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눈으로 보는 문명사


제4 편 문화사회 - 연대체제


제 1 장 새로운 현실

4.1.1. 지식정보혁명에 의한 화폐체제의 강화
4.1.2. 화폐체제의 전면화(全面化)
4.1.3. 시장의 확장(擴張)과 심화(深化) : 세계시장
4.1.4. 문명의 쇠퇴
4.1.5.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의 혁신




4.1.1. 지식정보혁명에 의한 화폐체제의 강화

오늘날 중대한 기술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소위 지식정보혁명이 그것이다. 최근에 컴퓨터와 전자기적 통신(tele-communication)의 기술이 급속히 발전으로, 다량의 지식 과 정보를 처리하고 그것을 다양한 주체들 상호간에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정보 혁명은 구체적으로 두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 지식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사회가 지극히 복잡화해졌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보 자료를 전자기적 자료로 전환함으로써 지식정보를 축적, 편집, 가공하는 등 이를 처리 할 수 있는 능력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지식정보가 사회적으로 전략적 자산이 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지극히 복잡한 사회에서 지식정보 없이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권력, 법률, 자본, 노동, 등 사회의 어떠한 차원에서도 지식정보는 결 정적인 자산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지식정보혁명과 관련하여 많은 미래예측들이 행해지고 있으며 그것이 사람 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지식정보혁명이 전혀 새로운 사회, 또는 장미빛 낙원을 도 래하게 할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에게 환상을 주는 거짓말이다. 주1)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하여 어떻게 예측하고 어떠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 더라도, 한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화폐체제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소위 정보화 사회는 화폐체제가 아닌 다른 체제인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화폐체제이다. 미래의 국가는 오늘날 국가와 전혀 다른 것인가? 미래의 기업은 오늘 의 기업과 전혀 다른가? 인간이 소득을 얻고 살아가는 방식이 오늘날과 전혀 다른가? 그렇지 않다. 전혀 다르지 않다. 여전히 화폐체제인 것이다. 소위 지식정보사회란 체제 적으로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오히려 화폐체제의 병리가 더욱 심화된 사회인 것이 다.

서구근대체제를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는 아직 인류의 역사적 상상력 안에 나타나 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소설이나 미래소설에서도 정치경제체 제는 여전히 근대체제이다(심지어 왕정체제인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근대체제(화폐체 제)가 지배하는 한 인간은 여전히 화폐소득을 얻어야 생존할 수 있으며, 화폐를 추구하 는 행동이 모든 것을 규정하고, 화폐가 없는 사람은 굶어죽는다. 지식정보혁명은 오히 려 화폐체제를 강화하고 화폐체제의 병리를 더욱 극대화시킨다. 새로운 사회에서는 사 회적 패자(敗者)가 오히려 증대할 것이다. 소유만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또 하나의 요소 가 수많은 사람들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정보혁명으로 장미빛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은 모두다 환상으로 대중을 마비시키려는 자들이다.

화폐체제에서는 일체의 기술혁신이 더 많은 이윤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 고 있다. 지식정보기술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기술은 화폐와 자본 힘을 강화하고 투 기화한다. 정보화한다는 것은 투기화한다는 것이다. 물질적 생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 순히 안다는 것(정보를 획득하는 것)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적어도 산업사회에서 자본가는 물질적 생산으로 사회에 기여함으로써 부(富)를 축적하 였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에서는 물질적 생산을 통한 기여가 전혀 없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이전시키는 것이 일반화되는 것이다.

초기호경제(超記號經濟)라는 멋있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제는 화폐를 실물로부터 분 리시키는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 사회에 전혀 기여함이 없이 순전히 정보에 의하여 부 가 이전되고 축적되는 경제인 것이다. 이것은 소위 카지노 자본주의(casino capitalism) 가 일반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정보혁명이 가장 먼저 변화시킨 현실은 자본주의 금융체제를 세계화한 것이다. 그리고 전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함으로써 화폐체 제를 더욱 강화한 것이다.

4.1.2. 화폐체제의 전면화(全面化)

사회체제는 기술(技術)에 의하여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정보기술이 자동적으로 인류에게 새로운 사회를 선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술이 체제를 규정하는 것이 아 니라, 체제(화폐체제)가 기술을 규정하는 것이다. 로마나 중국에서 화폐와 교역은 체제 를 변혁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부(富)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였다. 마찬가지 로 새로운 기술혁신 역시 기존의 화폐체제를 확장심화시키고, 기존의 강자(强者)를 더 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은 <제3의 물결>과 같은 전혀 새로운 사회를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기존의 화폐체제를 전면화(全面化)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화폐체제가 완전하 지 못했던 분야까지 화폐체제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서구근대체제의 국가간체제에서 화폐체제가 완전하지 못했던 영역은 두가지가 있 다. 하나는 정치와 문화등 비경제적 분야이고 둘은 국가와 국가의 관계이다. 이제 이러 한 분야까지 시장화하고 화폐화하는 것이다. 정치나 문화의 영역까지 화폐체제가 지배 하게 된다. 이것은 정치조직(국가 또는 지방자치체)가 기업과 거의 유사하게 행동하게 되고, 반대로 거대기업이 권력을 초월하여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이다.주2) 또한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정치외교적 관계가 아니라 시장관계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전세계가 하나의 단일한 세계시장이 됨으로써, 국가와 국가의 정치적 관계 가 점차로 무의미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서구근대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중대한 변화이다. 근대국가가 약화되고 전세계가 단일한 세계시장이 되며, 정치경제문화의 분 화가 제거되고 일체가 시장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서구근대체제의 껍질이 유지되면서 그 내용이 상당하게 변하고 있는 새로운 현실의 핵심은 <세계시장> 또는 <화폐체제의 전면화>라고 할 수 있다. 서구근대체제는 정치 공동체, 경제공동체, 문화공동체가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근대국가의 세측면을 형 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는 국가와 국가의 관계, 즉 국제적 체제였다. 새로운 현실 에서도 형식적으로는 이러한 체제양식이 그대로 존속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국가 가 약화되어 전세계가 하나의 <세계시장>으로 변화하고, 정치나 문화의 성격도 시장 적 화폐적 성격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시장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낡은 근대사의 마지막 장(章)이다. 근대사 전체 를 관통하는 일반적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시장의 확대(擴大)와 심화(深化)이다. 개인 사회 국가, 정치 경제 문화가 모두 시장에 매몰(埋沒)되는 것이다. 처음의 시장확대는 노예무역과 약탈을 통하여 비교역권의 문명을 교역권으로 끌어들였다. 그 다음은 제국 주의적 시장확대였다. 냉전시대에는 패권주의적 시장으로 심화되었다. 이제 냉전이 끝 나자 국가를 초월하고 사회의 다른 부문(정치, 문화)까지 모조리 끌어들여, 전세계와 사회의 모든 부문이 단일한 하나의 시장(세계시장)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 은 개인, 사회, 국가, 민족의 운명이 세계시장이라는 화폐의 메카니즘에 던져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장이라는 메카니즘은 어떠한 가치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시장은 폴라니 가 말하듯이 <악마의 맷돌>이다. 세계시장은 소수의 승자가 전세계를 착취하는 메카 니즘인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4.1.3. 시장의 확장(擴張)과 심화(深化) : 세계시장

오늘의 현실은 시장이 공간적으로 확장되어 전세계가 단일 시장이 되고 있다. 시장 이 사회적으로 심화되어 사회의 모든 분야를 시장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서구근대체제에서는 화폐의 힘 이외에 분명히 독립적이고 오히려 주도 적인 역할을 한 폭력(군사력)이 있었다. 또한 지식은 시장의 상품이라기 보다는 (대학 의 권위에서 보는 것처럼) 비시장적이었다. 사실 대학제도는 근대제도가 아니라 중세제 도이다. 한편 지구 공간을 평면적으로 분할한 근대국민국가가 이러한 폭력과 지식의 시장화를 막고 있었다. 말하자면 근대국민국가를 매개로 하여 폭력헤게모니와 지식헤 게모니 그리고 화폐헤게모니의 세 힘이 불안정한 균형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런데 오늘날 현실에 이르러 이러한 균형이 붕괴하고 화폐와 시장이 사회의 전분야와 지구의 전공간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세가지 과정이 합쳐져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로, 산업사회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으며, 둘째로 폭력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고, 세째로 지식정보혁명이 화폐와 시장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가 <세계시장>인 것이다.

첫째로, 선진산업사회 자체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생산성은 증가하고 있으며 시장은 확대되고 있다. 지식정보혁명은 공업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앞으로는 로봇을 사용하는 무인공장으로의 길이 열려 있다. 이러한 생산성의 향상은 생산된 상 품의 판매영역으로서 이제 어떠한 국가도 너무 작게 되었다. 대부분의 생산은 전세계 를 대상으로 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생산력이 확장되었다. 따라서 국가시장은 경제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다국적기업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다국적기업 내지 초국적기업으로서는 근대의 국민국가적 영역이란 이제 질곡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편 경제적 헤게모니에 있어서도 범위(範圍)의 경제가 지배하게 되었다. 동질적인 시 장이 더 큰 지역이 다른 지역에 대하여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다. 미국이 다른 국가 에 대하여 경제적 압력(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미국시장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시장을 놓칠 수 없는 작은 국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힘이 세계시장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폭력보다는 경제적인 힘을 추구하고 있다. 근대사회를 이끌어 온 추진력의 하 나는 질서폭력의 압도적 우월성이었다. 그것은 징기스칸의 군대보다 더욱 위력적으로 전세계를 휩쓸었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폭력의 압도적 우월성은 사라지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 베트남에서 패배하였고, 소련도 아프카니스탄에서 패배하였다. 근대를 추진해 온 질서폭력의 압도적 우월성이 사라진 것이다. 그럼으로써 질서폭력(군대)의 경제에 대한 주동성(主動性)이 소멸하였다. 이제 경제적 문제에 대하여 폭력이 도움을 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국가들은 폭력보다는 경제적 힘을 추구하게 되었다. 군사적 경쟁보다는 경제적 경쟁이 주요한 문제가 된 것이다. 경제적 헤게모니가 폭력 헤게모니보다 우월하고 보편적인 헤게모니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나 군사가 아니 라 경제가 모든 것을 규정하게 되었다.

세째, 지식정보혁명은 사회의 각 분야--정치 문화분야까지--를 화폐화하고 시장화 하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또한 지식정보혁명은 전세계를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영역으 로 묶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지식은 고매한 상아탑의 진리가 아니라, 기술혁신 이나 노동의 질과 연결됨으로써, 즉각적으로 그리고 항상적으로 지식은 경제적 시장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일체의 생산과 판매가 지식정보와 관련되면서, 모든 지식정보도 시장과 일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식정보혁명은 전세계를 단일한 거래의 장(場) 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였다. 전세계적으로 연결된 자본거래의 망이 그것을 상징한다. 결국 지식정보혁명은 시장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수단방법을 제공한 것이 다.

그 종합적 결과가 <시장의 세계화> 내지 <세계시장>이다. 이것은 근대사 이래로 계속되어 온 시장의 확대심화의 마지막 완결편이다. 국가를 초월하여 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고 있다. 이것은 근대체제의 전제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근대체제에서는 동질적인 시장이 국가영역으로 한정되고, 국가간의 교역은 국가와 국가라는 두개의 주체간의 무역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가 무너진 것이다. 금융체제 는 세계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심지어는 어떠한 국가도 통제하지 못하는 금융시장 (가령 유러달러시장)이 생성되었다. 거대 다국적기업은 대부분의 국가보다도 자산규모 나 매출규모가 커졌다. 오늘날 생산은 전세계의 수요를 전제로 이루어지고, 수요 역시 전세계의 공급을 전제로 하게 되었다. 세계는 경제전쟁 상태이고, 국제 경쟁력이라는 요소가 국가행동의 자유를 완전히 묶어버린다. 사회보장이나 경제적 평등이 국제경쟁 력을 해친다면 국가는 그러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환경문제는 생산과 소비에 비경제적인 제약을 가하고 있다. 시장은 본질적으로 국가의 보장에 의하여 성 립하고 국가에 의하여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시장은 국가를 초월하여 세계화하였으며, 국가가 조절할 수 없는 무한경쟁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시장의 세계화 현상에 대하여, 군사력이 지배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경제력이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규정한다. 이것은 반쪽의 진리이다. 질서폭력 의 우월성이 붕괴한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체제가 무기력하게 유지되 면서, 시장의 논리가 사실상 국민국가를 초월하여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 나 이것은 중대한 모순이다. 권력에 의하여 조절되지 않는 시장은 폭력만 낳기 때문이 다.

세계시장이란 그 자체가 무정부적(無政府的)인 것이다. 세계시장은 국내적 국제적 불평등을 더욱 확대시킬 것이다. 시장질서는 정치질서보다 더욱 불평등을 확대하기 때 문이다. 근대는 시장이 야기하는 불평등을 국가가 조절해 왔다. 그런데 시장이 국가를 초월함으로써 그러한 조절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로널드 레이건은 노골적으로 <빈곤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선언해 버렸다. 미국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경제조절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시장의 세계화와 국가의 약화는 무 질서폭력이 만연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빈곤한 사람들과 가난한 국가는 세계시장 이 그들을 구제하지 못하고 질서폭력의 쇠퇴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폭력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세계시장은 정의도 평화도 보장하지 않는다.

4.1.4. 문명의 쇠퇴

새로운 기술과 시장의 세계화는 장미빛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쇠퇴 하게 할 것이다. 이제까지 근대적 사고방식에서는 기술혁신은 곧 진보였다. 그러나 원 자폭탄의 발명이 진보가 아니듯이, 환경파괴기술의 발전이 진보가 아니듯이, 지식정보 혁명도 사회적 진보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화폐체제 의 철칙>을 지양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폐체제의 낡은 체제는 여전히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로 유지되고, 새로운 힘은 곧 사회와 세계와 자연 에 대한 파괴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 질서폭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질서폭력이 증대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서구근대체제와 같이 압도적 질서폭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질서, 압도적 질서폭 력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던 질서는 이제 붕괴하는 것이다. 세계시장이 됨으로써 개별 의 국민국가는 시장을 조절하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세계시장을 조절할 수 있 는 주체는 없다. 여기에 산업사회의 쇠퇴에 따라서 고용은 점차 악화될 것이다. 새로운 기술혁신은 고용을 확장하지 못한다. 이와 함께 새로운 기술혁신, 지식정보혁명만이 아 니라 앞으로 가능한 모든 기술혁신은 그 많은 가능성 중에서 화폐체제의 철칙에 부합 하는 가능성만 현실화한다. 이것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장에 내팽개쳐 지는 인간을 양산할 것이다. 국제적 국내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에서 국가간의 경쟁과 대립은 더욱 폭발적으로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존을 위 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문명쇠퇴에의 길이다.

서구국가(유럽과 미국)들은 그럼에도 마치 유일한 진보와 평화의 길인양 <세계시장 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전세계를 과거의 국내시장과 같이 동질적인 시장으로 만들 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경제적 강자인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기 때문이다. 로마시(미국 유럽)는 로마제국 전체(전세계)의 생존을 목표로 하지 않게 되었으며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공산주의와 대립할 때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 전체의 공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제는 그렇게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리하여 서구제국이 가장 이익이 되는 세계질서를 국제조약에 의하여 창출하려 는 정책이 <세계시장화정책>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붕괴한다면 로마시라고 안전할 수는 없다.

세계는 <작은 연못>이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가 부딪치고 있는 현실이다. 서구적 질서는 이제 <보편적 질서>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새로운 <보편적 질서>를 찾 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 결과로 귀착할 것인가? 우리는 이에 관해 <시장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다음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4.1.5.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의 혁신

이제까지 우리는 지식정보혁명과 화폐체제의 전면화로서 현실을 규정하였다. 그것 은 새로운 기술과 근대서구체제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기술혁명 에는 전혀 다른 성격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지식정보혁명은 인류의 역사에서 그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렵다. 굳이 유사한 예를 든다면 인쇄술이다. 인쇄술에 의한 출판의 대중화는 중대한 사회적 변혁을 가져왔다. 그것은 서구 중세 천년을 규정하였던 정신적 지배를 전복하였다. 마틴 루터는 인류 최 초의 베스트 셀러 저술가가 되었다. 가톨릭에 대항하는 그의 저술은 베스트셀러가 되 어 수많은 대중의 의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럼으로써 그는 로마 가톨릭의 권위에 대항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인쇄술과 대중출판이 가능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름없이 처 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지식정보혁명의 성격은 이와 유사한 것이다.

사회에는 세개의 차원이 있다. 정치적 차원의 매개양식은 권력과 법률이고, 경제적 차원의 매개양식은 자본과 가치매체(화폐)이고, 문화적 차원의 매개양식은 집합표상(의 식)과 커뮤니케이션이다. 지식정보혁명은 바로 문화적 차원,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 차원의 거대한 혁신인 것이다. 근대화폐체제에로의 전환이 자본과 가치매체(경제적 차 원)의 대변혁이었다면, 지식정보혁명은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문화적 차원)의 대변 혁인 것이다.

농업사회는 정치적 매개양식(권력과 법률)에 의하여 사회를 통합하였다. 토지자본은 경제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권력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즉,토지는 권력헤게모 니의 자산이었다. 이러한 사회에 대하여 본질적인 변혁을 일으킨 것은 자본과 가치매 체의 혁명이었다. 화폐(가치매체)가 인간을 사회적으로 통합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됨으 로써, 신분계급체제는 붕괴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근대사회의 출현이었다. 우리는 이것 을 제3편에서 논의하였다.

지식정보혁명은 이와는 다른 차원의 혁신이다. 그것은 사회의 문화적 차원(집합표 상과 커뮤니케이션의 차원)에 있어서의 거대한 혁신이다. 지식이 사회의 결정적인 요소 로 등장함으로써 경제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한편 정보기술은 화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결합하고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보기술은 인간을 사회적 으로 통합하는 새로운 방식이며 화폐보다는 발전된 방식이 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지식정보혁명의 체제적 혁신성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화폐체제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제까지 집합표상은 다만 인간의 의식이었고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한 의사소통이었 다. 지식(집합표상의 한 형태)은 인간의 의식에 저장되는 것으로서, 지식이란 결국 인 간이었다. 지식정보가 기재된 책이나 서류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인간에 의하여 읽혀져 서 인간 의식의 일부를 구성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식혁명에 의하여 이제 지식은 인간 외부에 있는 사회적 자산이 된다. 지식의 단순한 저장은 인간보다 컴퓨터가 훨씬 뛰어나다. 인간이 이러한 지식을 창조하고 사 용하는 문제야말로 사회의 주요한 문제가 된 것이다.

이제까지 커뮤니케이션은 문자와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이었다. 근대사회에서는 신 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젼과 같은 대중커뮤니케이션(매스콤)이었다. 그것은 대중에 대한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정보통신혁명은 이러한 지식정보를 인간의 의식과 분리 시켜 인간 외부에 독립된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모든 개 인들에게 언제든지 제공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개인은 사회전체, 세계전체와 항상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통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이 있었다. 그런데 정보통신혁명은 지식정보의 통신네트워크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일상적인 토대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류는 처음으로 사회를 형성 함에 있어서 지식정보의 통신네트워크라는 문화적 토대를 기반으로 할 수 있게 되었 다. 화폐는 그 당사자만을 연결한다. 이에 대하여 정보통신혁명은 만인(萬人)과 만인을 연결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 차원의 혁신, 이것이 지식 정보혁명의 본질이다.

그리하여 지식정보혁명의 진정한 의미는 두가지이다. 첫째는 사회의 경제적 차원보 다 문화적 차원의 비중이 증대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은 산업상의 혁명(경제적 차 원)이 아니라 사회통합방식을 혁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경 제적 기술혁신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기술혁신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식정보의 새로운 기술혁신은 서구근대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와 체제를 창조할 수 있 다.

우리는 새로운 현실에 터잡아 새로운 체제를 모색할 것이다. 그 단초(端初)를 <문 화사회-연대체제>라는 이름으로 제3장 내지 제5장에서 논의하고, 새로운 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모색을 제5편 내지 제7편에서 논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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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지식정보혁명에 의하여 도래하는 미래 사회에 관한 많은 예측들이 행해지고 있다. 미래사회는 지식정보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 예측들은 사람들에게 여러가 지 영향을 미친다. 첫째로, 미래에 도래하는 사회가 장미빛 낙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들에게 환상을 품게 하고 있다. 둘째, 그러한 사회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는 것이 다. 이것은 산업사회와 비교하여 지식정보사회를 그럴듯하게 형상화함으로써, 그러한 사회가 다음 사회의 모습이라는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위장(僞裝)이다. 세째, 새로운 사회의 도래가 필연적이므로 그러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이나 조직이나 국가는 도태될 것이라고 위협한다. 그리하여 미래에 대한 수많은 예측서들은 새로운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 그것은 환상으로 인간들을 기만(欺瞞)하고 협 박함으로써 그러한 방향으로 인간의 행동을 유인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새로운 기술에 의하여 도래하는 미래사회의 의미에 대하여 가장 전형적인 설명이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다. 제1의 물결로서의 농업사회, 제2의 물결로서의 산업 사회에 이은 제3의 물결로서의 지식정보사회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그럴듯해 보 이지만 허위이며 오류이다. 첫째, 농업과 공업과 지식정보는 동일한 사회적 범주가 아 니다. 농업생산물과 공업생산물은 인간이 삶에 소비하는 물품이다. 그러나 지식정보는 우리의 삶에 소비하는 물품이 아니다. 지식정보는 인간과 인간이 결합하는 방식이지, 개인이 생활에 소비하는 물품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카테고리 미스(category mistake: 범주의 혼동: 제1권 참조)이다. 둘째, 인류의 역사가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그리고 다음에 지식정보사회로 이행한다는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다. 그러한 역사법 칙은 존재하지 않으며, 증명된 바 없다. 새째,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에로의 전환에는 체제의 전환이 선행했다. 우리가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신분계급체제에서 화폐체제 로 이행한 이후에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그 반대가 아니다. 즉 산업혁명이 일어난 다음 에 화폐체제로 전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우리는 단순화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산 업사회-화폐체제라는 이름으로 논의하였지만, 산업사회가 화폐체제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소위 지식정보사회가 새로운 사회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체제에는 전혀 변 함이 없다. 즉 전혀 새로운 사회가 아니다. 여전히 화폐체제인 것이다. 오히려 화폐체 제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식정보사회는 <제3의 물결>이 아니다. 그것은 화폐체제일 뿐이다. <제3의 물결>이라는 용어는 <추상(抽象)의 까르마(karma): 추상적 인 규정을 구체적 실재로 오인하게 함>를 안고 있다. 즉 그렇게 이름 붙임으로써 지식 정보사회가 전혀 새로운 사회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또한 필연적인 역사적 추세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적 사고방식에서 연유하는 이데올로기적 집합 표상이다.

주2) 국민국가가 약화하면 두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첫째는 지방자치단체 내지 작은 국가의 독립성이 강화되고 그것이 점차로 경제집단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전세계를 무대로 행동하게 되면 그것은 마치 기업처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주체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각국에서 강화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성공적인 지방자치단체들의 일반적 성격이다. 그들은 택스헤븐(세금 천국)을 만들고 다국적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발전된 자치단체로 찬양된다. 둘째로 국민국가가 약화하면서 상대적으로 다국적기업 내지 초국적기업의 영향력이 확대된다는 것이다. 이미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들보다 자본규모나 매출규모가 큰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들은 모국뿐 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국가에 대하여 강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국민국가가 약화 되는 현상이 지속되면 앞으로의 세계는 초국적자본이 지배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