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노동의 기동기제

1. 노동의 집합표상

역사는 삶의 농축(濃縮)이고 신화(神話)는 역사의 농축이다. 그리하 여 신화는 오랜 역사 속에서 축적된 문화의 일반적 집합표상이다. 서구 의 신화에 있어서 노동(勞動)은 여성이 저지른 죄에 대한 신(神)의 형벌 이고, 그리하여 노동은 곧 고통(苦痛)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노동은 아 담과 이브의 죄에 대한 형벌이다. 이브의 꼬임에 빠진 아담이 그녀와 함 께 금단(禁斷)의 열매를 따 먹은 때부터, 그는 들에 나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이스의 신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제우스는 신을 속이고 인간의 편에 선 프로메테우스에게 화가 나, 인간에게 복수(復讐) 하려고 판도라라는 이름의 여성을 당시의 인간들인 남자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판도라는 재앙이 들어있는 상자를 가지고 왔는데, 신은 그것을 열어보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호기심이 많은 판도라가 이 상 자를 열자 그 속에서 온갖 재앙과 고통이 튀어 나왔다. 이렇게 하여 세 상에 고통이 퍼진 뒤에 황금(黃金)의 시대가 가고 은(銀)의 시대가 왔 다. 은의 시대에 이르러 곡식은 심지 않으면 나지 않게 되었으며 인간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이 노동의 탄생이다. 그것은 여성으 로 인하여 가해진 신의 형벌이고 고통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동양의 신화에서 노동은 신이 인간에게 준 지혜(智慧) 이다. 여신 여와(女와)는 대지(大地)가 너무 쓸쓸하고 자신도 고독하여 남녀 인간을 창조하였다. 새끼 줄을 진흙탕에 이겨 빙빙 돌리자 새끼줄 에 묻어 떨어진 진흙덩이들이 인간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리고 남녀 인간들이 생기넘치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그 여신(女와)도 이제는 쓸쓸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어서 죽게 마련이라, 그때마다 계속 인간을 만들어낼 수 없어서, 인간 남녀가 결합하여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후손(後孫)을 창조하고 양육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여와는 인간의 창조신일 뿐 아니라 중매신(中媒神)이기도 하다. 그뒤 인류는 점 차 번창하여 자연에서 나는 열매로는 식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때 태 양신 염제(炎帝)가 이러한 인류를 걱정하였으며, 인자한 염제는 인류에 게 오곡(五穀)의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지혜를 배워 인간은 자신의 노동(勞動)으로 생활자료를 손에 넣게 되었다. 염제가 가 르쳐 준 농사짓는 방법이 바로 노동인 것이다. 이것이 중국 신화에 있어 서 노동의 등장이다. 그것은 신이 가르쳐 준 지혜인 셈이다.

노동은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리하여 인간은 가능한한 노동 을 회피(回避)하려고 한다는 것이 상식적 집합표상이다. 그러나 한편에 있어서 노동은 반드시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며, 그것이 삶이고 인생 을 의미있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술가의 작품행위나 과학자의 연구 행위는 반드시 고통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원(田 園) 속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그 자체가 삶이지 고통만은 아니다. 노동 그 자체(自體)가 고통인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노동해야 할 때 고통스 러운 것이다. 오락도 끊임없이 되풀이 해야 한다면 고통스러운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 즐겁다 하더라도, 하루 종일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고통이다. 그리하여 노동의 고통은 노동 그 자체의 성격에서 유 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행해지는 사회적 상황(狀況)에서 연유하는 것이다.1) 그러나 현대산업사회에서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대부분의 노동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고통으로서의 노동을 변혁하는 문제는 단순히 경제체제의 문제만은 아니며, 그것은 문명(文 明)의 문제이다. 단순히 경제체제를 변혁하는 것 만으로 노동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인류의 문명에서 이러한 고통스러운 노동이 노예, 농노, 그리고 임금노동자 등 일부(一部)의 인 구집단이 짊어지고 있는 멍에였다.

자본주의에서는 고통스럽고 모두가 회피하려고 하는 노동을 기동시키 기 위해서는 기아(飢餓)라는 위협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 다. 그리고 만일 기아를 노동의 동기에서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법률적 강제(强制) 뿐인데, 그것은 모두에게 자유를 앗아가 버릴 것이다. 한편 노동의 고통은 그것이 생산한 가치로부터 노동이 소외(疎外)되어 있다는 점에 있으며, 그리하여 착취의 제거와 생산수단의 국유화야말로 노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론은 사회적 현실에 의하여 지지(支持)를 받 지 못했다. 관리사회주의(管理社會主義)의 경험은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노동의 동기의 문제나 노동의 고통이나 노동이 일부의 인구집단에게 부 과된다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하였다. 이러한 점은 노동의 문제가 생 산수단의 소유의 문제, 착취의 문제로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2. 기아(飢餓)와 노동

자본주의는 그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지극히 냉혹한 현실적(現 實的)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 자유로운 사회는 자유롭게 생성되는 수요 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발전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요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과정으로 노동이 규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수요를 충 족하는 과정에서 이윤이 발생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이 노동의 과정 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생산하는 것이든 그 생산의 과정이 노동을 열악(劣惡)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종속적(從屬的)으로 규정되는 노동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 해서는 기아라는 채찍이 그 뒤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 굶어 죽느냐 노동 하느냐 하는 상황(위상)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노동하게 한다는 것이 다. 이러한 노동의 기동기제야말로 인간은 설사 오늘의 노동이 내일 그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을 살기 위하여 노동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기아에서 오는 노동의 동기는 대단히 현실 적이다. 모든 인간에게 기아냐 노동이냐라는 상황을 부여한다면 그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노동을 택할 것이다. 이러한 기아동기(飢餓動機)는 사 회적 진화론(進化論)의 입장에서 정당화되었다. 가난한 자는 게으른 자 이고 따라서 기아에 직면해서 노동하는 자에게 동정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가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기아동기를 정당화했었다. 기아야말로 조 용히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을 노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2)

이러한 논리는 빈틈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현실 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 대하여 우리 가 시간(時間)의 차원을 도입한다면 즉시 새로운 문제를 발견할 수 있 다. 인간을 위협하는 기아는 시간적으로 어디에 위치하는 기아인가. 오늘 기아에 부딪치고 있다고 하여 노동을 하고, 오늘 기아에서 해방되 었다고 하여 노동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다. 한달간 기아에서 해방되었 다고 하여 즉시 노동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1년간, 5년간, 1 0년간의 미래에 있어서 기아에서 해방되었다고 하여 인간이 노동을 회 피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기아의 논리에 대하여 우리가 공간(空間) 의 차원을 도입하면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한다. 인간은 단순히 식량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여 노동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웃에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옷 더 좋은 주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것을 얻기 위하여 노동한다. 의식주의 문제 가 해결되었다고 하여도, 이웃의 여러가지 소비재를 구경한다면, 자신 도 그것들을 구입하기 위하여 노동하려 할 것이다. 절대적인 기아가 노동을 강요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기아가 제거 되었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노동을 회피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현실은 모든 노동자들이 기아에 협박당할 때 에만 노동한다는 것을 증명(證明)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3. 연대체제에서의 노동의 기동(機動)

연대체제에서는 연대소득(連帶所得)에 의하여 더이상 기아가 노동의 심리적 채찍이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연대체제에서는 기아동기는 사라 진다. 저 강력한 노동의 동기로서의 기아의 위협이 제거될 때, 과연 노 동이 효율적으로 기동(機動)할 것인가? 인류는 관리사회주의의 실험 (實驗)에서 기아의 위협이 제거된 상태에서 노동의 동기가 저락한 경험 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체제도 여전히 유지되고 기능하 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관리사회주의에서 노동의 기동기제에 가장 결정 적인 결함은 기아의 위협을 제거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실물적 계획(計 劃)이 자유와 창의로서의 노동의 기동을 봉쇄하였다는데 있다. 복지국 가(福祉國家)를 실현한 일부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실업수당과 같은 사회보장정책에 기반하여 기아의 위협이 사실상 제거된 상태에서도, 여 전히 노동은 훌륭하게 기동하였다.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에 있어 서는 철저하게 사회보장이 시행되었음에도, 노동의 동기가 소멸하였다 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리하여 연대소득은 결코 노동의 동기를 소멸 시키는 것은 아니다.

연대소득은 모든 노동의 동기를 소멸(消滅)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 것은 자아실현적인 노동의 동기를 강화하고 일부 고통으로서의 노동을 제거하게 한다. 사람들은 어떠한 수준 이상의 고통이 수반되는 노동은 하지 않고 연대소득과 연금소득으로 만족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연대소득은 노동의 동기를 소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성격(性 格)을 변화시킨다. 기아의 위협 속에서는(즉,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인 간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육체를 병들게 하 고 그리하여 그것이 장기적으로 자신을 죽게 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살아남기 위하여 감수하는 것이다. 연대소득은 이러한 노동의 동 기를 소멸시키고 그러한 노동을 사회에게 추방(追放)한다. 그것은 노 동의 일반적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대소득은 노동의 동기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공급을 변화시키는 것이 다.

인간이 노동하는 동기는 절대적인 기아의 위협만이 아니라 상대적인 자신의 사회적 향상(向上)과 발전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그가 규정하 는 가치관의 기준으로 더욱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노동하는 것이다. 인 간에게는 어떻게 먹고 사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가 무엇 을 하고 있으며, 그는 사회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가 생존하는 것 이상으로 그는 누구인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 역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기아를 전제(前提)하지 않는 노동의 동기 인 것이다. 연대체제에 있어서 시장소득과 연금소득이 이러한 동기를 상징한다. 시장소득과 연금소득은 개인적인 편차(偏差)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차등적(差等的)이다. 이것이 노동을 형성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시장소득의 편차는 사회관계 속에서 개인을 위치(位置)를 규정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은 시장소득이고 그것은 노동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개인은 시장소 득을 획득함으로써 물질적으로 더 나은 삶을 꾸릴 수 있고 사회적으로 더 나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 나아가 시장소득의 일부로서 연대매체를 획득함으로써 미래의 삶을 예비할 수 있고, 사회조직에 있어서 지위를 구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실현할 수 있으며, 조직을 통 한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다. 이러한 동기가 연대체제에 있어서 노동 의 기동기제(機動機制)이다. 그리고 이것은 낯선 동기가 아니다. 실제 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동기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기아의 위협을 의식하여 노동하는 것이 아니 라, 조직과 사회에서 자신의 상승(上昇)과 발전 그리고 자아실현을 위 하여 일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 있어서 연대체제와 자본주의는 본질 적으로 같다.

4. 노동 : 욕망(慾望)과 고통(苦痛)

노동 그 자체는 고통도 아니고 희열(喜悅)도 아니다. 노동이란 인간 의 움직임이고 실천이고 사건이다. 노동의 고통이나 희열은 노동이라 는 사건에 관계하고 있는 여러가지 관계적 상황(즉, 因緣)에서 야기되 는 인간의 감정인 것이다. 노동의 고통이란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동작 을 상황적으로 강요당하는데서 야기되는 것이다. 노예나 농노(農奴)의 노동은 물리적 법률적 강제(强制)가 그러한 상황을 형성하고 있다. 자 본주의에서는 사회적 물리적 강제를 제거한 대신에 생존해야 한다는 상 황을 기아의 위협을 통하여 조성하였다.

반대로 노동의 희열 역시 노동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 에 대한 관계적 상황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이 자신이 원 하는 일을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희열을 낳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희열이 없는 노동을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 다. 이것이 자아실현(自我實現)으로서의 노동이다. 이러한 경우 노동은 자아실현을 위한 인간의 가치추구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매춘(賣春)에 서 이러한 점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창녀(娼女)에게 있어서는 성적(性 的) 행위가 고통으로서의 노동이다. 반대로 손님에게 있어서는 창녀와 동일한 성적 행위가 희열인 것이다. 그 차이는 행위 자체에서 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행위이지만 창녀의 행위를 야기시키는 여러관계 (因緣)들-- 화대(花代)가 아니면 기아라는 상황, 동일한 행위를 계속적 으로 되풀이 하는 것-- 이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와 감 정의 관계들이 야기하는 희열까지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손님 의 경우에는 반대로 나타난다. 손님은 다른 고통에서 벗어나 한순간의 희열을 찾아온 여러관계(因緣)들 -- 자유로운 상황에서 자신이 원하여 자신이 선택한 행위 --이 희열을 야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 일한 행위에 대하여 하나는 노동(勞動)이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는 오락 (娛樂)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노동의 고통의 문제는 노동의 상황(즉, 因緣)에서 야기되 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의 근원은 물질적 가치에 대한 수요(需要)와 공 급(供給)의 관계이다. 모든 사람들은 수요자이면서 동시에 공급자이 다. 모든 사람들이 욕망으로서 음악을 듣기를 원한다고 하자. 그런데 동시에 모든 사람들은 자아실현으로서 화가(畵家)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자. 그 결과는 모든 사람들이 생산하는 그림은 팔리지 않고 쓰레기가 되어 버릴 것이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은 음악을 들을 수 없을 것이 다. 이것은 누구의 뜻도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수요를 독립적인 것으 로 하고 공급이 수요에 적응해야 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 들은 화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노래를 생산하 게 될 할 것이다. 이것이 강요되는 노동의 상황이고 그리하여 노동의 고통의 성격을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반대로 공급이 독립적(獨立的) 이고 수요가 공급에 적응해야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 신들이 원하는 자아실현으로서 화가가 되어 그림을 생산하게 될 것이 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공급에 적응하여 그림을 사고 감상하게 될 것이다. 그대신 사람들은 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 면 안될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노동(勞動)과 욕망 (慾望)에 대한 관계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욕망에 몰 두하면 몰두할 수록 노동의 고통은 증가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노동이 고통이 아니라 자아실현으로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망이 순화(馴化)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요에 있어서 더 많은 욕망은 공급과정에 있어 서 더 많은 노동의 고통을 야기한다. 공급과정에 있어서 더 적은 노동 의 고통은 수요에 있어서 더 적은 욕망만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을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고통을 감소시킬 수는 없다. 욕망(慾望)과 고통(苦痛)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다. 더 많은 욕망은 더 많은 고통 을 생성시키고, 더 적은 고통은 더 적은 욕망을 충족시킬 뿐이다. 모든 노동이 자아실현적인 노동이 된다면 노동의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그 러나 그러한 자아실현적인 노동이 생산하는 공급물이 공급자 자신의 수 요을 채워줄 수 없다. 반대로 모든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면 인간은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 해서는 무한한 노동의 고통이 요구될 것이다.

4. 노동에 대한 근대적(近代的) 해결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하나의 전제(前提)를 가지고 있다. 즉, 수요 와 공급은 독립적이고 욕망과 고통은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러한 전제는 진실이 아니다. 수요와 공급은 상호규정적이며, 욕망과 고 통 역시 상호 규정적이다. 인간의 수요와 욕망은 공급의 상황에 적응하 기 마련이고, 인간의 공급과 고통 역시 수요의 상황에 적응(適應)한다. 욕망은 공급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약에 대 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급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순전히 심리적인 것이지 경제적인 욕망이 아니다. 그러한 욕망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욕망은 공급되는 물질 그리고 공급될 수 있는 물질에 대한 욕망이다. 이것은 공급이 우리의 수요과 욕망에 미치는 영향이다. 마찬가지로 인 간의 고통도 상황에 적응하며 인간은 상황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견 한다. 상황이 완전히 배제된 챵 독립적으로 욕망과 가치와 고통이 규정 되는 것은 아니다. 노예도 삶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를 찾고 행복을 발 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과 고통, 욕망으로서의 수요와 고통으로서의 공급은 모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연기하는 것이다.

노동문제의 본질(本質)은 이러한 것이다. 그것은 우선 어떻게 자아 실현적인 노동과 공급에 적응할 수 있는 욕망과 수요를 창조할 수 있는 가 하는 문제이다. 다음으로 어떻게 수요와 욕망에 적응할 수 있는 자 아실현적인 노동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근대사회(近代社會)는 이러 한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았다. 근대와 현대의 현실은 욕망과 노동을 존 재론적(存在論的)으로 분리(分離)시킨다. 즉 욕망은 인간의 본성에서 야기되는 것이고 노동은 생산과정에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 본주의는 인간이 더 많은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욕망을 생산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구(人口)의 분리를 가져왔다. 즉 일부의 인구집단(人口集團)에게는 순전히 고통으로서의 노동을 부과 하고, 일부의 인구집단은 무한한 욕망의 추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고통으로서의 노동을 감수하는 인간과 고도의 욕망을 충족시키 는 인간은 서로 다른 인간들이다. 그것은 서로 다른 집단이고 서로 다 른 계급이다. 그것은 일부는 고통을 부담하고 일부는 욕망을 충족하는 체제이다.3)

그러나 노동의 문제는 이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욕망과 고통의 상호관계에서 접근해야 한다. 공급과 생산의 측면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상황의 변화는 우리의 욕망과 수요를 그러한 변화에 적응하게 만든다. 곡물(穀物)의 생산이 일반적으로 감소하고 생산증가의 가능성도 없고 육류(肉類)의 생산이 증가한다면 우리의 쌀밥에 대한 욕망은 육류에 대 한 욕망으로 전환하게 된다. 반대로 분배와 수요의 구조에서 일반적인 상황의 변화는 공급과 노동이 그러한 상황에 적응하게 된다. 이러한 상 호적응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 즉, 공급과 수요의 변화는 전체적이고 일반적(一般的)이어야 한다. 일반적 변화가 아닌 한 부분 (部分)에서의 변화는 변화를 야기하지 못하고 그 부분을 질식(窒息)시 킨다. 한 기업에서만 자아실현적인 노동을 추구한다면, 그 부분은 수요 의 변화를 야기하지 못하고, 따라서 수요를 만나지 못하여 그 기업이 도산하게 될 것이다. 한 부분에서만 욕망과 수요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그 부분은 공급과 노동을 개선하지 못하고 다만 현실의 낙오자가 될 것 이다. 현실의 물질문명에 저항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자(聖者)가 되거나 현실의 낙오자(落伍者)가 되는 것이다.

5.연대체제에서의 노동의 변화

경제체제(經濟體制)의 변화는 수요와 공급, 욕망과 노동의 고통에 일반적(一般的)인 변화를 야기한다. 그것은 공급과 노동의 측면에서의 일반적인 체제적 변화가 욕망과 수요의 변화를 야기한다. 한편 욕망과 수요의 측면에서의 일반적인 변화가 공급과 노동의 상황을 변혁하는 것 이다. 연대체제(連帶體制)에서는 세 가지 체제적 성격이 이러한 일반적 (一般的)인 변화를 가져온다. 하나는 공급과 노동의 상황을 일반적으로 변화시키는 연대소득(連帶所得)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화폐소득의 평등(平等)한 분배구조이다. 나머지 하나는 새로운 일반적 가치를 표상 하는 연대매체(連帶媒體)의 기능이다.

연대체제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노동과는 무관하게 무조건적으로 주 어지는 절대적으로 평등한 연대소득제도가 있다. 이것이 노동과 공급의 상황을 일반적으로 변혁한다.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기아(飢餓)에 위 협당하여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 노동은 더 이상 기아의 채찍에 의하여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상황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변화는 노 동하는 사람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그것은 생산과 공급의 일반적인 조 건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수요(需要)와 욕망(慾望)은 그것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오로지 기아의 강요에 의하 여 생산될 수 있는 상품에 대한 욕망을 포기(抛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강도가 높은 노동이 생산하는 상품은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해야 할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많은 가격(價格)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연대체제에서는 소득의 분배(分配)가 평등하다. 이러한 평등한 소득 분배구조는 소비수준(消費水準)을 평등하게 하고, 이것이 우리의 욕망 (慾望)과 수요구조를 일반적으로 변혁한다. 그것은 계층적 소비구조에 의한 물질적 욕망의 창조가 중지(中止)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경제 구조는 욕망을 경쟁적으로 생산한다. 불평등(不平等)한 소득구조는 불 평등한 소비구조를 야기하며, 불평등한 소비구조는 모든 계층에 대하여 욕망을 생산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더 많이 소비하거나 상대적으로 더 적게 소비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적게 소비하는 사람들의 불만과 욕망을 창조(創造)하며, 자신보다 더 많은 소비하는 사람들을 보고 자신의 불만과 욕망을 창조하는 것이 다. 이것이 물질적 욕망의 포트래치(上卷 제7편 참조)이다. 우리의 욕 망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평등한 분배구조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연대체제에서 의 평등한 소득분배구조는 이러한 욕망의 창조가 정지(停止)되는 것이 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물질의 소유와 소비에 있어서 과거와 같은 격심 한 경쟁상터(競爭狀態)에 있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인간과 삶의 가치가 물질적 소유와 소비의 격차(隔差)에 의하여 규정당하지 않게 된다. 이 것이 경제의 욕망과 수요구조를 일반적으로 변화시킨다. 노동과 생산은 이러한 수요구조의 변화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무한한 욕망 에 의하여 종속적으로 규정되는 소외(疎外)된 노동에서 해방된다. 노 동은 이제 자신의 자아실현적(自我實現的)인 노동 가운데에서 수요를 만날 수 있는 노동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자아실현적인 노동과 수요를 만난다는 것은 곧 생산자와 수요자가 함께 자아실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수요자와 공급자의 연대(連帶)이다.

연대매체(連帶媒體)는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인간을 조직(組織)시 키는 매개체이다. 연대매체는 조직을 통하여 연대자본(連帶資本)을 배 분받는 매개체이다. 그것은 이제 노동의 과정이 단순히 자본이 노동을 고용(雇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조직(組織)이 먼저 형성되고, 그 러한 조직에 사회적 연대자본이 부여(賦與)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대체제에서의 노동은 더 이상 자본(資本)에 의하여 규정당 하는 노동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조직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이 된다. 연대매체는 다수의 사람들이 관계(즉 組織)를 형성하고 그러한 사회적 관계를 통하여 자아실현에 나아가는 매개체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순전히 연대체제 자체의 논리일 뿐만 아니라 노동이 변화해가는 역사적(歷史的) 방향이기도 하다. 강제에 의한 노예노동(奴 隸勞動)은 농업생산인 경우에 가능한 것이다. 노예노동의 붕괴는 인도 주의(人道主義)의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업생산의 필요에 의한 것 이다. 공업생산은 기아와 금전적(金錢的) 보수에 의한 임금노동이 필요 한 것이었다. 정보혁명(情報革命)에 의하여 표상되는 새로운 생산방식 은 이제 기아의 위협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자아실현적인 노동을 필요 로 하고 있다.4) 새로운 생산방식은 자아실현과정에서의 창의성을 야 기시킬 수 있는 경우에만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으로 그 성격이 바뀌고 있다. 연대체제는 이러한 자아실현적인 노동을 현실화하는 체제적 기 제인 것이다.5)


***주1)***
만일 우리가 노동상황의 技術的인 측면과 社會的인 측면을 따 로 생각해 본다면 사회적 측면이 만족할만한 경우 기술적인 면에 관한 한 여러가지 형태의 노동의 성질상 흥미는 없지만 노동상황의 사회적인 측면이 그것을 의미있고 매력있게 만들어주는 노동형태도 있다. 첫번째 예를 들어 논의를 시작해 보면 사람들 가운데는 철도기술자 가 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철도기술이 근로계 층 가운데 가장 높은 봉급을 받고 또 가장 존경받는 위치라고 해도 '더 나은 일을 하고저 하는' 사람들의 야망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의미가 변한다면 경영자 가운데 자신의 일보다 철도기술자 가가 되는 것에 더 큰 즐거움을 발견할 사람들이 많을 건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다른 예를 들어 식당에서 일하는 給仕의 경우를 보자. 이 경우에도 사회적 威信만 다르다면 이 직업도 많은 사람들에게 꽤 매 력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끊임없이 여러사람들과 접촉 하고 음식을 즐기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 직업이 사회적으로 낮게 평가받고 적은 수입을 받지만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사무실에 앉아 의 미없는 숫자만 만지기보다 급사로 일하는데 더 많은 즐거움을 느낄 것이 다. 또 한가지 예를 들자면 사회적 경제적으로 부정적인 측면만 없다 면 택시 운전사 직업을 좋아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여기 다시 노동의기술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의 구별이 중요하다 는 것이 입증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정말 아무런 재미가 없다고 해도 전체적인 노동상황이 꽤 많은 만족감을 줄 수도 있다. 이 점을 설명하 는데 도움이 될 몇가지 예가 있다. 가정을 돌보고 요리를 만드는 主婦 와 똑 같은 일을 하면서 봉급을 받는 家政婦를 비교해 보자. 가정주부에 게나 家政婦에게나 그 노동은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똑 같고 특별히 재미 나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편이나 아이들과 행복한 가족관계 를 갖고 있는 여인과 공용주와 아무런 감정적 애정을 갖고 있지 않은 일 반적인 가정부를 생각해 본다면 이 두 여인의 노동은 그 의미와 만족감 에 있어서 전혀 다르다고 할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저. {건전한 사회} 김병익 역. p. 277-279)

***주2)***
자본주의의 기초가 놓이고 노동자를 고용하는 조직적 공업이 일 반에 널리 번지게 되자 이와같은 (빈민구제에 관한) 관대한 태도에 비 난의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740년 디포우는 "積善을 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요, 貧民의 雇傭은 국가의 불행이다." 라는 제목의 팜플렛 을 간행하였다. 빈민을 구제하면 그들은 언제까지든지 게으름을 필 것 이요 또 그들을 求貧院에서 일하도록 해 준다면 이번에는 製造業者가 그 의 노동력의 供給源을 빼앗기게 될 것이니 결론은 그들을 노동시장에 내 던져서 만일 거기에서 일할자리를 얻지 못하면 굶어죽도록 하는 것이 옳 다고 그는 논하였다...... 1785년 윌리암 타운세드는 그의 "구빈법에 대한 논문" 에서 구제도에 대한 반대의견을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진술 하고 있다. "飢餓는 아무리 사나운 동물이라도 길을 들이듯이 아무리 고집센 인간에게라도 정중한 태도와 예의, 순종과 복종을 가르쳐주는 것이 다. 대저 그들을 노동하도록 부채질하고 자극을 주는 것은 오로지 기 아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법률은 그들을 굶주리게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법률에 의하면 그들을 强制로라도 일하게 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벌뷸적 구속에는 허다한 곤란, 폭력, 소요 등이 따르게 되며 악감정을 일으키고 그리하 여 결국 훌륭하고 만족할만한 노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에 대해서 기아는 조용하면서 말없고 끊임없는 壓力이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을 근면과 노동으로 합하게 하는 가장 자연적인 동기가 됨으로써 비상한 노력을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기아가 타인의 관대한 은혜로 만족되어질 경우에는 선의와 감사의 영속적이고 확고한 기초를 세워놓 는 것이다." (e.H. Carr 저. {새로운 사회} 박상규 역 pp.68--70 )

***주3)***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 곧 進步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해당되는 時點에서마다 노동생산성이 향상됨으로써 이 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거니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종종 격렬 한 사회적 대립 속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쟁취되었던 것이기도 할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진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점진 적인 진보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던가. 요컨대 노동이란---각각의 시대 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척도로 진단해 보았을 때 --- 엄격하게 불만 족스러운 노동조건과 불만족스러운 사회적 관계들 아래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人口集團에 의해서 물질의 생산이 수행되는 현상을 일컫는다고 하는 이 本質的인 사실에 관한한 거의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 고 말았던, 그러한 점진적 진보에 불과한 게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 Helmuth Schneider 등 共著가{노동의 역사} 한정숙 역 p. 541)

***주4)***
경제생활을 지배하는 實權은 시대와 더불어 변화해 왔다. 옛날 에는 경제의 실권이 토지에 결부되어 있었지만, 후에는 자본에 실권이 옮겨가고, 나아가 근자에는 지식과 기능의 집합체인 기술구조에 실권이 옮겨가고 있다. 현실이라는 것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도 그 균형을 반영해서 경제의 실권의 변화에 따라 사람을 움직 이는 刺戟誘引도 변화해 왔다. 强制는 옛날 토지에 결부되어 있었다. 金錢的 유인은 마찬가지로 자본과 결부되어 있었다. 共鳴(identificati on)과 適應은 기술구조와 결부되어 있다. 토지가 생산요소로서 기본적 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던 무렵에는 강제라는 유인을 사용하는 것이 극히 유리했었다. 농업은 그 성질상 사람들을 넓은 토지에 흩어 놓는 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호를 필요로 했다. 봉건영주는 경작자로서의 인 민의 노력을 지휘하는 동시에 그들의 공동방위를 위해 인민을 군대조직 의 기본적인 단위로서 조직했다........ 자본이 전략적인 생산요소로서 등장하게 되자, 금전적 보수가 제일 의 자극유인으로 되었다. 공업기업에 있어서는 자본의 소유가 지배력을 가져오게 했다, 자본의 물질적 표현으로서의 화폐가 노동을 산다고 하 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다. 封建領主가 강제력을 가져 이 것을 사용하는 것에 의해 타인을 그의 목표에 따르게 한 것과 마찬가 지로, 자본가는 자본을 가져 이것을 사용하는 것에 의해 타인을 그의 목표에 따르게 했다. ( 갈브레이드 저. {새로운 산업국가} 최광열 역. p. 181-182)

***주5)***
산업의 발전에 따라서 필요한 노동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이 다. 農業生産에 있어서는 물리적 신분적 강제에 의존하는 노예노동이나 농노의 노동이 가능하다. 농업생산에 있어서는 노동자의 自發性이나 유동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工業生産에 있어서는 노예노동은 가능하지 않다. 농업위주의 중세사회에서 근대 공업사회로 전환하면서 임금노동자가 생산을 담당하게 된 것은 공업생산에 있어서는 임금노동 의 형태가 강제적 노동보다 더욱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 국의 南北戰爭 당시 남부의 농업노동과 북부의 공업노동과의 緊張으로 나타났다. 북부의 공업노동에 필요한 것은 노예가 아니라 임금노동자였 다. 노예의 강제된 노동은 노동자의 自發性이 생산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산업에만 가능한 것이다. 한편 標準的인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 하는 공업사회에 있어서는 노동자를 기아로 위협하고 화폐적 報酬로 誘 引함으로써 그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자발적 복 종이 아니라 創意를 야기시킬 수 있는 경우에만 노동이 성과를 낼 수 있는 경우에는, 기아에 위협되는 임금노동은 적절하지 않다. 情報革命 으로 불리워지는 경제의 새로운 변화에 있어서는 임금노동은 적합한 형 태가 아닌 것이다.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공업생산은 노동자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정보와 창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기아에 위협되는 임금노 동은 고통을 堪耐시킬 수는 있으나 創意性을 기대할 수 없다. 정보화사 회에 있어서는 창의성을 발휘하는 자아실현적인 노동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동일한 노동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동일한 가사노동을 하더라도 그 노동에 생계를 매달고 있는 가정부나 파출부의 노동과 남편이나 자식을 위하여 일하는 가정주부의 노동은 다른 것이 다. 그것은 고통의 차원에서도 그러하고 생산되는 상품의 질에 있어서 도 그러하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회에서는 기아의 협박에 의존하거나 금전적 보수만이 동기가 되는 노동에 의하여 생산되는 상품이나 서어비 스는 競爭力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