의 강력함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수련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육체를 단련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며 무가치한 것으로 보인다. 상인은 자신의 몸 밖 에 있는 물질적 가치를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에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그들은 합리적이며 그들에게 신성(神聖)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일체의 가치가 객관적(즉 물질적)이고 수량적 계산으 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상인은 일체의 가치와 다른 사람의 능력을 재물(富)로서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식을 추구하는 것도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들의 세계는 몸과 정신의 바깥에 있는 객관적 세계이다. 그들이 재산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은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다. 전사의 약탈물이 당연한 부수물이듯이, 상인의 향락과 소비는 당연한 부수물이다. 객관적인 가치인 재산 의 축적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상인적 인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상인적 기풍이 문화로 확장 될 때에는 그 문명은 물질문명이 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소유와 소비에 의하여 평가되고, 사람들 은 더 많은 물질적 소유와 소비를 추구하는 것이다.

농업사회-계급체제에서는 전형적인 상인이 지배계급이 된 일은 없다. 그러나 상인문명은 존재 했다. 지주귀족들은 상인적 인간의 한 모습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토지의 소유이고 그 생산 물이며 토지를 지키고 확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형적인 상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주, 호족, 지주귀족이 지배계급이 된 사회는 상인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똑 같이 토지를 지배하는 계급이 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전사도 문인도 아니고 순수한 지주일 때, 그것은 상인문명인 것이다.

그리이스나 로마와 같은 해양문명에서는 교역이 문명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고, 실제로 상 인들이 중요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토지를 보유한 상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 다. 시기적으로 볼 때, 정복이 끝난 이후의 로마시대, 중국의 송나라 이전사회, 한국의 고려시대, 유럽의 절대주의 시대는 지주, 호족, 귀족들이 지배한 상인문명(귀족문명)이다.

문인(文人)이란 육체가 아니라 두뇌(知的인) 능력을, 객관적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 정 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문인문명(文人文明)이란 이러한 문인들이 사회의 지배적 세력 을 형성하고 그 문화가 사회에 보편화된 문명이다. 문인이란 전사와는 달리 육체를 단련하거나 생명을 거는 투쟁(전쟁)에서 가치를 찾지 않는다. 또한 문인이란 상인과는 달리 많은 재산의 축적 이 삶의 직접적 목표는 아니다. 그들은 지식, 종교, 예술 등 문화적 가치를 추구한다.

성악가나 무용가의 경우 비록 그들이 육체적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을 중요시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인 것이다. 아름다운 노래나 율동은 정신적인 가치인 것 이다. 문인은 삶을 위한 지식에서 나아가 지식을 위한 지식,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없는 가치, 눈 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세계를 확장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것은 전사가 전쟁 그 자체를 사랑하 고, 상인이 재물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한편 문인들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이다. 왜냐하면 정신적 가치는 객관적으로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객관적 현상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의미와 표상이 중요하다. 전사나 상인이 보면 전혀 쓸데없고 무가치한 논쟁이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중세의 기독교 보편교회의 문화, 과 거시험이 실시된 이후의 중국과 한국과 베트남의 문명이 문인문명의 전형적인 것이다. 서구 중세 에서 종교교리 논쟁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국의 조선시대에는 죽은 왕비의 장례 절차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집권세력이 바뀌는 정치풍토였다. 우주관을 중심내용으로 한 학파의 분열이 정치적 정당을 형성하고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문인문 명이다.

어떠한 문명이라고 할지라도 문명의 주도계층이 추구하는 가치를 상실하고 질서가 붕괴하면 문명은 쇠퇴한다. 질서폭력이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여 무질서폭력이 증대하고, 전쟁과 정복이 중 지되어 전사가 강도가 되고, 상인은 더 이상 재산을 축적할 수 없고, 문인은 더 이상 정신세계를 확장하지 못할 때 문명이 쇠퇴하는 것이다. 이 때에는 진정한 전사나 상인이나 문인은 사라진다. 하층계급은 생존을 위하여 무질서폭력을 휘두르고 상층계급은 향락과 퇴폐에 빠지게 된다. 하층 계급은 가치를 획득할 수 없고 상층계급은 추구할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 '문명의 쇠퇴'이다.

2.5.4. 문명과 가치유형

전사문명에서는 승려도 용사가 된다. 왜냐하면 용기나 기사도와 같은 전사적 가치야말로 사회 적으로 가장 돋보이는 가치이고, 정감적으로 존경받기 때문이다. 전사문명에서는 지배계급 내부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평등하다. 왜냐하면 전사계급 상호간에는 폭력에 있어서 압도적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이스 시대의 민주주의나 한국의 화백제도와 같은 것은 이러한 전사문명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지역에서도 전사문명에서는 전사상호간에는 평등성이 강하다. 서구 중세시대에도 주군과 봉신의 관계는 계약(봉건계약)관계이다. 이것은 권력자의 통치권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전사문명은 폭력적이다. 지배계급이 폭력계급이기 때문이다. 상인이나 문인의 관점에서 보면 전사문명은 야만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무가치한 것을 위하여 폭력을 휘둘러대는 문명이다. 전사 계급의 삶과 가치를 풍자하고 야유한 동키호테는 상인문명(근대문명)의 관점에서 보는 전사문명 이다.

이에 대하여 상인문명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재물이나 경제적 이 익인 바, 그것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상인문명에서 전쟁은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전사문명에서와 같은 비합리적인 전쟁, 순전한 정복욕이나, 지배계급 내부의 감정 의 대립, 모욕에 대한 복수, 위대한 대의명분을 위한 전쟁과 같은 것은 없어진다.

그러나 상인문명이라고 하여 전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 필요에 따라서 전 쟁은 더욱 빈발하게 야기된다. 또한 전사문명에서와 같은 전사적 가치관이 없기 때문에 목적을 위해서는 더욱 잔인해진다. 실로 인류의 전역사에서 서구 근대 문명만큼 많은 전쟁을 하고 잔인 하게 인간을 대량학살한 문명은 없었다. 그 이유는 근대서구문명이 실로 천박한 상인문명이기 때 문이다.

상인문명에서도 지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지식 역시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다. 전사나 문인의 관점에서 보면 상인문명은 탐욕적이다. 경제적 이익이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탐욕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인문명에서 가치는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문인은 자신이 소유한 재물의 양이나 육체적 용감 성 등으로 스스로의 삶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문 인은 적어도 외부적으로는 상인이나 재물을 경멸한다. 이것이 문인의 문화인 것이다. 또한 폭력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문인의 가치는 주관적이다. 누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계산으로 평가될 수 없다. 그리하여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농업사회 문인문명의 보편적인 모습은 종교문명이었다. 그것은 지상의 나라를 신의 나라에 예 속시킴으로써 가치관이 규정되는 것이다. 한편 이와는 성격이 다른 특이한 문인문명이 있으니 그 것은 중국과 한국의 문인문명이다. 그것은 지적 도덕적 문인이 지배계급이 되는 것이었다. 중국과 한국에서 문인문명을 이룩한 것은 과거제도(科擧制度)였다. 이것은 다른 문명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과거제도는 전사적 가치나 상인적 가치와 다른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였다. 과거제도로 권력과 토지가 주어지는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중국의 과거시험에는 신분적 제한이 거의 없었 다. 과거시험은 총 9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치루어지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최종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관리가 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가 합격한 단계에 상응하는 사회적 지위로 대접받았다. 가령 중간단계인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은 <거인:巨人>이라고 불리워졌으며, 그것은 사회적으 로 대단히 존경받는 지위였다. 그들은 관리들의 상담역이 될 수도 있었고 지방에서는 사실상 유 지(有志)가 되었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하여 평생을 공부하였다.

문(文)에 대한 가치지향(價値志向)이야말로 중국과 한국이 상인문명이나 전사문명이 아닌 문인 문명을 형성한 체제적 토대였다. 중국과 한국이 이룩한 이러한 문인문명은 전세계의 어떤 문명과 도 다른 특이한 문명이었다. 그것은 상인문명과 같이 탐욕적이지도 계산적이지도 물질적이지도 않았다. 전사문명과 같이 폭력이 일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중국은 거대한 대륙이고 말하자면 하나 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이 거대한 대륙에서 약한 질서폭력으로도 무질서폭력이 억제되고 2천년 이상 통합이 유지된 것은 문인문명 때문이었다.

2.5.5. 문명, 인간, 가치, 이상, 현실

문명의 문제는 수많은 문제들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선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 가 있다. 우리가 전사문명, 상인문명, 문인문명으로 구분하는 것은 개개의 인간에게도 서로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전사적 가치를 추구하는 본성, 상인적 가치를 추 구하는 본성, 문인적 가치를 추구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 따라서 전사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상인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문인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 하기도 한다.

이것은 다시 가치의 문제로 전환된다. 우리는 전사적 가치의 본질은 인지가치(認知價値)로 규 정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존경해 주는 것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명예가 바 로 인지가치이다. 상인은 탐욕적이라고 하여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전사가 비겁하다는 평판 이 있으면 그의 삶의 의미는 파멸적인 것이다. 상인적 가치의 본질은 소유가치(所有價値)이다. 이것은 어떤 객관적인 가치물(재물)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화폐는 이러한 소유가치를 획기적으로 확장하였고 보편화하였다. 화폐와 그 전환물(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문인적 가치는 자아실현가치(自我實現價値)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 신의 가치관에서 무의미하면 그것은 전혀 가치가 아닌 것이다. 문인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실현 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에 도달했는가 하는 것이 중대한 가치이다. 그리하여 지극히 추상적인 것--가령 도(道), 도덕, 계율, 종교적 구원, 신(神), 깨달음, 진리, 해탈, 자연법칙의 발견---이 삶 에서 중대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자아실현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도 내면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 사회적 인정(인지가치)에 의 하여 자아실현 가치를 규정한다. 인지가치나 소유가치도 자아실현적인 만족을 준다. 인간은 모두 이 세가지 지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인간은 이 세가지 지향에서 어느 한 쪽에 더욱 강력한 것이 있다.

이 모든 논의는 철학적 논의이다. 우리가 현실과 사회로 돌아올 때, 인간과 문명의 문제는 역 사와 체제의 문제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사문명, 상인문명, 문인문명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 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문명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함으로써 밝혀질 수 있다. 그것 은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주제를 제5권으로 미룰 것이다.

다시 우리의 주제인 체제의 문제로 돌아오면 문명의 문제는 현실과 이상의 문제로 된다. 농업 사회--근대이전의 사회--에서는 어떠한 문명을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신분계급의 철칙>이라는 현실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즉, <신분계급의 철칙>이라는 한계 내에서 문명의 유형인 것이 다. 따라서 우리는 유교문명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 <신분계급의 철칙>을 극복하 여 보나 나은 사회와 문명을 이룩하기 위하여 어떠한 시도들이 있었는가를 다음 장에서 논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