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눈으로 보는 문명사


제 2편 농업사회 - 계급체제


제 6 장 문화공동체 : 보편교회

2.6.1. 신분계급의 철폐
2.6.2. 법가(法家)
2.6.3. 묵가(墨家)
2.6.4. 도가(道家)
2.6.5. 유가(儒家)
2.6.6. 현실과 이상




2.6.1. 신분계급의 철폐

농업사회는 지배계급의 성격에 따라서 전사문명, 상인문명, 문인문명으로 구별하였다. 또 국가 공동체와 문화공동체가 분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농업사회의 <신분 계급의 철칙>이다. 농업사회는 정치경제체제나 문명이 어떠하든 모두 신분계급체제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신분계급체제를 폐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이러한 신분계급체제를 철폐하는 것을 중대한 문제의 식으로 가지고 있었다. 몰론 이러한 문제의식이 명백하게 표현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상사회, 이상국가, 또는 진리나 도(道)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상들을 신분 계급의 철폐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실로 이 위대한 사상들은 오늘날의 인류를 뛰어넘는 위대한 통찰을 담고 있으며, 오늘 우리의 사유도 이러한 사상들의 지평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중국고대의 위대한 사상들이 탄생한 시대는 춘추전국시대였다. 그것은 서구의 도시국가시대나 또는 서구 중세사회에 비교될 수 있는 시대였다. 즉 모든 도시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전사 문명의 시대였다. 기원전 7세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춘추시대(BC.770 - BC.476)에는 다수의 도시국 가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가간체제를 유지하면서 다른 국가들에 대하여 헤게모니를 장악 하는 패권국가를 지향하였다. 관자(管子)는 이러한 패도정치(覇道政治)를 최초로 실현하였으며, 그 리하여 관자의 주군 제(濟)의 환공(환公)은 최초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BC.475 - BC.221)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변화하여 모든 국가는 패권국가가 아니라 다른 국가를 정복하여 병 합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진(秦)나라가 이러한 목표를 최종적으로 달성하여 다른 모든 국가를 정복하고 중국전체에 걸친 통일국가를 형성한다.(BC.221 - BC.206)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에서 농업사회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과거의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 운 체제적 질서를 모색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동양고대적인 봉건체제(주나 라 봉건체제)가 붕괴상태에 있었으며, 새로운 체제는 아직 확고하게 성립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시대에는 경제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상업과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도시국가가 격렬하 게 대립하던 시대에 있어서 신분계급체제가 반드시 효율적인 것도 아니었다. 신분계급체제에 대 한 비판적 사유가 생성되었으며, 그것은 유토피아적 사회에 대한 사상과 결합되었다. 이러한 현실 상황에서 수많은 위대한 사상들이 탄생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동양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 친 사상가들을 든다면 그것은 노자, 공자, 묵자, 한비자 등이 제시한 사상이었다. 2,500여년 전의 아득한 고대이지만 그 사유는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지극히 유익하다. 우리는 시대적 순서와는 상관없이 법가, 묵가, 도가, 유가의 순서로 살펴보기로 한다. 법가, 묵가, 도가는 신분계 급체제를 철폐한 사회를 이상으로 하였다. 이에 대해 유가는 신분계급체제의 철칙을 수용하고 계급사회를 어떻게 보다 나은 사회로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관점에 서 있다.

2.6.2. 법가(法家)

법가의 사상은 부유한 국가와 강력한 군대(富國强兵)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체의 헤게모니를 권력헤게모니에 의하여 통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권력헤게모니에 의하여 자본헤게모니(귀족계 급)을 소멸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귀족계급의 독립성은 부국강병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 이다. 권력자가 법을 수단으로 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법가사상에서 기본적인 수단인 법은 도덕적 종교적 규범으로서의 법이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합리적으로 도출된 규칙이었다. 법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정당한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법의 본질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법의 집합표상은 동서양 어느 시대의 역사에서도 없는 독특한 것이다. 법가사상의 핵심은 권력과 법에 의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권력과 법에 의하여 신 분계급체제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법가에게 있어서 인간은 오직 당근과 채찍에 의하여 지배되는 존재였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 기적 존재였다. 이러한 점에서 법가의 인간관은 오늘날의 인간관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법가는 당근보다는 채찍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였다. 왜냐하면 당근은 한번 제공되면 다음에는 더 많은 당근이 제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기존의 관습과 집합표상은 합리적 목적(부국 강병)을 위하여 서슴없이 타파되어야 하고, 사회적 연대는 권력에 대한 복종을 위태롭게 하기 때 문에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을 법앞에 서는 (무서워 벌벌 떠는) 단독자(單獨 者)로 만들어야 권력은 안전해지고 나라는 부유해지고 강력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에 의하 여 법가는 합리적이고 세밀하게 규정되고 엄격하게 집행되는 법에 의한 권력적 규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백성들은 상호감시를 하기 위하여 다섯집 열집 등으로 조직되었으며, 법을 어긴자는 상호 신 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신고가 되지 않고 법을 어긴자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이웃은 연대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나라를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하는 것은 농업생산을 증대시 키는 것이고, 따라서 국민으로 하여금 음악이나 교육 기타 문화적인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업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되게 규제하였다. 두사람 이상의 남자가 한집에 거 주하게 되면 반드시 분가하여 각각 따로이 농사를 짓게 규정하였다. 만일 분가하지 않으면 부역 과 납세를 두배로 하였다. 예악,상업, 서비스업, 교육, 여행 등은 금지되고 노동력이 있는 모든 남 자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업에 힘써야 했다. 어른이나 아이 할것 없이 힘을 모아 밭을 갈고 베짜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고, 곡식이나 베를 많이 바치는 자는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전 쟁에서 군공(軍功)이 있는 자는 각각 그 정도에 따라 벼슬을 주고, 사사로이 싸움을 일삼는 자는 경중에 따라 벌을 주었다. 힘쎈 자는 싸움에 힘쓰고, 노약자는 지키는데 힘쓰고, 죽은 자는 후회 가 없고, 살아 남은 자는 근면에 힘쓴다. 이것이 법가의 부국강병의 원칙이었다. 백성의 부귀에 대한 욕망은 죽어서 관이 닫힌 뒤에야 멈추는 것이니, 부귀의 문이 필히 전쟁에서 열린다면 백성 들은 전쟁 소식을 들으면 서로 축하하고, 앉으나 서나 마시거나 먹거나 노래하는 것은 전쟁에 대 한 것일 것이다. 이것이 법가의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법가사상을 채용하여 정책으로 시행한 진나라는 실제로 대단히 부유해지고 강대한 군 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른 국가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하여 마침내 중국 전역을 통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대한 중국전체를 통일한 대제국을 통치하는데 여전히 법가적 엄격함을 적용하는 것은 곧바로 국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진나라는 통일된지 불과 수십년만(BC.221 - BC.206)에 강렬한 민중봉기에 부딪쳐 붕괴하였다. 진나라의 붕괴에 의하여 공식적인 사상으로서 법가사상의 영향력은 중국에서 경멸당하고 사라졌다.

오직 권력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실무적이고 실천적인 지침으로서 법가사상은 중국사회의 한 전통이 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도덕정치의 과도한 이상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자들의 사상이 되었 다. 그와 동시에 법가의 사상은 중국사에 있어서 법의 개념을 결정지었다. 그것은 신의 계명도 아 니고 천부의 인권에 기초하는 것도 아니며, 국가를 통치하고 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끄는 질서를 창출하는 합리적 규칙과 상벌에 관한 규정이었던 것이다.

법가사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권력과 법이 신분계급을 대체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우리는 농업사회에서 신분계급은 철칙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신분계급을 조직적 권력 과 법이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법가는 법앞에 신분계급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법가들은 끊임없이 지배계급들과 투쟁하였으며 부분적으로 성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분계급은 폐지되지 않았다.

상앙(상앙)과 같은 법가의 거장은 지배계급과의 투쟁에서 패배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나 아가 권력과 법으로 신분계급을 대체하려고 할 때, 그 권력은 극단적인 독재권력이 되어야 하였 고 법은 지극히 엄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결국 민중의 심각한 저항을 야기하였고 진나 라는 통일은 즉시 붕괴하였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영역을 권력과 법으로 통합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였던 것이다. 로마와는 달리 중국은 법가의 패배와 함께 법률주의가 사라졌다. 로마를 통합한 것은 법이었지만 중국을 통합한 것은 결코 법이 될 수 없었다. 법가의 실패는 농업사회에서의 신 분계급의 철칙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농업사회에서 신분계급체제는 결코 권력과 법으로 대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2.6.3. 묵가(墨家)

묵자의 시대는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중국은 경제에 있어서 중요한 변 화가 있었다. 관개방식이 발달하여 농업생산은 증대하였고, 철제기구가 널리 사용됨에 따라 수공 업과 광업도 많이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상업과 교역 그리고 화폐경제가 발전하였다. 이러한 경제 사회 상황에서 묵자는 보편적 사랑(겸애)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가족간의 사랑이나 혹은 신분계급 적 연대와는 대립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묵자는 세계의 무질서 상태는 보편적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그 본성에 있어서 보편적 사랑의 감정이나 의지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묵자는 법가와 마 찬가지로 인간을 간단하게 규정한다. 묵자에게 있어 인간이란 단지 자기자신을 위해 즐거움을 얻 고 고통을 피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본성이 이러한데도 어떻게 겸애의 사회가 가능한가? 이에 대한 묵자의 대답이 국가였다. 국가가 겸애와 교리의 사회구조를 조성한다면 이기적인 인간은 그러한 구조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교리의 이익이 이기 적 인간에게 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묵자가 상정한 사회는 신분계급이 철폐된 사회였다. 그리고 그러한 신분계 급이 철폐될 경우 신분계급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질서는 상업사회와 유사한 것이었다. 묵 자는 노예제도와 신분계급에 반대하였으며 만민평등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2,500년 전의 사상가로 서 가히 혁명적인 사상이다.

당시 끊임없는 전쟁으로 봉건귀족세력이 몰락하고 있었으며 농업 및 상업자본가들과 신진엘리 뜨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신분계급제도를 부정할 때, 사회는 중앙집권국가와 개인들로 구 성된다. 말하자면 근대사회와 같은 상황인 것이다. 평등한 개인들의 집합이 사회이고, 그것을 규 제하는 것은 신분계급이 아니라 국가였던 것이다.

묵자가 생각한 국가는 결코 법가적 국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정책적 국가였다. 그는 인류 최초로 시장경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으며(더 빠른 사람이 있다면 관자일 것이다) 그 핵심은 이미 오늘날의 경제학적 사유에 이른 것이었다. 그것은 수요, 공급, 가격, 시장의 자동조절, 디플 레이션, 인플레이션 등의 개념에 이른 것이었다. 우리는 서구 근대의 계몽사상이나 경제적 관점이 대단한 것으로 평가하지만, 동양에서는 그것은 이미 2,500년 전의 사상이다.

묵자는 여기에서 나아가 경제적 재난에는 세가지 있다고 보았다. 첫째, 백성에게 소용없는 것 을 생산하는 데 백성의 노동을 소진해 버리는 재난이고(보물, 악기, 장례용품), 둘째, 백성을 이롭 게 하지 않는 자에게 상을 주어 부자가 되게 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신분세습 상속 등과 같은 불 로소득을 말한다. 세째, 호화로운 궁궐이나 전쟁과 같이 백성의 이용후생에 배치되는 소비가 증가 하면 경제가 곤란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묵자 경제사상의 핵심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가 볼 때, 백성에게 필요한 것, 최대다수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 경제사상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경제사상에서 완전히 결여된 것이지만 시장경제체제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묵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국가가 경제를 조절하여야 한 다는 것이었다.

묵자는 근대경제사상과 같은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을 믿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시장과 경제 는 신분적 계급사회가 아닌 평등한 개인이 교리에 의하여 겸애를 현실화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가치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와 정치없이 자동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묵자가 상정하였던 사회는 자유방임의 시장사회가 아니라 국가에 의하여 지도되 고 유인되는 자유롭고 평등하고 그리하여 보편적 사랑(겸애)가 구현되는 사회였다.

묵자의 정치사상은 근대 계몽사상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기원을 자연사회에서 출발한다. 그의 자연사회에 관한 논의는 홉스와 같은 것이었다. 자연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다 자기가 옳다는 주 장을 하여 백사람이 백가지 주장을 하게 된다. 서로 비난하고 서로 원수가 되고 서로 다투게 되 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천하의 백성을 통치하는 우두머리를 선출하여 천자로 삼고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일을 맡도록 하였다.

묵자는 권력이 제약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근대적 자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국가 와 권력이 무제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묵자의 정치사상에는 근대의 천부인권사상과 동일한 하느님에 의한 국가와 권력의 제약이 있다. 하느님은 인간은 평등하게 사랑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의로운 정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와 권력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모든 개인의 이익을 조화(義)시키는 것이고, 겸애와 교리의 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묵자는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통치자가 백성들로부터 선출되어야 하며, 최고통치자만이 아니라 고위관료들도 모두 백성들에 의하여 선출되어야 하며, 그 직위는 세습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실로 묵자는 근대서구의 계몽사상을 2,500년 전에 완전하게 진술하고 있다.

신분계급의 철폐에 관한 점에서는 묵자의 통찰은 실로 선지자적인 것이었으며 완전하게 옳은 것이었다. 그 핵심은 상업사회에서만 신분계급의 철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농업 사회로 남아 있는 한 신분계급은 철칙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대이전의 사회에서 신분계 급을 철폐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가 상업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신분계급이 철폐되려면 토지자본에 의존하지 않는 세력--가령 상업적 세력--이 사회의 중심적 세력이 될 수 있어야 하 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아가 상업문명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중국은 상업문명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문명, 타락한 문명으로 규정짓는 선택을 하였다. 그 것은 유가사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상업은 철저하게 억제되었고 상인계급은 최하층의 계급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묵가(墨家)의 운명도 그러하였다. 묵가는 한때 대단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묵자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이었던 평화사상을 실천하는 묵자의 추종자들은 군대를 편성하여 평화를 위한 방어전에 자원하여 참가하기도 하였다.

묵가학파는 기원전 3세기 경에 소멸하였으며 그 소멸한 이유는 명백하지 않다. 다만 서구 근 대사상과 동일한 사상이 농업사회에 실현될 수는 없었던 것은 명백하다. 묵가는 탄압받았고 그의 사상은 매몰되었고 그의 사상을 적은 책은 죽간(竹簡)이 얽혀 뜻이 통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그 리고 묵가의 사상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2,000여년을 기다려야 하였던 것이다. 서구 근대사회에 이르러서야 그의 사상은 서구인들에 의하여 (그와는 관계없이) 현실에 실현되었다.

2.6.4. 도가(道家)

노자(老子)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연대의식이 피어나는 자연사회를 이상사회로 생각하였다. 자 연사회의 중요한 조건은 신분계급이 철폐되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신분계급의 철폐는 단순 한 제도의 폐지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문제였다. 그리하여 그의 자연사회는 물질적으로 또는 도 덕적으로 진보한 사회라기 보다는, 정신문명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정신문명으로 전환되 지 않으면 자연스러운 연대의식이 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가 보기에는 사회와 자연을 통틀어서 지배하는 진리(道)가 있었다. 이러한 진리에서 벗어 나는 인위적인 노력이나 제도는 오히려 사회를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오히려 이상적인 사회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한 자연사회는 두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사람들이 구 도자(求道者)로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종교적이거나 명상적 삶이 아니라 비물질적 삶, 정 신적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본성에는 사회적 존재를 초월하는 차원이 있으며, 그러한 경지에 대한 지향이 인간의 주된 사회적 동기가 될 때 인간사회는 자연스럽게 자연사회가 되는 것이었다.

둘째, 사람들이 구도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또 하나의 의미는 자아실현적인 삶이었다. 노자가 제시하는 삶은 반드시 세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이든 탈속이든 무관하게 모든 삶에서 도에 이르는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장자는 소를 도축하는 도살자나 심지어는 도둑에게 도 그 세속적인 삶을 통하여 그 속에서 도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째, 이렇게 인간이 자아실현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사회는 자연적으로 좋아지는 것이며, 이러 한 원리를 무시하고 특정한 사회적 가치를 위하여 인위적인 제도를 통한 노력은 불필요하다는 것 이다. 모든 인위적 제도들은 사회적 연대에 기여하기 보다는 반대로 그것을 저해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인위적 제도적 노력의 카르마(業;karma)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사회가 타락한 원인이 바로 인위적 제도적 노력의 카르마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가 추구하는 사회는 사 회적 카르마가 제거된 사회였다. 그가 살았던 춘추시대의 국가적 사회적 제도는 과거의 이상사회 와 비교할 때 너무나 번잡하고 무도(無道)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을 폐지하는 것이 오히려 백성들이 자연스럽고 연대적인 삶을 영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었다. 정치사회제도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풍요해지는 것도 오히려 인간의 연대의식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과 사회가 비물질적으로 되는 것이야말로 자연사회의 조건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사회를 보장하는 사회체제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노자의 대답은 소국과민(小 國寡民)이었다. 즉 그는 공동체의 규모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인간의 세계가 작은 규모의 공동체 로 분화되어 있을 때만 도가 자연스럽에 구현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었다. 공동체의 규모가 작 아지면 인위적인 모든 제도는 불필요한 것이며, 계급과 헤게모니는 불필요한 것이 되고, 인간의 연대는 자동적으로 형성되고, 인간의 추구는 자연스럽게 인간 스스로를 고양하는 도(道)를 지향한 다는 것이었다.

노자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정치란 백성이 다만 통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 뿐인 그런 정 치였다. 그 다음의 정치는 백성들이 서로 연대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의 정치는 백성들을 두 려워하게 하고 백성을 모욕하는 정치였다(노자17장). 백성들이 다만 통치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뿐인 그런 정치는 교묘한 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사회적 제도적 카르마 를 제거했을 때 이루어진다. 백성들에 대한 구속과 규제가 많을 수록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물질적 재화나 기물(奇物)이 많아질 수록 국가나 가정은 더욱 혼미해지고, 인간의 사회적 기교가 많아질수록 기이한 물건들이 많이 생겨나고, 법령이 많아질 수록 도적이 늘어난다(노자 57장). 이 러한 사회는 거대한 국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노자는 국가의 규모가 작 아져야 하고, 백성의 수가 적은 국가여야 하는 것이었다.(노자 80장)

노자는 인간의 삶과 사회에 대하여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것은 무엇이 가장 가치있 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도덕과 윤리(공자), 경제적 평등과 풍요(묵자), 국가안전이나 부국강 병(법가) 그 자체는 무가치한 것이었다. 진실로 가치있는 것은 삶과 사회를 넘어서서 우주의 근원 적인 진리(道)에 합일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지에서 보면 사회적인 여러가지 가치는 하찮은 것 이었다. 인간과 사회가 도를 지향할 때, 사회적 제가치(연대, 평등, 안전 등)는 자연스럽게 저절로 달성되는 것이었다.

그 반대로 사회적 가치를 인위적으로 추구할 때에는 결코 그것을 달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적 가치들은 개별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 진리의 구현이 기 때문이다. 마치 뿌리가 없는 줄기나 잎을 아무리 쓰다듬어도 나무가 성장할 수 없으며, 뿌리를 튼튼히 하면 줄기나 잎은 저절로 무성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줄기나 잎을 쓰다듬는 행위를 중지하면 그 카르마가 소멸되고, 그러한 때에 근원적인 진리는 스스로 피어나 사회적 제가치가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無爲而無不爲). 현명한 이를 숭상치 않는 사회에서 백 성은 다투지 않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은 사회에서 도둑이 생기지 않고,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사회에서 백성의 마음은 어지럽지 않다. 그리하여 성인의 정치는 백성의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는 것이다.(노자 제3장)

신분계급의 철폐에 관한 노자의 사상은 물론 이론적으로는 타당한 것이었다. 나아가 이상사회 에 관한 그의 사상은 실로 위대한 통찰이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는 농업사회에서는 그러한 사회 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노자의 사상에서는 폭력, 토지자본, 그리고 지식(집합표상)의 문제, 다시말하면 헤게모니의 문제가 배제되어 있다. 작은 국가는 분명히 이러한 헤게모니를 배제 할 수 있는 이상사회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작은 국가로 가는 경향이 없으며, 노력한다고 하여 그 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폭력, 자본, 지식의 헤게모니는 반대로 거대국가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서 근원적인 제약은 신분계급의 철칙이었다. 노자는 이러한 점에 관 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공자는 확고한 현실적 입장에 있었다. 공자는 비록 자신의 당대에는 도시국가들 의 전쟁상태였지만 미래에는 거대국가로 갈 것이라는 것, 그리고 신분계급체제가 철칙이라는 것 에 대해서 지극히 현실적인 안목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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