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 문화사회-연대체제와 헤게모니의 변화
우리는 산업사회-화폐체제를 대체하는 미래를 문화사회-연대체제로 규정하였다. 문
화사회란 인간의 삶과 사회에서 문화가치의 생산과 소비가 주된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
이다. 이제까지의 경제가 사회의 주된 차원이고 문화가 부수적이었던 경제적 문화였다
면, 문화사회는 문화가 사회의 주된 차원이고, 경제가 부수적으로 되어 말하자면 문화
적 경제가 된다.
한편 화폐체제는 연대체제로 대체된다. 연대체제는 <정보 인프라(information
infrastructure)>를 토대로 하여 사회관계를 형성하고 공동체로 통합되는 체제이다. 이
것은 화폐체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자본이 정보화되어서 기반구조인 <정보
인프라>의 한 내용이 되는 것이다. 화폐가 통합하는 체제가 화폐체제라면, <정보 인프
라>가 통합하는 체제가 연대체제이다.
문화사회-연대체제는 산업사회-화폐체제와 비교할 때, 헤게모니의 성격이 변화한다.
문화사회에서는 자본이 결정적으로 우월한 전략적 자산은 아니다. 물론 자본도 중요하
지만 자본헤게모니가 일체의 헤게모니를 사실상 지배하는 산업사회-화폐체제와는 다른
것이다. 지적 문화적 요소와 인간의 창의성이 더욱 중요하며 이것이 자본을 획득하는
것은 용이하다. 기업의 경영(자본헤게모니) 자체가 지적 문화적 수준을 필요로 하며 단
순히 돈이 많으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자본헤게모니 보
다 지식헤게모니(집합표상헤게모니)가 더욱 우월성을 가지게 된다. 한편 권력헤게모니
도 성격이 달라진다. 단순한 폭력만으로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으며 폭력만으
로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 권력헤게모니 자체가 높은 수준의 지식정보를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문화사회-연대체제에서는 헤게모니의 우월성이 변화한다. 즉 지식헤게모니,
자본헤게모니, 권력헤게모니의 순서로 변화하며 말하자면 지식헤게모니가 가장 우월한
헤게모니가 된다. 이러한 헤게모니의 우월성이 변화는 이미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주)
문화사회-연대체제에서는 공동체의 영역이 바뀐다. 자유민주주의가 공동체를 형성
하는 유일한 원칙이 되는 한, 공동체의 영역은 국민국가의 영역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다. 국민국가의 영역이란 국가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국민)들이 다수결의 원칙을 받
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다. 따라서 국가공동체의 영역은 용이하게 확장되지 않는다(확
장된 영역의 새로운 국민이 소수라면, 다수결원칙에 따를 때는 항상 손해만 보기 때문
이다.). 이에 대하여 경제공동체나 문화공동체는 용이하게 확장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것은 다수결이 지배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경제는 세계화되었으며, 경제의 블록화 경향이 나타나는 등 넓은 영역의 경제
적 공동체로 향하고 있다. 오늘날 어떠한 국가의 경제도 세계경제에 의한 직접적인 영
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하여 경제공동체는 기존의 국가공동체보다 확대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국가공동체와 경제공동체가 분리되는 현상이다. 한편 문화의 차원에서
도 각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이 인정되면서 동시에 세계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문화는
전세계가 동질화하고 있으며 동시에 다양화하고 있다. 전인류는 거의 동시적인 커뮤니
케이션 공간에 속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측면에서 공통의 집합표상(집합의식)이 형성되
고 있다. 이것은 문화 역시 국민국가의 영역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근대적인 국민국가는 현재 심하게 변화를 겪고 있다.
근대 국민국가는 경제적 조절이나 문화적 교류를 위해서는 너무나 작다. 반대로 실
질적인 민주주의를 확보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나 인간의 정감적 문화적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크다. 현재의 거대국가는 쇠퇴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취약한
국가들은 해체되고 있다. 경제공동체와 문화공동체가 국가공동체로부터 분리되고 분화
되는 것, 그 공동체의 영역을 달리하는 것은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현실적으로 유럽경제공동체는 국가를 초월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국가공동체와 경제공동체가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사회-연대체제에서는 헤게모니의 내용이 바뀐다. 헤게모니의 근대적인 분할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비현실적으로 되었다. 나아가 정당하지 않게 되었다. 유럽공동체에
서 화폐통합이 이루어지면 화폐에 관한 권한(가치매체헤게모니)은 국가권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미 근대적 권력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
미한다. 근대적 권력은 질서폭력의 독점에 기초를 둔 권력헤게모니 이외에, 경제적 권
력(즉 자본헤게모니 내지 가치매체헤게모니)와 문화적 권력(즉 집합표상헤게모니)를 포
함하고 있다. 재정정책적인 권한과 화폐에 관한 권한 그리고 교육언론에 관한 권한 등
이 그것이다. 오늘의 현실에서는 근대적 권력이 이러한 헤게모니를 유효하고 성과있게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권력이란 본질적으로 강제적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제는 강제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이 경제를 조절하는 것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다. 경제
가 세계화함으로써 권력은 더욱 비현실적이고 무능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국가보다 더
큰 매출고나 자산을 가진 거대 다국적기업의 자본헤게모니는 사적 자유의 원칙에 방치
되어 있다. 반면 무능력한 권력은 경제를 마구 재단(裁斷)하거나 아니면 경제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나아가 집합표상헤게모니는 공공이익의 이름으로 권력헤게모니에 포함
되어 있거나, 아니면 자유의 이름으로 자본헤게모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진리는
권력이나 자본에 의하여 좌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헤게모니의 내용을 근대와는 다르게 재규정할 필요가 있다. 권력은 근대
에 비하여 축소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경제문화적인 차원에서는 권력헤게모니가 제대
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헤게모니에 대해서는 대중의 참여에 의하여 정당성
을 확보하는 제도(경제체제)가 창조되어야 한다. 집합표상헤게모니는 권력과 자본으로
부터 독립하여야 한다. 이렇게 변화되어야만 인간을 공동체로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장의 평화>라는 미명아래 불평등과 무질서가 문명을 붕괴시킬 것이
다. 근대적 권력은 아무리 강화되더라도 경제적 문화적 책무를 완수할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권력헤게모니, 자본헤게모니, 집합표상헤게모니가 분화되어야 한다는 것
이다.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 권력과 자유의 분할은 이제 낡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
시에 국가공동체, 경제공동체, 문화공동체가 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