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눈으로 보는 문명사


제 3편 산업사회 화폐체제


제 3 장 화폐체제에서의 경제공동체 : 시장


3.3.1. 장원과 시장
3.3.2. 경제공동체로서의 시장
3.3.3. 시장공동체의 성격
3.3.4.시장의 확장성(擴張性)
3.3.5. 자본헤게모니의 주동성



3.3.1. 장원과 시장

우리는 신분 계급체제농업사회를 경제공동체(장원), 정치공동체(계급국가), 문화공동체(보편교 회)로 분석하였다. 화폐체제로 변화함으로써 이러한 공동체의 구조와 성격은 전혀 달라진다. 우리 는 화폐체제에서의 경제공동체(시장), 정치공동체(국민국가), 문화(국가와 이데올로기 공동체) 순 서로 분석할 것이다. 이 변화의 근원에는 화폐가 있다.

농업사회에서의 경제공동체는 장원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자본헤게모니(토지)의 체계였다. 가 령 한 사람의 영주가 자본헤게모니를 행사하고 그에 예속된 농민들의 농업생산물이 영주와 농민 들에게 배분되는 장(場)이었다. 이것은 장원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여 서로간 에 재분배되는 자급자족의 체제였다. 또한 장원은 사람들이 경제생활에 필요한 사회적 연대를 형 성하는 범위이다. 사람들은 모든 경제생활을 장원 내에서 해결하였으며 장원 외부와 거래할 필요 가 없었다. 장원은 독립된 하나의 경제공동체였다.

이에 대하여 산업사회-화폐체제에서는 자급자족이 아니라,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생산 과 소비에 의존한다. 화폐체제에서 인간은 소유적 개인이다. 사람들은 자유로우며 오직 자신의 소 유물과 그것의 교환관계로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렇게 소유와 교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공동체 가 시장(공동체)이다. 생산물을 화폐에 의하여 서로 교환함으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시장은 사람 들이 경제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범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을 시장 에 판매하여 화폐를 얻고, 다시 그 화폐로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시장에서 구입하여 생활한다. 시장이란 화폐체제에서 인간이 자신의 경제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 공간적 영역 이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상호의존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하 여 화폐체제에서의 경제공동체는 바로 시장이다. 시장은 화폐와 소유에 의하여 인간이 경제적으 로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식인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인간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장원은 사실상 하나의 마을과 같은 의미이다. 대개 한 사람의 영주가 토지자본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그 토지의 영역을 단위로 하여 마을이 결합되어 하나의 장원을 형성한 것이었다. 이것은 순전히 경제적인 면에서는 넓은 공동체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업사회에서 인간을 커다란 공동체로 묶어들이는 것은 사회의 정치권력적 차원 때문이었다. 왕국은 권력집단의 필요에 의하여 형성되는 공동체로 서, 권력계층(지배계급)이 생활자료를 세금의 형태로 획득하는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 산업사회-화폐체제로 전환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변화하였다. 자급자족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로' 인간은 커다란 공동체(시장)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장이 커질수록 공급자로서는 더 많은 수요자를 만날 수 있고, 수요자로서는 더 다양한 생활자료를 얻 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권력적 강제체계나 신분계급적 착취체계의 기준에 의하여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화폐에 의하여 공동체로 통합되게 된 것이다. 인간이 화폐라는 매개수단에 의하여 공동체로 통합되게 된 것이다. 인간은 농업사회처 럼 서로 분리되된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는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는 경 제적 압력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시장확대의 압력이 근대사를 형성하였다.

자본헤게모니의 체계도 시장과 장원에서 서로 다르다. 장원의 자본헤게모니체계는 단순하였다. 헤게모니를 장악한 영주와 그렇지 않은 농민들의 관계가 장원의 자본헤게모니 체계였다. 즉, 단일 한 자본헤게모니의 수직적 분화의 체계였다. 시장에서의 자본헤게모니의 체계도 헤게모니계층(자 본가)과 비헤게모니계층(노동자)이 분화된다. 하지만 자본헤게모니(기업)는 다수이며, 시장은 다수 의 자본헤게모니(기업)가 상호경쟁하는 관계이다. 시장이란 다수의 자본헤게모니(기업)가 순전히 경제적 차원에서 상호 경쟁하는 영역이다. 순전히 경제적이라는 것은 정치권력적이나 군사적인 수단이 배제되고 경제적인 수단에 의한 경쟁의 영역이 시장이라는 것이다.

3.3.2. 경제공동체로서의 시장

시장은 개념적으로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시장은 사람들이 상품을 거래하는 장소이다. 이것이 가장 전통적 의미의 시장이다. 둘째,시장은 화폐가격에 의하여 상품의 수요공급이 조절되 는 매카니즘을 의미한다. 이것은 장소가 아니라 어떠한 구조를 형성한 관계망이다. 세째, 시장은 특정한 상품이나 자원에 대한 수요공급의 범위이다. 고품질테레비젼 시장의 크기, 시장 점유율, 노동시장, 금융시장 등의 시장은 이러한 의미이다. 네째, 시장은 사람들이 공동의 경제생활을 형 성하는 상호의존의 영역, 하나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비경제적인 요소에 의하여 경계선이 확정되는 동질적 공동체이다. 국내시장, 유럽공동체시장 등의 시장이 이러한 의미이다. 우리가 말 하는 시장은 바로 네번째 의미이다. 공동체로서의 시장은 앞의 세가지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종 합적인 것이다.

시장은 농업사회에도 있었다. 그러나 농업사회에서의 시장은 경제생활에 부수적이고 국지적 (局地的)인 것이었다. 그것은 위의 시장의 개념 가운데 첫번째의 개념인 상품거래에 한정된 것이 었다. 농업사회에서 시장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또는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국 가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원거리 교역(遠距離交易)이었다. 그런데 산업사회에서는 시장이 가 장 중요한 경제생활의 방식이 되었다. 생산도 소비도 시장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재분배(再分配) 나 교역도 모두 시장을 전제로 하여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산업사회-화폐체제에서는 시 장이 중요해져서 마침내 인간의 공동체를 규정하는 양식이 된 것이다.

경제공동체로서의 시장은 하나의 화폐가 통용되는 영역이다. 하나의 동질적인 시장 또는 시 장공동체란 무엇보다도 화폐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폐주조권(貨幣鑄造權)은 경 제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심적 헤게모니이다. 화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서로 다른 시장이라는 것 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는 프랑화에 의하여 통합되는 경제공동체(시장)인 것이다. 경제공동체의 영역 내에서는 일체의 상품이 화폐가격에 의하여 자유롭게 거래된다. 하나의 화폐가격이 통용되 는 영역이 하나의 시장인 것이다. 관세(關稅)는 이러한 경제공동체의 경계 밖의 상품에 부과되는 것이다. 따라서 관세야말로 (국가의 국경선처럼) 시장공동체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것이다.

또한 시장은 물질적 상품만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운 영역이다. 노동과 자본 의 이동이나 배분이 자유롭지 못한 체제가 신분계급체제이다. 그리고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 동이 이루어지는 경계선이야말로 시장의 경계선이다. 나아가 시장적 경제공동체 내에서는 하나의 헤게모니 중심이 있다. 대체로 그것은 국가권력이다. 시장이란 동일한 내용의 법률이 통용되고 하 나의 경제정책이 시행되는 영역이다. 결국 화폐체제에 있어서 경제공동체는 다른 경제외적 제한 이나 규제없이 순수하게 화폐가 통합하는 경제영역이다. 그러한 화폐는 단일한 헤게모니에 의하 여 주조되고 규제된다. 상품, 노동, 자본은 화폐의 매개에 의하여 통합된다. 이것이 장원과 다른 화폐체제에서의 경제공동체, 즉 시장이다.

화폐체제에서 경제공동체(시장)은 화폐에 의하여 규정된다. 과거에는 토지가 자본이었기 때문 에 토지의 영역이 공동체를 규정하였다면, 화폐체제에서는 화폐자본이 자본헤게모니를 형성하기 때문에, 경제공동체 역시 화폐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대 화폐 체제에서의 경제공동체는 거의 인식되지 않았다. 서구중세사회에서 장원은 국가의 영역과는 명백 히 구별되기 때문에 용이하게 인식되고 규정되었다. 농업사회에서 농촌공동체(마을)는 공동체의 기본단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하나의 시장영역으로서의 경제공동체는 국가와 동 일한 영역이었고, 따라서 국가와 구별되지 않았다. 또한 화폐에 대한 권한이 국가권력의 한 요소 였기 때문에 경제공동체는 규정되지 않고 국가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근대에서도 경제공동체는 엄연히 국가와 구별되는 영역이다. 가령 제국주의 시대에는 하나의 모국(母國)이 포괄하는 전식민지의 영역이 하나의 경제공동체(시장영역)였다. 이러한 식민지영역 은 그 모국인 국가와 구별되는 영역인 것이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유럽경제공동체와 같이 개별국가를 초월하여 하나의 경제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 근대사회의 기원은 통일된 시 장을 형성하는 과정이었으며, 그것은 동시에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동 전의 양면과 같이 동일한 실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통일된 '국가시장'을 형 성하는 것이고,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중앙집권적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민 족은 통합된 국민경제를 형성하는 가장 용이한 문화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주의는 기존의 문화공동체 위에 경제공동체와 국가공동체를 형성하는 운동이었다. 이처럼 시장과 국가, 경제공동체와 정치공동체가 구별되지 않은 것은 역사적 이유가 있으나, 그것이 서로 동일한 것 이기 때문은 아니다.

3.3.3. 시장공동체의 성격

농업사회의 장원과 비교할 때 산업사회의 시장은 대단히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시 장의 여러가지 성격을 여기서 전부 논의할 수는 없다. 시장의 성격과 그 내재적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발달되어 왔다. 여기에서는 장원과 비교하여 공동체로서의 시장 의 성격을 논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장의 성격은 크게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장원은 정 태적인데 대하여 시장은 동태적이다. 둘째, 시장공동체에서의 인간관계는 '소유에 있어서' 불평등 하고 서로 경쟁적이다. 세째, 장원은 고정되어 있는데 대하여 시장은 끊임없이 확장된다. 시장의 이러한 성격이 근대사와 근대문명의 성격을 규정하였다.

첫째, 시장은 지극히 동태적(動態的)이다. 시장체제를 형성하는 것은 모든 것을 상품화 하는 과정이었다. 물질적 생산물만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장은 토지를 상품화하고, 노동을 상품화하고, 화폐도 상품화한다. 상품화한다는 것은 그 생산이나 수요공급의 상황 그리고 그 가격 이 항상적으로 변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동의 결과 호황, 불황, 공황 등의 상황을 야 기한다. 경제가 기후와 자연적인 이유나 생산의 애로 등의 이유가 아니라, 순전히 구조적인 이유 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하고 생산이 중단되고 기업이 도산하는 공황을 야기하는 것이 시장이 다. 이러한 시장의 변동성의 원인과 법칙을 규명하려는 이론적 노력이 많이 있어왔지만,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는데 완전히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거의 명백해 졌다.

시장공동체에서는 심각한 경제적 변동성(실업과 침체와 공황)이 공동체 자체를 파괴할지도 모 르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시장의 변동성이 공동체를 발전시키는가 결국에는 공동체 자체를 파괴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견해가 갈라져 있다(이것은 자본주의의 전망에 대한 견해이다. 아담스미스 이래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비관적이다). 이와 다른 또 하나의 문제는 인간과 사회가 변화에 얼마 나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과 사회가 극심한 (시장적 경제적) 변화를 무한하게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인류는 방향과 속도를 조절할 수 없는 폭주(暴走)하는 차(車)를 타고 있 는 것과 같다).

둘째, 시장은 사회를 소유에 있어서 불평등하게 하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경쟁적으로 만든 다. 시장공동체에서 인간은 신분계급에서 해방된다. 그 대신에 인간은 완전히 개인으로 분해되고 (신분계급이 아니라) 소유에 의하여 규정된다. 인간이 소유에 의해서 규정될 때 그 소유를 평등하 게 하는 어떠한 경향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신분계급적 불평등을 대체한 새로운 불평등의 문제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불평등을 신분계급체제의 연장선에서 규정하였다. 즉 자본의 소유를 기준으로 하여 새로운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형성되는 체제가 근대체제(자본주의)라는 것 이다. 말하자면 토지자본을 소유하였던 과거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이러한 견해보다 전망이 중요하다. 근대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적인 전망은 노동자계급이 혁명 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는 연다는 것이었다. 인류의 어떤 역사에서도 피지배계급이 혁명을 통하 여 전혀 새로운 체제를 건설한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 단순명백한 사실은 이제까지 무시되어 왔다.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 것은 그러한 혼란한 상황이 지난 후에 과 거에 존재하던 세력과는 전혀 다른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근대사회는 중세사회의 피지배계급인 농노가 혁명을 통하여 건설한 사회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근대사회의 노동자계급이 전혀 새로운 사회를 연다는 가정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시장체제는 자체 내에 전혀 새로 운 사회에 대한 동력(動力)을 가지고 있지 않다.

3.3.4.시장의 확장성(擴張性)

세째로, 시장공동체는 확장적이다. 시장은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추동력을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점에서 장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장원경제는 정태적이었고, 마을 단위로 분리되어 있 었으며, 변화의 요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시장은 상호의존의 영역이고 이러한 영 역이 계속 커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확장성의 주요한 원인은 시장을 주도하는 자본헤 게모니가 시장의 확장에 의하여 더욱 많은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시장체제의 이러한 확장성이야말로 일찌기 어떠한 정복자도 성공하지 못한 세계정복을 이룩하 였다. 이러한 경제적 정복은 군사전략과는 다른 시장경제의 탁월한 전략요소 때문이었다. 우리는 오히려 군사전략적 관점(軍事戰略的 觀點)에서 시장을 볼 때, 그 위력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 다. 군사적 침략에서 가장 중대한 애로는 병력의 수와 보급(補給)의 문제이다. 그런데 시장은 이 러한 전략적 애로를 혁명적으로 타개한 것이다. 전략적으로 볼 때, 시장경제의 추진자들은 무한한 병력(무장한 군인, 기업가, 전도사, 불량배, 이주민)을 동원할 수 있었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식민지로 떠나는 모든 사람들이 정복을 위한 병사(兵士)인 셈이다. 또한 시장은 무한한 보급(補 給)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제적 진출 그 자체가 보급이 자동적으로 해결하기 때문이다. 시장 의 확장성은 농업사회와는 달리 경제적 역동성이 군사력을 동원하게 하는 형태가 되었다. 과거의 정복자들은 주로 권력적인 이유 때문에 정복을 행하였다. 근대사회는 주로 시장을 확장하기 위 하여 군사력이 사용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전세계가 한번도 정복된 일이 없지만, 경제적으로는 근 대에 와서 서구가 전세계를 정복한 것이다.

이러한 점이 자본주의(즉 시장체제) 역사를 설명해 준다. 자본주의가 원거리교역에서 발생하였 는지 농촌의 착취를 통한 내부적 발전에 기인하는 것인지는 견해가 대립된다. 그러나 한가지 명 백한 것은 외부로의 확장 없이는 자본주의가 그렇게 급속하게 발전할 수는 결코 없었다는 것이 다. 시장이 공간적으로 확장되지 않고 내포적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대단히 많은 시간이 소 요되고 그 축적량도 한정된다. 따라서 봉쇄적인 경제에서 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을 이룩한다는 것 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근대역사에서 봉쇄체제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한 국가는 단 하나의 국가도 없다(봉쇄적인 사회주의적 경제개발전략은 모두 실패하였다. 영국등 서구 국가도 내포적 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모두다 공간적 확장을 통해서 경제발전이 이룩된 것이다.

서구에서 자본주의 초기에 원시적인 자본축적이 이루어진 것은 다른 문명 지역에 대한 약탈적 교역이었다. 그것은 부(富)를 외부에서 유입한 것이다. 시장공동체 외부에서 수요를 확보하고 또 저렴한 원료공급을 확보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동원하는 정책이 제국주의였다. 서구인들은 전지구 를 분할하여 식민지로 삼았으며 식민지는 그들의 경제공동체의 외부에서 서구국가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이러한 자본주의(시장체제)의 확장성이 충돌을 야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에는 식민지를 외부지역으로 가진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동안 확장을 통하지 않고 공동체 내부의 정책으로 경제를 안정적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 경제학 을 지배했다. 케인즈의 모델에 의하면 적자재정은 수출흑자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따라 서 국가가 정책적으로 유효수요를 확장하면 외부적 확장없이 경제적 발전, 자본축적, 완전고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 시기가 적어도 경제적 사유에 있어서는 유일하게 시장의 확장성을 추구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일본과 독일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수출을 통하여 시장의 확장 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본과 독일의 승리였다. 무역흑자를 추구하지 않았던 미국의 케 인즈적 정책은 재정적자와 국제경쟁력의 쇠퇴를 야기하였다. 채무의 누적은 더 이상의 케인즈적 유효수요 창출정책이 불가능하게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미국이 드디어 시장확 장으로 전환하였다. 그것은 세계적 차원의 경제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의 현황은 모든 국가들과 거대기업들이 하나의 전투무대에 참여하는 경제전쟁 이 되었다. 이것은 모든 국가가 다른 국가를 상대로 시장을 확장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 하여 시장 자체가 전세계적으로 확장되어 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경제 는 시장과 교역(무역)을 구분하지 않는다. 자본시장은 세계화되었고 경쟁 역시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의 경쟁은 국내에 한정되고 국가간에는 교역(무역)의 질서에 의하여 지배되 었다. 그러나 현재는 국가보다 규모가 큰 많은 거대다국적기업이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헤게모니 를 행사하고 있다. 경쟁은 적대적으로 되어 국내적 경쟁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기업과의 경쟁에 서도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전쟁의 상황은 계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제전쟁에는 결국 승패가 결정될 수 밖 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가의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패배한다면 그 국가의 국민들은 생활수준을 낮추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거대한 실업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경우 경쟁의 과정이 나 결과에 대하여 군사력을 동원하려는 유인이 야기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또는 전세계 에 걸쳐서 경쟁에서 승리한 계층과 패배한 계층이 횡단적(橫斷的)으로 분화하는 것이다. 경쟁에서 승리한 계층은 자국 국민의 하층계층과는 무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세계의 사람들 을 수요자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세계적 차원에서 횡단적으로 계층화가 야기된다는 것 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국가가 무의미해지고 무력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근대사는 '시장 확장의 역사'이다. 그것은 양적(量的)으로 세계시장을 형성하는 역사이 고, 질적(質的)으로 전세계에 걸쳐 동질적인 시장을 형성하는 역사이다. 현대는 그 마지막 단계에 있다. UR.GR. BR.TR. CR은 전세계를 서구식의 경제법체제로 규제함으로써 세계시장을 완전하게 서구적 질서로 동질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장확장의 완성된 단계이다.

이제까지 시장의 확장은 공간적 차원에서 논의하였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시장의 확장성은 일체의 변화를 자본헤게모니(그리고 시장의 변화)가 주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의 모든 분야 (정치와 문화까지도) 시장화한다는 것이다.

3.3.5. 자본헤게모니의 주동성

농업사회의 장원 공동체를 통합한 것은 권력헤게모니였다. 즉 지배계급인 영주가 경제잉여를 취득하는 범위가 장원이었다. 이에 대하여 시장은 화폐가 인간을 공동체로 통합하는 범위이다. 이것은 경제적 요인이 인간을 공동체로 통합하는 주된 요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이 농업사 회-계급체제와 산업사회-화폐체제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이러한 화폐적 경제적 요인은 다른 헤게모니를 주도(主導)하고 추동(追動)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 시장은 국가보다 규모가 작은 영역이었다. 시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원거리 교역이 더욱 중요하였다. 이러한 교역에 군사력이 동원된 것이 초기의 제국주의였다. 이 당시의 국가는 많은 농업인구를 주로 권력헤게모니에 의하여 통합되었다. 그것이 부르조아 혁명과 함께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동질적인 시장의 영역이 일치되게 되었다. 서구 민족주의 는 이러한 과정에서 동일한 민족이 하나의 시장,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려는 노력이었다. 완전한 시장공동체를 형성한 근대국가들은 시장을 확장성에 추동되어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투쟁이 제2차 세계대전을 야기하였다. 이 모든 것은 자본헤게모니가 일체의 다른 헤게모니를 추동하는 과정이 었다. 현재의 상황은 사회의 경제적 차원이 전세계로 확장되어 세계시장과 세계경제가 형성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사회의 정치적 차원, 즉, 국가는 여전히 과거의 국가형태가 지속되고 있다. 동 시에 국가와 권력은 경제에 대한 헤게모니를 끊임없이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차원의 확장성은 농업사회에서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농업사회에서는 권력과 폭력이 넓은 영역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의 경제적 차원은 그것에 의하여 규정되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보면 지배계급이 경제잉여를 취득하는 지역적 영역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농민들의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확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산업사회-화폐체제 는 그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회의 경제적 차원, 경제적 상호의존성, 경제적 헤게모니가 공동체를 확장하는 추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헤게모니는 이에 종속적이라는 것 이다. 그리고 이점이야말로 화폐체제의 본질적 성격이다. 동시에 화폐체제의 특수한 성격인 것이 다.

화폐체제는 권력적 폭력적 통합과는 상관없이 그것을 선도(先導)하여 공동체를 확장한다는 것 이다. 경제가 정치와 문화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고, 기업이 국가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고, 화폐가 폭력과 지식(眞), 도덕(善, 聖), 아름다움(美)에 대한 지배력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는 것 이다. 이것은 서구근대문명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