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눈으로 보는 문명사


제4 편 문화사회 - 연대체제


제 2 장 시장의 평화

4.2.1. 세계시장과 그 문제
4.2.2. 그리이스.로마의 교훈
4.2.3. 19세기의 백년평화에 위장된 갈등
4.2.4. 시장의 평화와 화폐의 철칙
4.2.5. 승자의 역사, 패자의 역사
4.2.6. 진보의 종언: 근대를 넘어, 서구를 넘어




4.2.1. 세계시장과 시장의 평화에 은폐된 문제점

오늘날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서구제국이 추구하는 세계시장화 정책은 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시장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폭력을 배제 하고, 국가권력을 시장질서에 종속시키고, 경제력의 격차와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여(무 시하여), 전세계를 하나의 시장인 세계시장으로 편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말하면 화폐체제의 강화이다. 화폐와 자본이 일체의 헤게모니, 국가와 문화까지 지배하 는 것이다.

세계시장화 정책, 즉 <시장의 평화>는 두가지 기조(基調)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모든 국가를 개방시켜 세계를 하나의 시장질서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래된 서 구적 이상인 자유무역의 심화된 형태인 세계시장이다. 오직 노동만을 제외하고 일체의 것을 세계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둘째, 전세계를 법률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국가 들간의 합의(국제조약 : 가령, 우르과이 라운드)에 의하여 국가를 초월하는 국제법 질 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가 법률에 의하여 제국을 통합하였던 것과 유사하 다. 그런데 이 국제법은 바로 화폐질서를 그 내용으로 한다. 국제법이 보장하는 시장질 서에 의한 세계통합은 폭력을 배제한다는 의미에서 분명히 평화이다. 이것이 바로 <시 장의 평화>인 것이다.

시장의 평화는 근대체제를 진부(陳腐)하게 만들 것이다. 근대체제란 바로 국민국가 체제이고 산업사회이다. 그런데 시장의 평화는 국민국가와 산업사회를 초월하여 세계 시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국가들은 스스로가 합의한 국제법에 종속된다. 근대적 의미 의 주권은 점차로 좁아지고 약화되는 결과에 이르는 것이다. 그 결과 국가권력이 자국 국민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범위가 작아지게 된다. 근대국가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 는 것이다. 유럽공동체는 이미 근대국가를 초월하는 경제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 한 세계적 통합은 지식정보혁명이라는 새로운 기술혁신을 토대로 하여 추진되고 있다. 오늘의 자유무역은 단순한 상품의 교역만이 아니라, 서어비스, 자본, 기술, 금융, 커뮤 니케이션, 문화 등 사회의 모든 차원에서의 세계적 통합이다. 국경선이 실제로 무너지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평화는 중대한 함정(陷穽)이 있다. 시장의 평화를 추진하는 철학은 자유방임주의이고 경쟁에 의한 진보이다. 그러나 자유방임이나 경쟁이 공동의 진보를 이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케인즈도 전후 세계가 가트(GATT)체제를 형성하는 것을 보고, 자유방임주의에로의 회귀에 대해 절망적인 회의를 표시한 바 있다.

국가의 조절이 없는 시장은 결코 유지된 일이 없다. 자유방임, 시장, 경쟁은 본질적 으로 강자(强者)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 불리한 것이다. 시장질서나 법률질서는 형식적 평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강자의 약자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질서 이다. 그 결과 우선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각국의 국민은 부자(富者)와 빈자(貧者)로 양 분될 것이다. 부자는 국경을 초월하여 전세계를 무대로 부(富)의 기반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빈자는 후진지역의 공업이나 선진지역의 낡은 서어비스업에 종사하 게 될 것이다.

한편 국제적으로도 시장의 평화는 강대국에게 유리하고 약소국에게 불리하다. 우르 과이 라운드(UR)는 미국과 EC의 협상에 의하여 국제법이 규정되는 과정을 보여주었 다. 앞으로 그린 라운드(green round)라고도 할 수 있는 환경보호협약이 추진되고, 이 를 통해 선진지역은 그들의 환경기술로 다시금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순진 한 사람들이 환경보호를 외치고 있는 동안 현실의 강자는 그것을 이익으로 전환시킨 다. 서구제국은 이외에도 노동조건에 관한 국제협약(blue round), 기술개발에 관한 국 제협약(techno round), 경쟁조건에 관한 국제협약(competition round) 등을 국제법질서 로 부과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모두다 세계에서 서구제국의 경제적 이익을 확장하 기 위한 서구적 방법이다. 이것은 서구제국의 입장에서는 화폐체제에서 스스로의 생존 과 번영을 유지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국제법(조약)에서 약소국은 거부하면 혼자 세계질서에서 배제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말하자면 법률주의에서 입법 자는 항상 강자(强者)인 것이다. 시장은 정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법률은 약자에게 가 혹하다. 그리하여 시장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구근대체제가 부딪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은 역사적 선례(先例)가 있다. 이러한 상황은 어떠한 결과로 귀착될 것인가? 역사는 이에 관한 해답을 제공한다.

4.2.2. 그리이스 로마의 교훈

시장의 평화는 우선 경제적으로 하나의 세계이면서 정치적으로 분립된 다수의 국가 가 있을 때 임시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이다. 고대 그리이스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리이스는 수백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 경에 중대 한 경제혁명이 일어났다. 그리이스가 지중에 연안에 많은 식민국가를 건설하면서 그리 이스 경제가 세계화되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그리이스는 과거의 자립적인 혼합농업을 포기하고 포도와 올리브 등 특화농업으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세계화된 경제에 대하여 수백개의 도시국가체제는 정합성(整合性)이 없는 것이었다. 공통의 교역질서와 합리적 인 세계분업체제, 해상의 안전 등 모든 면에서 그리이스는 도시국가체제를 초월해서 전체를 통합해야 하는 시대적 어려움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리이스 전체가 하나의 영 토국가로 통일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도시국가 단위의 민주주의 체 제는 포기될 수 없는 가치였다. 그리이스는 한동안 델로스 동맹에 기초하여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아테네제국주의(또는 동맹체제)로 이에 대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러한 체제에 불만을 품은 스파르타가 전쟁을 야기 하였고, 아테네는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세계질서는 와해되었다. 그리이스는 도시국가 체제를 초월하지 못하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정복되었다. 교역의 중심은 알렉 산드리아에 옮겨지고 그리이스문명은 쇠퇴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세계도 동일한 상황에 있다. 세계화한 경제에 정합성이 있는 세계적 정치체 제는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는 포기될 수 없는 가치이고, 국민국가를 초월하여 세계적 민주주의가 성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국가간의 합의체제(국제법)는 아테네 동맹체제 와 마찬가지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시장의 평화는 적(敵)이 없어진 사회에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체제이다. 그리고 불 평등을 방치하는 체제이다. 바로 로마가 그러하였다.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르러 정복사업을 중지하였다. 더 이상의 정복은 비 용이 많이 들고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복사업의 중단과 함께 로마는 쇠퇴 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정치체제는 황제의 계승절차가 확립되지 못했다. 정복의 과정 에서는 유능한 지도자가 배출되었지만, 적이 없어진 상황에서는 권력투쟁이 내전을 유 발하였다. 지도자들은 유능하지 못했고 지배계급은 목적을 상실하였다. 네로는 시적 영감을 얻기 위하여 로마를 불태웠고, 지배계급은 향락에 빠져들었다. 대중에게는 콜롯 세움에서 잔인한 오락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번영 이면에는 속주(屬州)의 인민 과 하층계급 그리고 이주(移住)한 만족(蠻族)들의 희생이 있었다. 외부의 만족(蠻族)은 끊임없이 침략을 야기하고 로마의 도시들은 약탈당했다. 그 위대한 로마가 내적 외적 프로레타리아트로 가득차게 된 것이다.주3)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 은 없었고,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은 기존의 세계에 무질서를 증대시켰다.

점차 국가와 지배계급도 충분한 부를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기존의 공납제도 및 시장체제가 국가와 지배계급, 로마시민을 위한 부(富)를 충분히 조달할 수 없게 된 것 이다. 이에 대한 개혁조치가 시행되었다. 로마시민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생필 품에 대한 가격을 고정시키고, 세금징수를 증대시키고, 농민의 도망을 금지하여 농민을 토지에 결박(結縛)하고, 하층계급이 직업을 바꾸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개혁조치 는 결과적으로 로마제국의 시장체제를 파괴하였다. 고정가격으로 채산성을 상실한 속 주(屬州)들은 판매를 위한 생산을 중지하고 지역적 자립경제체제로 변화되었다. 농민은 토지에 결박되어 농노로 되어 갔다. 질서는 붕괴하고, 도시는 약탈당하고, 경제는 자 립화하고, 농민은 농노화하여 중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문명은 유적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사진--- 로마의 콜롯세움

<로마는 정부사업을 그만 두자 할 일이 없어졌다. 이러한 원형경기장에서 잔인한 오락으로 정복사업을 대신했다. 결국 그것은 로마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세계는 로마화하고 있다. 선진국의 상류계층은 만족계층(滿 足階層)이 되었다. 선진국의 하층계급과 후진국 인민들은 로마의 하층계급과 속주의 인 민과 같다. 오늘의 만족(蠻族:후진국)은 끊임없이 선진국에 흘러들어 이방인이 될 것이 다. 선진국 상류계층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내적 외적 프로레타리아트로 가득차 있 게 될 것이다. 새로운 체제를 위한 개혁에 관해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능력 이 없고, 능력이 있는 계층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선진국의 상류계층은 그들의 부 를 세계시장에 두고 있으므로 자국 국민의 불행을 구제할 필요가 없다. 적(敵)은 사라 지고 인류는 공통의 목적을 잃고 분열되고 있다. 그 결과는 소규모의 전쟁이 끊임없이 야기되고, 내적 외적 프로레타리아트의 분산된 저항에 의하여 무질서는 증가하고, 정치 는 우경화하고, 세계시장은 고사(枯死)할 것이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새로운 중세(中世) 로 가는 길이다.

4.2.3. 19세기의 백년평화에 위장된 갈등

시장의 평화는 고대에만 그 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평화란 자유무역의 평 화이다. 자유무역이란 근대사회 이후에 지속적으로 추구되었던 이상(理想)이다. 그리고 동시에 언제나 실패하였던 이상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19세기의 백년평화이다.

19세기는 유럽인에게는 참으로 평화로운 시기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부 터 1차대전이 터진 1914년에 이른 100년간을 폴라니(K.Polayni)는 백년평화라고 불렀 다. 역사에서는 유럽협조(concent of Europe)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실제 로 유럽 열강들간에 전쟁다운 전쟁이 없었다. 세력균형체제, 국제금본위제에 기초한 세 계경제, 자유주의 국민국가, 그리고 시장체제가 이 시대의 평화를 받치고 있는 네개의 기둥이었다. 이 중에서도 이 시대의 원천과 기반은 시장체제였으며 말하자면 시장의 평화였다. 그 이면에는 오늘날의 거대 다국적 기업과 같이 국가를 초월한 국제적인 금 융세력이 있었다. 가령 로스차일드가(Rothschild家)는 어떠한 정부에도 종속되지 않고 국제주의에 충실하였다. 각국의 수도에 거주하는 유태인 은행이 세계적 신뢰의 매개가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사적 이익이 유럽의 평화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 들은 도덕주의자가 아니었다. 국지전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지만 대 규모 전쟁은 자신들의 부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경제세력에 의지하는 시장의 평화는 피상적인 것이다. 유럽의 백년 평화는 실제로는 침략과 학살과 착취의 시대였던 것이다. 우리가 관점을 바꾸어 유럽 이외의 인류의 관점에 서면 즉각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백년평화라고 부르는 바 로 이 시기에 전세계는 유럽열강의 제국주의에 짓밟혔던 것이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중국, 아시아 등 모든 지역, 손바닥만한 유럽을 제외한 모든 지 역은 이 시기에 유럽의 침략과 착취와 학살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실로 백년평화는 백 년전쟁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침략할 지역이 없어졌을 때--세계 전체의 식민지 분할이 끝났을 때--유럽 열강은 자신들 상호간의 대규모 전쟁(1차 세계 대전)에 돌입했던 것이다. 전쟁은 한번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금본위제에 기초한 국제 금융체제의 붕괴와 함께 대공황이 발생하였고, 그것은 다시한번 세계대전을 야기하였 던 것이다. 이것이 시장의 평화의 근대적 말로이다.

4.2.4. <시장의 평화>와 화폐체제의 철칙

시장의 평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구근대사가 시작된 이후로 형식을 바꾸어 계 속해 온 흐름이다. 즉 끊임없이 시장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노예무역, 약탈, 자유무역, 제국주의, 냉전 등 다양한 이름으로 계속되어 온 것이다. 근대사를 수 놓고 있는 모든 전쟁과 학살도 바로 시장의 평화라는 이름 밑에 행해진 것이다. 오늘 에 이르러 시장의 평화는 화폐체제를 전세계적 무대에서 완전하게 구현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화폐체제는 국가를 단위로 하여 동질적인 체제였고, 국가와 국가간에는 정치 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를 초월하여 전세계를 하나의 동질적인 시장질서, 서구의 정의에 기준을 둔 질서로 재편하는 것이다.

시장의 평화가 성공하고 그것이 세계질서로 정착된다면, 미래는 초국적자본이 지배 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우선 근대국가는 힘을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세계에 보편 적으로 적용되는 화폐질서(세계시장의 규칙)가 모든 국가들을 규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폭력 자체가 화폐의 지배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가령 화폐를 대가로 받고 폭력을 행사하는 초국적자본이 국가의 폭력을 대체하는 것이다(벌써 미래학자 앨빈토플러는 平和株 式會社에 관한 상상력을 작동시키고 있다.).

지식과 문화도 화폐질서에 흡수될 것이다. 이미 각국의 문화가 화폐수입을 매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물론 미국대중문화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 결국 정치집단(국 가도 지방자치체도)도 문화집단도 기업과 같은 형태의 경제적 집단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리하여 화폐가 살아 있는 신(神)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주4)

그러나 초국적자본은 공공적 책임성을 가질 수 없다. 초국적자본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화폐적 수입이고 이윤이다.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고 확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초국적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는 정의도 평화도 없다. 오직 화폐적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황제의 자리를 돈을 주고 사고 팔았던 로마의 말로와 같은 것이다.

시장의 평화는 성공보다는 실패에 의하여 문명의 쇠퇴를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의 평화는 압도적 다수의 인류, 압도적 다수의 국가들에게 아무런 안정도 제공하 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장의 평화로 생존할 수 없게 된 압도적인 다수의 인 민은 폭력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세계시장질서로 생존할 수 없게 된 국가 역시 폭력 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세계시장체제에서 이익을 얻는 국가들(서구제국들) 역 시 스스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더 많이 더 자주 폭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세계 시장이나 시장의 평화는 결코 인류와 세계의 보편적 질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 하여 세계는 폭력과 전쟁으로 붕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고대 그리이스나 19세기의 100년 평화의 종말을 관통하는 논리였던 것이다.

4.2.5. 승자의 역사, 패자의 역사

역사는 승자들 상호간의 투쟁이기도 하지만 패자들의 승자들에 대한 투쟁이기도 하 다. 인류의 미래는 이 두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일본, 유럽공동체, 미국이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절하지 못하고 충돌할 수도 있다. 또는 서구문명권, 유교문명권, 회교문명권, 러시아 등 다른 문화권이 충돌할 수도 있다. 미국은 내부적으로 통합성이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유, 민주주의, 개인적 성공의 꿈, 이 모든 것들은 이제 더이상 통합력으로 작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결 과 서로 다른 인종과 민족간의 문화적 갈등으로 분열되고, 무질서가 증대할 것이다.

중국은 자신의 정치체제를 창출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정치적 공산주의(일당독재) 는 과도적인 것이고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근대서구적인 자유, 민주주의, 시장체제로 12억의 인구를 통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중국이 새로운 정 치체제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분열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복잡한 사정은 전세계적으 로는 문명권 상호간의 갈등은 증가시킬 것이다. 시장체제(시장의 평화), 자유주의 민주 주의 등 서구 근대적인 질서는 결코 전세계를 통합하는 보편적 질서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한 문명권에서 당연한 가치관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문명권에서는 정 당하지 않은 기준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리하여 강자들 간의 갈등과 투쟁은 증가할 것 이다.

한편 이러한 강자들의 갈등과 적대 속에서 패자(敗者)의 역사가 진행될 것이다. 시 장의 평화, 또는 강대국이 부과하는 세계시장질서에서 구제를 받지 못하는 패자(인류 의 다수)가 난민으로 선진지역에 흘러들어가 무질서를 증대시킬 것이다. 만약에 중국과 인도가 산업화에 실패한다면 난민은 폭증할 것이다. 그리고 선진지역 자체의 하층민들 이 이방인처럼 될 것이다. 물론 선진지역은 질서와 이익을 위해 폭력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질서폭력은 근대와는 달리 난민이나 하층민에게 유효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선진지역 바깥에 남아 있는 빈곤한 국가들은 우경화할 것이다. 그들은 시장질서를 부 정하고 폭력을 택하게 될 것이다. 질서폭력의 근대적 우월성이 소진되었으므로 이러한 무질서폭력을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로마가 약탈당했듯이 선진지역은 약탈될 것이다. 근대의 서구 제국주의가 후진국을 침략한 것은 승자의 역사였다. 앞으로는 후 진지역이 선진지역을 무질서폭력으로 약탈하는 패자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역사는 법칙적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법칙에 의하여 진보한다는 근대 인의 믿음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리이스 문명, 로마문명, 그리고 세계의 대부 분의 문명은 왜 붕괴하였는가? 역사가 법칙적으로 진보한다는 것은 질서폭력이 우월한 시대에는 진실이 된다. 왜냐하면 강자의 승리과정이 진보의 법칙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항상 질서폭력이 우세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역사는 순환하였다. 질 서폭력과 무질서폭력이 순환적으로 우세해졌던 것이다. 역사적 필연성(必然性)이란 과 거에 대해 역사가가 사후(事後)의 관점에서 인과관계론(因果關係論)으로 정리한 것이 다. 인류의 미래가 쇠퇴하든 발전하든, 먼훗날의 역사가는 사료(史料)를 인과적으로 해 석하면서, 발전이 혹은 쇠퇴가 필연적과정이었다고 할 것이다.

4.2.6. 진보의 종언 : 근대를 넘어, 서구를 넘어

실로 인류는 기로에 서 있다. 종말로 예정되어 있는 근대적 진보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질서를 찾을 것인가?

근대적 진보는 끝났다. 근대적 진보는 세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 과학기술과 같 이 자연에 대한 지배력의 확장이다. 둘째,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는 것이다. 세째, 갈등과 적대가 없는 이상적 사회로 접근한다는 신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진보는 종언에 이르렀다.

첫째,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대로 진보와 풍요를 의미하는 시대는 끝났다. 사회적 통 제력이 저하한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은 문명의 파괴능력이 증대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회적 꿈이 과학기술의 꿈을 이끄 는 것이지, 과학기술의 꿈이 사회적 꿈을 이끌 수는 없다. 오늘의 과학기술은 변화의 속도가 증폭되고 있으나 변화의 방향성을 상실하였다. 서구 근대적인 체제가 변혁되지 않는 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불의와 무질서를 증폭시키는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 하여 마침내 무질서가 과학기술의 발전 그 자체를 정지시키고 일실(逸失)시키는 상황 에 이르게 할 것이다. 과학기술은 질서 속에서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물질적 풍요의 한계효용(限界效用)은 제로(0)에 가까와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개개인에게 극히 작은 풍요를 느끼기 해주기 위해서도 어마어마한 투자가 필요해지고 있다. 환경문제는 우리가 물질적 가치를 소비하기 위해서 무엇을 지불해야 할 것인가 를 보여준다. 오염없는 생산이나 소비는 없다. 오염을 제거하기 위한 비용을 생산비로 계산한다면 상품향유의 대가는 전혀 달라진다. 그것이 바로 물질적 풍요에 대하여 인 간이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풍요는 더 이상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 니게 되었다. 그 반대로 풍요가 야기하는 고통이 강화되고 있다.

세째, 물질적 풍요에 의하여 갈등과 적대가 없는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환상임 이 밝혀졌다. 그것은 정반대로 사회적 연대를 파괴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유의 왕 국이나 케인즈가 말하는 탐욕의 신(神)이 인도하는 도덕적 사회는 오지 않는다. 인류는 근대적 진보의 정점을 지나 쇠퇴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전혀 다른 위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인류는 이제까지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 를 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과 동시에,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를 전사(前 史)로 돌리는 개벽(開闢)을 이룰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서구적으로 말하면 신천 년(新千年)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류전체의 물질적 기본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능력은 더욱 증대할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물질적 가치를 둘러싼 투쟁과 대 립에서 해방될 수 있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인류는 경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의 자아실현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자아실현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눈 앞에 와 있는 것이다. 천국은 이미 도래해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억압하고 있을 뿐이다. 지식정보혁명은 이제까지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다. 그것은 인간사회가 물질적 기반이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하는 사회 가 가능하게 되었다. 물질과는 달리 지식과 문화는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고 비경쟁적 (非競爭的)이다. 현세대가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화하는데 성공한다면 미래의 인류는 그것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후 손은 기회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오늘의 인류는 고대 로마와 다르다. 로마를 침입한 만족(蠻族)은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었지만, 오늘날 서구 이외의 모든 문명권은 만족과는 달리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류에게 남은 희망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명권은 오늘날의 문명인 근대서구문명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으로써 서구문명도 거듭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보편적인 질 서>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서구를 넘어서고 근 대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시장의 평화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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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이것은 토인비가 말하는 프로레타리아트이다. 그것은 무질서를 만연시키는 프로 레타리아트다. 이점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프로레타리아트와는 다르다. 마르크스가 말 하는 프로레타리아트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으로 기대되는 주체였다.

주4) 글로벌 체제의 최신 제3층에는 곧 지역적 테크노폴리스(technopolice)들이 포 함되게 될 것이다. 유럽공동체(EC)의 과학기술예측부장인 페트렐라(Riccardo Petrella) 는 이렇게 말한다. {초국가 기업들은.....국민국가의 틀을 무시하는 네트워크들을..... 만 들고 있다.....} {다음 세기 중반쯤이면 독일, 이탈리아, 미국, 일본과 같은 국민국가들은 가장 적절한 사회경제적 실체도, 궁극적인 정치적 구성체도 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군, 일본의 오사카, 프랑스의 리옹지역, 독일의 루르공업지대가 우월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미래의 진정한 정책결정 세력은 도시-지 역국가 정부들과 연합한 <초국가 기업>이 될 것이다.} 그는 이런 단위들이 {가난한 인류의 바다 한가운데에서....하이테크 군도(群島)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토플 러 저 <전쟁과 반전쟁> 한국경제신문사 간 p.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