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눈으로 보는 문명사


제 3편 산업사회 화폐체제


제 8 장 화폐체제의 문제


3.8.1.산업사회-화폐체제의 문제
3.8.2. 공산주의의 도전
3.8.3.소련 사회주의의 실험: 현대의 법가(法家)와 화폐체제 의 철칙
3.8.4. 화폐체제의 초월


3.8.1.산업사회-화폐체제의 문제

농업사회-계급체제와 비교할 때, 산업사회-화폐체제는 인류역사의 위대한 진보였다. 인간은 물질적인 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동시에 화폐체제는 인류역사를 관통해 온 신분계급체제를 철폐해버렸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 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점을 달리하여 산업사회-화폐체제를 비판적 관점에 본다면 그 것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화폐체제는 경쟁과 대립과 적대를 그 본질적인 요소로 한다. 우리가 역사책을 들여다보면 투쟁과 전쟁의 기록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인류의 과거사회 가 모두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오랜 시기를 축약하기 때문이고, 투쟁과 전쟁이 역사적 사실로 선택되어 기록되기 때문이다(아무런 사건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 는 역사에 기록할 스토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사회-화폐체제에서는 경쟁과 대 립과 적대가 인간사회의 본질적 요소로 되었다. 인간을 신분적 계급에서 해방해 준 화 폐체제가 그 대신 강요하는 운명은 경쟁과 대립이다. 자본주의는 경쟁이야말로 발전을 가져오는 것으로 찬양되었다. 나아가 개인과 개인, 기업과 기업,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 가 바로 경쟁과 대립을 그 본질적 요소로 한다. 그러나 경쟁과 투쟁이 전체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은 허위이다. 인간의 사회는 일정한 수준에서의 최소한의 연대가 보장되 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필요한 최소한의 연대의 수준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조직의 행동은 그 반대의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화폐체제는 심각한 불평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신분계급체제에서의 불평등의 문제는 바로 신분계급의 문제였다. 화폐체제에서의 불평등의 문제는 경제적 차원의 불 평등이다. 화폐체제에서의 인간의 삶은 화폐소득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폐소득 을 얻지 못한다면 굶어죽는 것을 의미한다. 화폐소득의 수준이 인간의 물질적 삶의 수 준, 나아가 인간의 삶 전부를 좌우하는 것이다.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의 사회에서 화폐 소득은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하나의 국가 내부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세계전체로 볼 때 화폐체 제는 부국과 빈국의 불평등 구조를 야기한다. 세계적 경쟁에서 모든 국가가 승리할 수 는 없는 것이다. 국내적 국제적 불평등은 화폐체제의 경쟁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도 출되는 결과인 것이다.

세째, 화폐체제는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화폐체제에서 개인의 생존은 화 폐소득에 의하여 결정된다. 화폐소득은 무엇인가 소유하거나 생산하여 다른 사람에게 판매할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한 유효수요(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려는 수요)가 있을 때에 가능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다 다른 사람들의 유효수요를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아무 것도 판매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가령 여러 사람이 열심 히 노력하여 장난감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중에서 가장 우월한 사람만이 팔 수 있고 나머지는 팔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폐체제에서 실업은 필연적이다. 실업이 없는 화폐체제는 없다. 실업은 신분계급체제에서는 중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케인즈는 국가 가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처방을 하였다. 그러나 경제가 세계화될 때에는 이러한 처방 은 전혀 효력이 없다.

네째, 격심한 경제변동의 문제이다. 산업사회-화폐체제는 농업사회와는 달리 경제가 격심한 변동성을 갖는다. 이러한 변동성은 대중의 삶과 공동체 전체에 심각하게 영향 을 미친다. 화폐에 의하여 결합되는 경제공동체(시장)는 기후와 자연적인 조건이 아니 라, 경제적 변화에 의하여 사람들의 삶을 한꺼번에 심각한 위협 속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경제침체와 공황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차원은 다른 차원에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령 국민의 경제적 삶이 위기에 처한다면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라도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경제를 통제하지 못했으며 경제학 은 대체로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다섯째,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의 문제이다. 화폐체제는 인간을 신분적 구속에서 해방 시켰지만, 동시에 인간을 원자적인 개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개인은 자신의 소 유에 의지하는 세속화된 물질적인 개인이다. 여기에는 인간을 사회적 연대로 통합하는 정감적 유대가 없다. 근대에는 사회적 연대 없이도 인간과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것 으로 간주되었다. 사회적 연대나 도덕은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 도달한 다음에 논 의될 문제였다. 그러나 풍요가 연대적인 공동체를 생성하는 것은 아니다. 정반대로 연 대적인 공동체에서만 의미있는 풍요가 가능한 것이다. 산업사회-화폐체제는 이와는 정 반대의 의식과 현실을 창조하였다. 실로 산업사회-화폐체제는 예수, 석가, 공자 등 인 류의 성인이 주장한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신념과 현실인 것이다. 예수가 그 3년 의 활동기간 중 유일하게 분노한 것은 성전 앞에서 환전상(換錢商)에게 채찍을 휘두를 때이다. 화폐체제는 바로 환전상이 주도하는 체제인 것이다. 어떠한 기독교도도 화폐체 제가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체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오늘 의 신도들로부터 배신당했다. 석가나 마호멧이나 공자도 욕망과 상인문명을 부정하였 다. 그렇지만 그들도 오늘의 신도들로부터 배신당했다.

여섯째, 전쟁의 문제이다. 전쟁은 산업사회 이전에도 있어 왔던 문제이다. 그러나 산업사회-화폐체제에서는 국가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전쟁의 유발하는 성격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근대세계의 전쟁은 전국민이 참가하고 전국민에게 피해를 미친다. 나아 가 근대세계의 전쟁은 무기의 극단적인 발전에 의하여 지구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상 황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인류역사에서 초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제 전쟁은 인류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일곱째, 환경파괴의 문제이다. 산업사회-화폐체제는 자연의 극복과 지배를 문명의 징표로 삼았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산업사회-화폐체제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향으로의 극단적인 발전은 마침내 지구 전체 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것은 곧 자연의 일부인 인류, 자연과 연대관 계에 있는 인류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과거에도 환경파괴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구의 한정된 지역에 국한되는 규모였다. 서구인들이 남북아메 리카로 이주하면서 함께 간 병균과 그들이 일으킨 생태적 변화는 저항력이 없던 그곳 원주민을 거의 전멸시키는 상황을 야기하였다. 이처럼 근대문명은 그 기원에서부터 인 류의 생태계를 파괴하였다. 이제는 인류 전체가 남북아메리카의 원주민과 같은 신세가 될 정도로 지구전체의 환경을 파괴하는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

여덟째, 인구의 문제이다. 근대사회로 전환하면서 인구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근대이전의 사회에서의 인구의 변화는 거의 정체상태였 다. 예수 이후의 인구동태는 1650년, 200년, 100년, 40년의 간격으로 두배로 증가하여 왔다. 앞으로 2025년의 세계인구는 76억에서 146억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구의 증가는 인간사회의 모든 점을 변화시킨다. 가장 근원적인 변화는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대립과 적대가 미치는 영향이 그 승패와는 상관없이 전체의 파멸로 바꾼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립과 적대가 상대방만이 아니라 그 무대(사회, 자연, 지 구)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좁은 지구 위에서 함께 공생할 수 있는 길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못하다면 가장 약자부터 희생될 것이다. 결국 강자도 온전 하지 못할 것이다.

3.8.2 공산주의의 도전

무엇을 비판한다는 것은 사실은 어떤 가치기준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사 회-화폐체제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은 항상 어떤 이상(理想)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가령 앞에서 본대로 중국의 유가, 묵가, 도가, 법가의 사상은 어떤 이상(가치기준)을 전제로 신분계급체제를 비판하는 사상이었다. 그런데 산업사회-화폐 체제에 대한 한 유력한 비판이 서구적 토양에서 제기됨으로써, 그 이후 화폐체제에 대 한 다른 비판의식을 묶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였다.

마르크스는 산업사회-화폐체제를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계급체제의 하나로 규 정하였다. 그의 이상은 계급없는 사회였다. 화폐체제도 계급체제이며, 계급의 문제야말 로 화폐체제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계급이 철폐되면 일체의 문제는 해결 된다는 것이다. 그가 규정한 계급의 핵심적 요소는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였다. 자본의 사적 소유야말로 모든 문제의 핵심적 고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화폐체제(자본주의)는 계급투쟁에 의하여 붕괴가 임박한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가 살았던 시 대적 상황에 연유하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부르조아혁명과 마찬가지로 프로레타 리아트 혁명이 임박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주1)

그리하여 근대 이후 화폐체제의 비판자들과 이상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에 헌신하 였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자신이 자본주의로 규정한 화폐체제에 대한 비판의 이론이었 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규정하고 정의한 자본주의체제의 계급을 철폐한 소련사회주의 체제는 '화폐를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하는 전혀 다른 문제에 부딪쳤다. 마르크스주의 적 계급을 철폐한다는 것은 동시에 화폐체제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 라서 스탈린은 화폐체제를 대체하는 대안체제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자 본주의 비판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자본가계급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본의 사적 소유를 철폐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사 적 소유를 철폐한다는 것은 화폐의 매개에 의하여 자본을 배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재는 화폐적 매매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자본재시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자본을 배분할 것인가? 나아가 자본재시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소비재 시장의 화폐 역시 화폐의 본질적 의미를 상실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품에 대하여 화 폐적으로 측정되는 공급가격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것은 화폐체제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무엇으로 화폐체제를 대 체할 것인가?

쏘련사회주의는 '권력과 법'으로 화폐체제를 대체하려고 하였다. 자본배분에서 화 폐체제를 제거하고 권력체제(관료조직)에 의하여 실물자본을 물량적(物量的) 기준으로 배분하였다. 그에 따라 화폐체제는 사실상 배제되었다. 가격은 수요공급을 반영하는 것 이 아니고, 자본재는 화폐로 구입되는 것이 아니며, 경제는 화폐가격에 의하여 조절되 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경제는 권력에 의하여 규정되었다. 그것은 계획경제라는 이름 으로 이데올로기화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련사회주의는 실패하였다.

3.8.3.소련 사회주의의 실험:
현대의 법가(法家)와 화폐체제의 철칙

이러한 실패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 나 그 본질적 의미는 단 한가지이다. 그것은 화폐체제의 철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다. 마치 농업사회에서 신분계급체제가 철칙이듯이 산업사회에서는 화폐체제가 철칙 이다. 산업사회에서 화폐체제를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련사회주의의 시도는 농업사회-신분계급체제에 대한 중국 법가의 시도와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중국의 법가는 신분계급체제를 권력과 법으로 대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마 찬가지로 소련사회주의는 화폐체제를 권력과 법으로 대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한 것이 다. 그 방식도 거의 같았다. 경제를 계획하고 법에 의하여 인간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억압한 점에서도 같다. 일시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도 같다. 다만 하 나의 차이가 있다면 소련사회주의는 인간의 집합표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소련이 다른 이론들을 억압한 것과 법 가가 지식인들을 산채로 땅에 매장했다는 유사성에 비하면 큰 차이가 아니다. 결국 권 력과 법은 신분계급체제보다 열등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권력과 법은 화폐체제보다 열등한 것이고, 구시대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입증한 것이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에로 의 전환이다. 화폐가 권력보다 우월하였기 때문에 중세사회는 붕괴되고 화폐체제로 전 환된 것이다. 소련사회주의는 이러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마르크스 이론 자체에 있었다. 그의 이론체계에서는 권력과 정치의 차원은 경제적 차원에 종속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사적 소유가 철폐되면 권력은 소멸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사적 소유가 철폐되자(즉 화폐체제가 폐지 되자) 화폐를 대체하기 위하여 권력은 더욱 확장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화폐체 제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신도들은 권력의 확장을 권력이 소멸하는 전단계라고 강변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화폐체제의 철칙이 얼마나 강고한 것인가를 발견한다. 화폐야말로 과거의 신분계급체제를 철폐해버린 것이며 동시에 근대의 시장체제, 국민국가, 물질문 명의 근원이다. 근대사회는 마르크스가 규정하였듯이 신분계급체제의 연장인 새로운 계급체제로는 해명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이 화폐체제의 철칙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오류는 과거의 범주를 근대사회에 그대로 적용한 데에 있었다. 그 의 국가관이나 국가소멸론 역시 신분계급체제의 계급국가를 연장한 것이다. 근대의 새 로운 계급(그것을 계급이라고 한다면)은 농업사회의 신분계급체제와는 다른 것이고, '화폐가 만든 계급'인 것이다. 신분계급은 화폐가 부재한데서 형성된 것이고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화폐가 만든 것이다. 계급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화폐의 문 제는 여전히 남는다(소련사회주의가 이 경우이다). 반대로 화폐의 문제를 해결하면 계 급의 문제는 자연적으로 해결된다. 즉, 근대체제의 본질은 화폐체제이다. 산업사회가 유지되는 한, 나아가 비농업의 교환경제가 일반적인 한, 화폐체제는 철칙이다. 절대로 우리는 화폐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소련 사회주의의 70년의 실험은 참으로 많은 희 생을 지불하고 화폐체제의 철칙을 확인한 것이다.

화폐체제의 철칙이야말로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의 이상주의에 대한 현실의 장벽이 다. 아무리 지고한 이상이라고 할지라도 화폐체제의 철칙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관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근대의 이상주의자들은 이러 한 화폐체제의 철칙을 인식하지 못했다. 에밀 졸라는 화폐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 고 단정지었다. 로버트 오웬은 노동증서로 화폐를 대체하려고 시도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역시 가치법칙에 의하여 규정되는 종이표로 화폐를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하였다. 레닌도 러시아는 장래에 화폐가 없어질 것으로 믿었다. 심지어 케인즈도 러시아에서 그러한 방향으로의 위대한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였 다. 이러한 모든 이상주의자들에게 화폐체제의 철칙은 뚜렷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어떠한 이상주의도 화폐체제를 긍정하는 한 그것은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폐체제가 철칙이라고 하여 자본주의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3.8.4. 화폐체제의 초월

사람들은 근대가 마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의 투쟁 끝에 자본주의가 승 리한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이다. 근대에는 화폐체제가 있을 뿐이며 화폐체제에 대한 저항이 시도되었다가 실패한 것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라는 구분은 근대사회에 대한 잘못된 집합표상이다. 자본주의 와 사회주의의 개념은 중대한 오해를 야기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대립개념은 마치 산업사회에서 화폐체제를 부정할 수 있는 것같은 오해를 야기한다. 자본주의는 화폐체제이다. 그러나 화폐체제는 반드시 자본주의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서구근대적인 화폐체제, 특수한 화폐체제가 바로 자본주의인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를 재정의(再定義)한다. 즉 특수한 화폐체제, 서구근대적인 화폐체제가 자본주의인 것 이다. 따라서 화폐체제가 철칙이라고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지양될 수 있다.

'서구근대적인 화폐체제(자본주의)'는 앞에서 본대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불평등의 문제, 경제적 침체의 문제, 전쟁의 문제, 환경파괴의 문제, 인구의 문제, 경쟁 의 문제, 물질주의의 문제를 들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현재에 이르러서 인류가 회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이제까지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모든 문제는 자 본주의의 문제이며 사회주의로 이행하면 모두다 해결되는 문제인 것처럼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개념의 함정이다. 사회주의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아무것 도 해결할 수 없다. 화폐체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이지만 그것은 화폐체제 자체보다 더욱 열등한 형태로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악화시킬지언정 해결하지는 못한 다.

여기에 오늘날 인류의 부딪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것은 오늘날 심각 한 인류적 문제들은 모두다 근원적으로 화폐체제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화 폐체제는 벗어날 수 없는 철칙이다. 문제는 화폐체제를 부정하지 않고, 서구근대적인 화폐체제(자본주의)를 지양(止揚)할 수 있는 보다 고양된 화폐체제를 창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화폐체제의 초월'이라고 부를 것이다.

역사는 엄중한 것이다. 역사는 인간이 노력하지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진보하는 그 러한 고마운 것이 아니다. 만약 역사가 그렇게 필연적으로 진보하는 것이라면 로마는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로의 후퇴도 없었을 것이다. 법가, 묵가, 도가의 사람들이 한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자가 그렇게 노심초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가 희생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석가가 왕궁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법칙적으로 진 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넓힐 수 있을 때 창조되는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보화 사회, 탈산업사회, 자본주의 이후의 사 회, 포스트 모던 사회와 같은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예언들은 국민국가 쇠퇴하고 공적(公的) 책임을 지지 않는 초국적자본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그 러한 사회를 마치 다음 단계의 진보된 세계인양 인류에게 선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실질적 내용은 문명의 쇠퇴이고 세계의 혼란이다.

이러한 모든 사회에서도 화폐체제의 철칙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사회 도 교환경제임에는 전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들이 마치 모든 문제를 해 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여전히 자본주의 개념의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 다. 그러한 사회는 자본주의가 아니고 따라서 위와 같은 문제들은 해결될 것같은 이미 지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다. 마치 신분계급체제에서 왕조가 바뀌 거나 정복국가가 바뀌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신분계급체제 의 철칙이 지배하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역사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 해답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이 것이 다음 편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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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근대영국에서 최초로 노동조합이 탄생할 때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노 동운동의 목표는 결코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로버트 오웬이 여러 곳에서 자신의 사회적 실험을 시도하고 영국으로 귀국한 1830년대에 영국 노동자 계급 사이에 는 혁명적 분위기 넘쳐흐르고 있었다. 노동조합이 사회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산업을 운영해야 한다는 이념을 기반으로 당시 영국에서 80만의 회원을 가진 노동조합을 조 직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조합의 전국대연합은 정부의 극심한 탄압으로 바로 붕괴하였 지만 연이어 챠티스트 운동이 발생하였다. 챠티스트운동은 35만명의 거대한 청중을 모 은 집회를 개최할 정도였다. 1848년 챠티스트 운동이 추진한 청원서는 당시 영국의 전 체 1,900만 인구 중에서 570만명의 서명을 받을 정도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1789년 프 랑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종식시키는 새로운 혁명과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1871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제2제정을 타도하고 파리꼼뮨이 성립되었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의 프로레타리아 독재권력이었다. 상비군은 인민군으로 대체되고 경찰의 정치권력은 박탈되고 모든 관리가 선거민에 대 해 책임을 지고 기업과 경제는 생산협동조합과 소비협동조합으로 대체되었다. 파리 꼼 뮨은 2개월 반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프랑스혁명으로부터 불과 8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에서 마르크스가 혁명이 임박했다고 믿지 않았겠는 가?

마르크스의 신도들은 또한 파리꼼뮨 이후 불과 50여년 만에 러시아에서 현실로 드 러난 사회주의를 보았다. 실로 자본주의 화폐체제의 붕괴는 눈 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 였다. 그러나 화폐체제는 그렇게 쉽게 붕괴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