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눈으로 보는 문명사


제 3편 산업사회 화폐체제


제 2 장 화폐체제에서의 소유와 자본


3.2.1. '화폐'라는 체제적 범주
3.2.2. 화폐체제에 의한 소유, 계약, 소득
3.2.3. 화폐에 의한 시장과 물적조직(物的組織)
3.2.4.자본과 자본헤게모니




3.2.1. '화폐'라는 체제적 범주

우리가 전근대적 사회를 돌아보면, 사회적 체제적 부조리(不條理)에 대하여 분노를 금할 수 없 고, 때로는 야만적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부조리를 쓸어내어 버린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바로 화폐이다. 근대사회에로의 전환에 대하여, 문명의 진보, 자유의 승리, 이성의 승리, 인간정신의 위대한 진보 등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추상적인 언어일 뿐이 다. 인류 수천년의 역사에서 근대이전의 부조리를 쓸어낸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화폐인 것이다. 화폐가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하였다. 화폐가 민주주의를 선물하였다. 화폐가 인간을 계급 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것은 공자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면 이 위대한 화폐란 도대체 무 엇인가?

우리는 화폐를 연대의 매개양식, 헤게모니 자산으로 부르고 있다. 근대사회가 그 이전의 사회 와는 다른 점은 가치매체(화폐)에 의하여 사회를 통합하고, 가치매체(화폐)가 다른 모든 매개양식 들의 성격을 변혁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에도 화폐는 존재하였다. 그러나 근대이후와 같이 인 간의 사회관계를 가치매체(화폐)가 '보편적으로' 매개한 일은 없었다. 또한 가치매체에 의하여 다 른 매개양식(즉 헤게모니)이 전혀 새로운 성격을 가지게 된 일도 없었다. 이러한 점은 모든 이론 에서 간과되고 있다.

우리는 근대사회의 기초로서 화폐를 특히 강조하고자 한다. 권력이 오늘날과 같은 성격을 가 지게 된 것도, 인간의 사고방식(집합표상)이 오늘날과 같이 변화한 것도, 자본, 법률, 커뮤니케이 션이 오늘날과 같이 변화한 것도 모두 화폐에 의한 변화인 것이다. 지금까지 중요하였던 체제적 범주들---군주정치, 귀족정치, 민주정치 등 정치체제, 생산수단과 소유의 문제 등과 같은 경제체 제, 종교적 사회와 지식사회, 과학기술 등 일체의 체제적 사회적 범주들---의 전제와 기초에는 화폐가 있다. 화폐라는 체제적 범주를 무시하고 이런 것들은 결코 논의될 수 없는 것이다.

3.2.2. 화폐체제에 의한 소유, 계약, 소득

화폐는 인간이 일체의 사물을 규정하는 매개체이다.

인간이 접하는 일체의 존재는 화폐에 의하여 규정되고 화폐에 의하여 상호관계적 의미가 부여 된다. 가령 화폐가 없다면 라디오, 산(山), 화가의 그림, 오페라, 이런 것들은 서로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화폐에 의하여 라디오는 100달러, 산은 1만달러, 특정 화가의 그림은 1,000달러, 오페라 입 장권은 100달러로 각각 규정되고 상호간의 비율에 의하여 상호적 의미가 규정된다. 이처럼 화폐 는 지구중력이 모든 사물에 대하여 무게를 부여함으로써 모든 사물을 규정하고 상호적인 의미를 규정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화폐가 인간의 삶에 도입됨으로써 일체의 사물은 동등(同等)한 평면 에서 의미와 관계를 가지게 된다.주2) 이처럼 화폐가 순수한 소유를 규정함으로써 인간과 사물의 일체의 관계를 이러한 소유관계로 환원(還元)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인간과 사물의 관계 는 단 하나의 관계 즉, 소유관계로 통일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통일된다. 인간관계는 소유물에 관한 <계약관계>로 통일되 는 것이다. 모든 사물에 관하여 인간이 그것을 소유하고 이전하는 계약이 가능해진다. 무엇을 소 유하고 그것을 이전하고 그 대신 화폐라는 대가를 주거나 받는 계약관계이다. 모든 사물은 화폐 로 환원될 수 있고, 모든 인간관계는 화폐를 매개로 하는 계약으로 환원된다. 신과 인간의 10계명 에 관한 계약은 다른 인간관계에는 적용할 수 없는 계약이다. 봉토와 충성을 교환하는 봉건계약 역시 다른 인간관계에는 적용할 수 없다. 그러나 화폐에 의한 계약은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사회관계가 화폐계약으로 형성되는 것이 근대사회이다. 과거에 신분계 급이 형성하던 사회관계가 화폐가 형성하는 사회관계로 대체된 것이다.

화폐가 경제관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인간의 삶의 양식도 변화하였다. 인간은 화폐에 의하 여 살아가게 된 것이다. 화폐소득이야말로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일체의 것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수단이고,화폐소득을 얻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방식이 된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농민이 살아가는 방식은 자신에게 필요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것이었으며, 지배계급이 살아가는 방식은 농민으로부 터 그 생산물을 현물의 형태로 직접 이전을 받는 것이었다. 그것이 화폐사회에서는 화폐소득을 얻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생산은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화폐소득을 얻기 위한 것으로 되 었다. 신분계급적 특권은 폐지되고 화폐소득을 얻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가령 토지를 제공하고 지대(地代)를 받는 것과 같이 화폐소득을 얻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화폐소득을 얻는 방식은 네가지로 말해진다.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소득을 얻으며, 토지 등을 제공하고 지대소득을 얻으며, 화폐자본을 제공하고 이자소득을 얻으며, 생산을 통하여 이윤소득을 얻는 것이다. 화폐체제에서는 이처럼 화폐에 의하여 화폐소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화폐자본이 여러가지 형태의 금융자산을 창출하였다. 가령 주식, 채권, 어음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재산(富)이 새로운 형식으로 변화된 것이다. 계급적 특권은 사라지고 대신에 화폐소득을 주는 자산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화폐는 나아가서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에서도 시장과 물적조 직(物的組織)이라는 전혀 다른 양식을 창출하였다.

3.2.3. 화폐에 의한 시장과 물적조직(物的組織)

신분계급이 철폐됨으로써 인간을 사회로 통합하는 양식도 변화되었다. 그것의 핵심은 역시 화 폐이다. 하나는 평등한 개인이 화폐를 매개로 하여 거래를 하는 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 장(市場)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들 상호간에 계속적으로 화폐를 지불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명 령과 복종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물적조직(物的組織)이다. 우선 화폐적 조직을 물적 조직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시장과 물적조직이야말로 화폐가 인간을 사회로 통합하는 양식인 것 이다.

시장은 소유물을 화폐에 의하여 거래하는 장(場)이다. 화폐소득을 얻어서 생존하는 것이 일반 화되면, 자신의 화폐를 물건으로 바꾸거나 반대로 자신의 물건을 화폐로 바꾸어야 한다. 그럼으로 써 필요한 화폐소득을 얻고 또한 필요한 생활자료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교환의 장이야말로 바 로 인간의 상호의존하는 관계의 망(網)이다. 이러한 상호의존의 관계망이 시장이다. 이제 시장이 야말로 인간이 경제적으로 상호의존하여 살아가는 영역이 된다. 즉 시장이야말로 새로운 경제적 공동체인 것이다.

조직이란 지속적인 인간의 결합체이다. 우리는 화폐체제에서의 조직, 화폐를 매개로 하는 조직 을 <물적조직>이라고 불렀다. 물적조직이란 인간을 일정한 시간대에 일정한 장소에 집결시켜 통 제하는 조직이다. 이때 통제권을 가진 사람은 화폐에 의하여 조직비용을 조달하는 자이다. 물적조 직이란 인간을 일정한 시공간에 집결시켜 통제하고, 화폐를 제공하는 사람이 통제권을 장악한다 는 특징을 가진다.

농업사회에서는 조직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조직의 비용을 조달하기가 곤란하였기 때문이다. 조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물로 조직비용을 조달하거나 아니면 아예 생활을 같이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수도원이나 교회(또는 寺刹)와 같은 조직은 생활을 같이 하는 조직이었으 며, 그것은 일정한 사상(思想)을 같이 하는 정신적인 조직이었다. 화폐체제로 전환하자 조직은 물 적 조직으로 전환되었다. 즉, 조직비용은 화폐에 의하여 조달되고 화폐를 조달하는 자가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것이 물적조직이다.

물적 조직은 사람들을 일정한 시간-공간에 집합시켜 통제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공통의 사상이나 정신(精神)을 핵심적 요소로 하지 않는다. 물적조직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감옥이다. 감옥의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고 국가가 통제권을 가진다. 감옥은 가장 소수의 인원이 가장 많은 수의 사람을 하나의 장소에서 전시간대에 걸쳐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물적조직 이다.3.2.4.자본과 자본헤게모니

농업사회에서의 자본은 토지였고, 토지를 지배하는 것이야말로 자본헤게모니의 기반이었다. 화 폐체제로 전환하면서 토지는 하나의 상품--화폐에 의하여 평가되고 거래되는 상품--으로 변화하 였다. 그것은 상품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토지를 취득하고 싶으면 누구나 화폐를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중세봉건사회에서 토지는 오직 충성을 대가로 하여 왕으로부터 봉토로서 수여받는 것이 었다. 그것은 신분계급에 관련된 것이었지 상품이 아니었다. 화폐체제에서는 토지가 상품화됨으로 써 토지가 자본헤게모니의 자산이 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신분계급의 붕괴이다.

한편 화폐체제에서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서 화폐소득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정한 화폐소득을 계속적으로 줄 수 있다면, 그는 상대방으로부터 그 대가로 복종을 얻을 수 있으며, 그에 대한 헤 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복종을 상품화할 수 있다. 그것이 노동이다. 그 리하여 자본헤게모니는 전혀 새로운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자본헤게모니란 화폐의 힘(화폐헤게모니, 가치매체헤게모니) 가운데에서 특수한 것이 되었다. 자본헤게모니는 계속적으로 화폐소득을 지불함으로써 인간과 사물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다. 과 거에는 토지를 장악한 자가 그 토지에 결박된 인간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토지와는 무관하게 화폐를 지불함으로써 동일하게 인간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동 력을 화폐에 의한 거래의 대상이 되는 상품으로 전환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즉,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력을 구입하는 것이고, 인간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것이 화폐가 인간의 복종을 조달하는 형식이고 또한 화폐체제에서 생산과정 에 인간을 조직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이 과거와 다른 점은 신분계급의 특권과 의무의 형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과 인간의 계약에 의한 권리와 의무의 관계로 변혁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자유로와 진 것이다. 실로 자유란 화폐에 유인되는 복종이다.

화폐로 인간의 노동을 구입한 사람은 자연히 그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권리도 취득한다. 또 그 생산물을 판매하여 획득한 화폐, 그 화폐 속에 포함된 이윤에 대한 권리도 취득한다. 이것은 과거에 주인이 노예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권리, 영주나 귀족이 그들의 토지에서 생산된 생산물의 대한 권리를 가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화폐체제에서는, 생산물에 대한 권리가 노동자에게 귀속되 지 않는 이유는, 주인과 노예, 영주와 농노의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였을 뿐 생산물과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당연히 노동자의 생산물에 대한 권리란 불가 능한 것이다. 생산물에 대한 권리는 최초에 노동력과 원료, 기계 등의 구입에 화폐를 지불하고, 그것들을 결합하여 생산과정을 조직하고 작동시킨 사람에게 귀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력, 원 료, 기계 등을 구입하는데 화폐를 지불함으로써, 노동력을 조직하고 경영하며, 그 생산물을 처분 하고 이득을 획득하는 것이 새로운 의미의 '자본헤게모니'이다. 이것은 과거의 농업사회에서 영 주가 농노를 지배하고 농업생산물의 일정부분을 획득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던 자본헤게모니의 변 화된 형식이다. 즉 화폐체제에서 자본헤게모니는 생산조직의 경영권, 생산물과 이윤에 대한 권리 인 것이다.

한편 최초에 상당한 양의 화폐를 보유하고, 그것으로 노동력, 원료, 기계 등의 구입에 지불하 고, 이것을 결합하여 생성된 생산물을 처분하여 최초에 투입된 양보다 더 많이 획득되는 변화과 정이 바로 자본이다. 화폐체제에서 자본은 농업사회의 토지자본과는 달리, 동적(動的)으로 계속 전환되는 실체이다. 토지가 신분계급체제에서의 자본형식이라면 화폐자본은 화폐체제에서의 자본 형식이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근원은 화폐에 있는 것이다.

화폐체제에서 자본헤게모니는 특정한 신분계급의 특권이 아니다. 자본헤게모니는 자유롭고 평 등한 인간과 인간의 계약에 내포되는 권리가 되었다. 자본헤게모니는 강제성이 없다. 그것은 타인 으로부터 자발적인 복종과 승인을 얻어내는 힘이다. 자본헤게모니는 소유권의 한 내용인 것이다.

자본헤게모니를 이렇게 변혁하는 과정에는 엄청난 사회적 진통이 있었다. 모든 사람을 신분 계급으로부터 해체하여 소유적 개인으로 환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권계급의 특권을 철폐하고 나아가 (특권적 신분)계급을 철폐해야 했고, 혁명이 필요하였다. 또한 농노계급에 대해서는 자유 를 주었지만, 동시에 토지에 기초한 농업적 생계보장을 박탈해야 했다. 즉 인민을 전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오직 노동력만을 소유하는, 그러한 임금노동자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엔클로저 운동과 스핀햄랜드법은 이처럼 인간을 사회적 생계보장으로부터 추방하는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화폐에 의한 해방은 동시에 모든 인간을 화폐 앞에선 단독자(單獨者)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것 은 엄청남 고통을 수반하는 무자비한 과정이었다. 새로운 자본헤게모니의 양식은 이렇게 만들어 졌다.

화폐에 의하여 이렇게 전혀 달라진 사회체제를 사회의 경제적 차원, 정치적 차원, 문화적 차원 의 순서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그것은 경제공동체로서의 시장, 정치공동체로서의 근대국가, 그리 고 문화공동체로서의 국가와 이데올로기 공동체의 순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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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짐멜 166정

주2)짐멜 389정

주3) 푸코는 이러한 조직을 권력과 감시의 문제로 논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