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묵가(墨家)
묵자의 시대는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중국은 경제에 있어서 중요한 변
화가 있었다. 관개방식이 발달하여 농업생산은 증대하였고, 철제기구가 널리 사용됨에 따라 수공
업과 광업도 많이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상업과 교역 그리고 화폐경제가 발전하였다. 이러한 경제
사회 상황에서 묵자는 보편적 사랑(겸애)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가족간의 사랑이나 혹은 신분계급
적 연대와는 대립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묵자는 세계의 무질서 상태는 보편적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그 본성에 있어서 보편적 사랑의 감정이나 의지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묵자는 법가와 마
찬가지로 인간을 간단하게 규정한다. 묵자에게 있어 인간이란 단지 자기자신을 위해 즐거움을 얻
고 고통을 피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본성이 이러한데도 어떻게
겸애의 사회가 가능한가? 이에 대한 묵자의 대답이 국가였다. 국가가 겸애와 교리의 사회구조를
조성한다면 이기적인 인간은 그러한 구조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교리의 이익이 이기
적 인간에게 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묵자가 상정한 사회는 신분계급이 철폐된 사회였다. 그리고 그러한 신분계
급이 철폐될 경우 신분계급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질서는 상업사회와 유사한 것이었다. 묵
자는 노예제도와 신분계급에 반대하였으며 만민평등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2,500년 전의 사상가로
서 가히 혁명적인 사상이다.
당시 끊임없는 전쟁으로 봉건귀족세력이 몰락하고 있었으며 농업 및 상업자본가들과 신진엘리
뜨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신분계급제도를 부정할 때, 사회는 중앙집권국가와 개인들로 구
성된다. 말하자면 근대사회와 같은 상황인 것이다. 평등한 개인들의 집합이 사회이고, 그것을 규
제하는 것은 신분계급이 아니라 국가였던 것이다.
묵자가 생각한 국가는 결코 법가적 국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정책적 국가였다. 그는 인류
최초로 시장경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으며(더 빠른 사람이 있다면 관자일 것이다) 그 핵심은
이미 오늘날의 경제학적 사유에 이른 것이었다. 그것은 수요, 공급, 가격, 시장의 자동조절, 디플
레이션, 인플레이션 등의 개념에 이른 것이었다. 우리는 서구 근대의 계몽사상이나 경제적 관점이
대단한 것으로 평가하지만, 동양에서는 그것은 이미 2,500년 전의 사상이다.
묵자는 여기에서 나아가 경제적 재난에는 세가지 있다고 보았다. 첫째, 백성에게 소용없는 것
을 생산하는 데 백성의 노동을 소진해 버리는 재난이고(보물, 악기, 장례용품), 둘째, 백성을 이롭
게 하지 않는 자에게 상을 주어 부자가 되게 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신분세습 상속 등과 같은 불
로소득을 말한다. 세째, 호화로운 궁궐이나 전쟁과 같이 백성의 이용후생에 배치되는 소비가 증가
하면 경제가 곤란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묵자 경제사상의 핵심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가 볼 때, 백성에게 필요한
것, 최대다수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
경제사상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경제사상에서 완전히 결여된 것이지만
시장경제체제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묵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국가가 경제를 조절하여야 한
다는 것이었다.
묵자는 근대경제사상과 같은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을 믿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시장과 경제
는 신분적 계급사회가 아닌 평등한 개인이 교리에 의하여 겸애를 현실화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가치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와 정치없이 자동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묵자가 상정하였던 사회는 자유방임의 시장사회가 아니라 국가에 의하여 지도되
고 유인되는 자유롭고 평등하고 그리하여 보편적 사랑(겸애)가 구현되는 사회였다.
묵자의 정치사상은 근대 계몽사상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기원을 자연사회에서 출발한다. 그의
자연사회에 관한 논의는 홉스와 같은 것이었다. 자연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다 자기가 옳다는 주
장을 하여 백사람이 백가지 주장을 하게 된다. 서로 비난하고 서로 원수가 되고 서로 다투게 되
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천하의 백성을 통치하는 우두머리를 선출하여 천자로 삼고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일을 맡도록 하였다.
묵자는 권력이 제약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근대적 자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국가
와 권력이 무제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묵자의 정치사상에는 근대의 천부인권사상과 동일한
하느님에 의한 국가와 권력의 제약이 있다. 하느님은 인간은 평등하게 사랑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의로운 정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와 권력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모든
개인의 이익을 조화(義)시키는 것이고, 겸애와 교리의 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묵자는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통치자가 백성들로부터 선출되어야 하며, 최고통치자만이
아니라 고위관료들도 모두 백성들에 의하여 선출되어야 하며, 그 직위는 세습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실로 묵자는 근대서구의 계몽사상을 2,500년 전에 완전하게 진술하고 있다.
신분계급의 철폐에 관한 점에서는 묵자의 통찰은 실로 선지자적인 것이었으며 완전하게 옳은
것이었다. 그 핵심은 상업사회에서만 신분계급의 철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농업
사회로 남아 있는 한 신분계급은 철칙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대이전의 사회에서 신분계
급을 철폐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가 상업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신분계급이 철폐되려면
토지자본에 의존하지 않는 세력--가령 상업적 세력--이 사회의 중심적 세력이 될 수 있어야 하
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아가 상업문명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중국은 상업문명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문명, 타락한 문명으로 규정짓는 선택을 하였다. 그
것은 유가사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상업은 철저하게 억제되었고 상인계급은 최하층의 계급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묵가(墨家)의 운명도 그러하였다. 묵가는 한때 대단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묵자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이었던 평화사상을 실천하는 묵자의 추종자들은 군대를 편성하여
평화를 위한 방어전에 자원하여 참가하기도 하였다.
묵가학파는 기원전 3세기 경에 소멸하였으며 그 소멸한 이유는 명백하지 않다. 다만 서구 근
대사상과 동일한 사상이 농업사회에 실현될 수는 없었던 것은 명백하다. 묵가는 탄압받았고 그의
사상은 매몰되었고 그의 사상을 적은 책은 죽간(竹簡)이 얽혀 뜻이 통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그
리고 묵가의 사상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2,000여년을 기다려야 하였던 것이다. 서구 근대사회에
이르러서야 그의 사상은 서구인들에 의하여 (그와는 관계없이) 현실에 실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