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폐와 정보
우리는 화폐체제를 논의하면서 화폐를 금화 또는 지폐(紙幣)라고 무의식적으로 전 제하였다. 이것은 현실이기도 하고 상식이기도 하다. 즉, 화폐는 균등한 단위의 동전이 거나 종이쪽지이다. 동전이나 종이쪽지와 같은 물질성 또는 실체성(實體性)이 화폐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이다. 그런데 오늘날 정보기술은 화폐의 이러한 물질성(내지 실체 성)을 없애고 있다. 화폐는 점점 실체성이 없는 개념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갑이 을로부터 10만원 짜리의 라디오를 구입하였다고 하자. 그러면 갑은 을에게 만 원짜리 화폐 10장을 준다. 을이 라디오를 갑에게 줌으로써 갑은 라디오의 새로운 소유 자가 된다. 반대로 갑은 만원짜리 지폐 10장을 을에게 지불함으로써 을은 그 지폐 10 장의 새로운 소유자가 된다. 여기에서 화폐와 라디오는 완전히 동등하다. 라디오가 소 유의 대상이 되는 어떤 실체라면 화폐도 소유의 대상이 되는 어떤 실체이다. 너무나 평범한 사실이지만 이것이 화폐거래이고 동시에 이것이 화폐체제의 본질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이 신분계급체제를 해체해버린 것이다. 이 거래에서 갑과 을의 계급 적 신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폐적 거래를 정보의 관점에서 다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역시 갑이 을로부터 라디오를 구입하였다고 하자. 을은 갑에게 라디오를 인도한다. 그럼으로써 라디오의 소 유권은 갑에게 이전한다. 여기까지는 동일하다. 그런데 갑은 을에게 지폐를 지불하지 않는다. 대신에 갑과 을은 각각 은행에 구좌(口座)를 가지고 있다. 은행이 갑의 구좌에 서 10만원만큼 감소시키고, 동시에 을의 구좌에서 10만원만큼 증가시킨다. 즉, 갑과 을 의 거래는 정보를 생산하고 그에 따라서 은행의 갑과 을의 구좌에 기재가 변동되는 것 이다. 이러한 새로운 거래방식에서는 화폐는 라디오와 등등하지 않다. 화폐는 라디오와 같은 물질성이나 실체성이 없다. 또한 화폐를 라디오와 같이 넘겨주는 것은 아니다. 화 폐는 라디오와 같은 방식으로 소유되는 것도 아니고 이동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화폐의 본질은 정보이다. 그리고 그 정보의 내용은 바로 권리이다. 즉, 화폐는 권리에 관한 정보인 것이다. 갑이 은행구좌에 가령 100만이라고 기재되어 있던 것이 위 거래 로 인하여 10만이 감소하여 90만으로 정정된다. 한편 을도 가령 은행구좌에 100만이라 고 기재되어 있던 것이 110만으로 정정된다. 이것이 새로운 화폐정보의 모습이다. 거래 쌍방이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있다면 이러한 거래는 이미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다. 은 행 등 금융기관에서는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주8)
4.4.2. 사회체제의 본질과 화폐체제의 철칙
화폐의 관점에서 보는 사회관계와, 정보의 관점에서 보는 사회관계는 위와 같이 상 당히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 공통하는 사회관계의 본질(本質)은 무엇인 가? 사회관계의 본질은 인간의 권리의무관계이다. 사회체제는 권리의무의 성격과 그 변동을 규정하는 양식이다. 이것은 사회관계의 매개수단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매개수단이 신분인가, 화폐인가, 정보인가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제2편에서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는) 신분계급체제를 고찰하였다. 이 경우 에는 화폐가 매개하는 것과 같은 수량적인 권리의무나 그 변동은 불가능하다. 몇개의 고정된 권리의무의 체계로서 신분계급이 규정되고,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고정된 권 리의무인 신분이 정해지는 것이다.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을 때, 이러한 방식이 아닌 다른 사회관계가 불가능하다. 즉, 지배계급의 권리(특권)와 피지배계급의 의무(신분적 제약)가 결합하여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폐가 일반적으로 사회관계를 매개하면, 권리의무는 바로 화폐에 의하여 규정된다. 화폐자체가 바로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화폐를 가지면 모든 물질적 가치 (상품)을 소유(구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신분계급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의 주요한 권리는 화폐를 매개로 하여 형성되고, 인간의 주요한 의무는 화 폐를 지불할 의무가 된다. 우리는 이처럼 화폐를 매개로 하는 사회관계를 제3편에서 논의하였다.
그런데 화폐와는 전혀 다른 정보의 관점에 서면 다시한번 사회관계의 성격이 달라 진다. 첫째, 화폐의 실체성은 무의미하고 권리에 관한 정보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사 회관계는 권리의무의 변동에 관한 정보의 생산과 이동으로 규정된다. 화폐가 실체성을 상실한다는 말은 권리를 규정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분계급체제에 서는 어떤 개인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신분인가 하는 것 에 의하여 결정된다. 화폐체제에서는 어떤 개인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 은, 그가 얼마나 많은 수량의 화폐(紙幣)를 소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된 다. 그런데 정보가 인간의 사회관계를 매개하면, 어떤 개인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 가 하는 것은, 사회가 그에게 어떤 권리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된다. 즉, 어떤 경우에 어떠한 권리를 주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규범(規範)의 문제가 된다. 화폐체제 에서는 화폐를 취득하는 것이 권리를 취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보가 사회관계를 매개하면 화폐라는 실체물을 취득하는 것을 필수적인 조건으로 할 필요는 없다. 오히 려 그 보다 어떠한 경우에 어떠한 권리를 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어떻 게 공시(公示)하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공시란 사회적으로 알리는 것, 사회의 다른 사 람들이 알 수 있는 상태에 두는 것이다. 주9)
둘째, 정보가 사회관계를 매개하게 되면, 사회관계는 이러한 정보를 관리하고 처리 하는 기반구조(infrastructure)를 필요로 한다. 화폐체제에서는 이것이 불필요하다. 모든 개개인이 실체적인 화폐를 소유하는 것 자체에 의하여 권리의무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가 사회관계를 매개하면 권리의무의 내용을 확정하고, 그 변동을 규정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시(公示)하는 '기관'이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화폐(지폐)를 사용하는 거래에는 당사자끼지 지폐를 주고 받으면 되고, 은행이 필요 하지 않다. 그러나 신용카드를 사용한다면, 매 거래마다 은행(또는 신용카드회사)이 필 요하다. 이처럼 정보에 의하여 사회관계가 형성되는 경우에는 화폐체제와는 달리 정보 적 기반구조(information infrastructure)가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 정보적 기반 구조를 간단히 <정보 인프라>라고 약칭하기로 한다.주10) 신분계급체제에서는 신분에 대한 관념(집합표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화폐체제에서는 화폐를 조 절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필요했다. 정보가 사회를 통합하는 사회에서는 <정보 인프 라> '기관'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가 이러한 정보인프라를 토대로 하여 형성된다면, 화폐체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회체제가 가능해진다.
<화폐체제의 철칙>은 화폐의 실체성에 의하여 인간이 규정당하는 것이었다. 어떤 가난한 아기가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그 부모는 돈이 없다고 하자. 이 경우 병원 이 있고 의사가 있고, 그 의사가 치료해 주고 싶어도 치료해 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다가는 그 병원이 문을 닫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 다. 의료보험이나 기타 여러가지 의료복지는 화폐체제에서 그러한 환자에게 권리를 화 폐로써 부여한다. 그런데 화폐가 아니라 정보가 일반적으로 사회관계를 매개하게 되면, 모든 개인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을 화폐체제와는 전혀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화폐체제의 철칙을 초월하는 방향이다. 아기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치료받을 수 있는 일정한 권리를 부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어떠한 권리를 어떻게 부여하 는 것이 <정당한가>, 그리고 그렇게 부여되는 권리를 사회전체가 거시적(巨視的)으로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새로이 제기된다.
4.4.3. 소유를 대체하는 정보
정보의 관점에서 보면 화폐는 일종의 정보매체(情報媒體)이다. 화폐는 사람들이 무 엇을 원하고 어떤 일을 하였는가 하는 것을 사회적 정보로서 종합하는 매개체이다. 소 련사회주의에서 화폐를 제약하자, 사람들이 무엇을 수요하고 생산물의 가치가 얼마인 가 하는데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것은 정보매체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화폐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화폐는 선호와 권리에 관한 정보매개체이다. 화폐가 표상하는 것이 권리정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의 상식적인 화폐의 집합 표상(관념)과 화폐제도 자체를 제검토할 수 있게 된다.
사실 화폐 그 자체는 어떤 실체적 대상도 아니고 부(富)도 아니고 가치도 아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일을 하여 임금으로 화폐소득을 받았다고 하자. 그가 임금소득으로 받은 화폐는 어떤 실체적 가치도 아니고 부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사회를 위하여 일을 하여 공헌하였으므로, 모든 상품에 대하여 그만한 크기의 구입할 수 있는 <권 리>를 부여받은 것이다. 화폐란 이러한 구매의 권리이다. 화폐는 실체(實體)가 아니라 관계(關係)이며, 존재(存在)가 아니라 연대성(連帶性)인 것이다.
그런데 근대적 화폐체제에서는 실체적 지폐로 인하여 화폐가 마치 실체적 존재, 가 치 그 자체, 부(富)이고 재산인 것처럼 인식되고, 경제체제가 그렇게 구성되었다. 관계 와 연대성이라는 화폐의 본질이 사라지고, 화폐가 마치 존재이고 실체(實體)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당연한 상식으로 집합표상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화폐의 실체성에서 연유하는 환상(幻想)이다. 즉 화폐의 까르마(karma)인 것이다.
화폐체제에서는 이러한 환상이 사실인 것처럼 현실을 구성한다. 모든 사람이 동일 한 환상을 가질 때는 환상 그 자체가 이미 중대한 현실이 되어버린다. 근대적 화폐체 제는 이러한 환상에 기초하는 체제이다. 이러한 환상을 야기시키는 이유는 화폐의 물 질성, 실체성이다. 화폐가 그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화폐가 가진 불필요한 실체 성, 물질성에서 오는 제약 때문이다. 이제까지 화폐는 이러한 실체성 물질성의 화폐제 약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화폐체제는 이러한 화폐의 실체성에 의 한 '화폐제약(貨幣制約)'을 기초로 하여 형성되었다.
화폐체제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인 소유(所有)도 이러한 화폐적 환상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즉 화폐를 어떤 실체적인 부(富)인 것처럼 소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화폐자본 (貨幣資本)의 소유이다. 그런데 화폐자본은 화폐보다 더욱 용이하게 정보화할 수 있다. 화폐를 완전히 정보화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지폐사용을 모조리 금지해야 한다. 이것 은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주11) 그러나 화폐자본을 정보화하기 하기 위해서는 저축(貯 蓄)을 정보화하면 된다. 화폐자본을 정보화한다고 해도, 일상적인 소비지출에서는 화폐 에 관한 규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화폐자본이 정보화하면 화폐자본의 소유의 성 격이 변화한다. 화폐자본을 권리정보로 축적한 사람에게 어떠한 종류의 권리를 부여하 는가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권리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은, 반드 시 무제한적인 소유권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화폐체제에서는 인간과 화폐자본과의 관계에 있어 소유권 이외의 다른 방식이 가능 하지 않았다. 화폐자본 역시 실체성을 가진 소유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폐 자본이 정보화하면 그 화폐자본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권리를 줄 것인가 하는 것을 다르게 설계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화폐자본이 소유의 제약에서 해방되는 것 이다. 이것은 중대한 가능성이다.
소련이 사회주의체제를 시도할 때에는 화폐자본에 대한 권리를 다르게 설계할 수 없었다. 소련이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화폐자본의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화폐자본과 인간의 관계를 소유권적 관계로 인정 하든가, 아니면 화폐자체를 부정할 것인가 하는 선택만이 가능할 뿐이었다(이것이 화 폐체체의 철칙이었다). 실로 근대적인 화폐체제의 철칙은 화폐의 실체성에 따른 제약에 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화폐자본을 정보화함으로써 개인과 화폐자본에 대한 관계를 다양하게 규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소유권보다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 로 확대할 수도 있으며, 그보다 더 적은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축소할 수도 있다. 이 렇게 될 때, 화폐체제의 철칙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즉 <자본의 문제>를 화폐체 제의 철칙에서 해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경제체제에로의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