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생산력 해방의 문제

6.3.1. 소비자주권(消費者主權)과 경제적 민주주의

경쟁적 시장에서 공급자와 수요자는 모두 경쟁상태에 있다. 생산자 들은 원자적(原子的) 경쟁상태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가격에 대하여 헤 게모니가 없다. 생산자들은 가격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편 가격은 소비자들의 수요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러므로 소비자는 가격 을 통하여 생산자를 심판하고, 생산자의 운명은 소비자에 의하여 좌우된 다. 경쟁적 시장에서의 상품의 생산량과 형태를 결정함에 있어서 소비자 가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경쟁시장에서 소비자는 왕(王)이다. 보통 소비자주권(消費者主權)이라고 불리어지는 이러한 논의는 정치적 관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 소비자가 경쟁적 시장에서 상품을 구입하는 것은 재화에 대하여 화폐로 투표(投票)하는 행위로 바꾸어 말할 수 있 다. 화폐를 투표권으로 하는 소비자의 투표는 기업이 내세운 후보자(상 품)에 대한 득표(得票)로 나타난다. 이러한 화폐매체의 득표에 의하여 기업의 이윤이 결정된다. 그리고 득표를 많이 한 기업만이 계속 생산자 로 살아남을 수 있으며 발전할 수 있다. 기업은 화폐득표를 많이 하기 위하여 계속 소비자수요의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생산자들은 득표를 많이 하기 위하여(돈을 벌기 위하여) 끊임없이 소비자들의 선호 를 발견하려고 애쓴다. 따라서 생산자는 소비자의 눈치를 살피는 종복 이고 소비자는 항상 생산자를 심판하는 주권자(主權者)인 셈이다.1)

이같은 고찰은 경제와 정치가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을 보여준다. 비시장사회(非市場社會)로서 관리사회주의를 가정한다면 위와 같은 사항의 결정은 공공적 문제이고 권력(權力)의 권위적 결정에 의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권위적 결정은 그 결정의 정당성(正當性) 여 부가 정치적 성격을 가진다. 소비자의 화폐에 의한 투표에 비하여 정치 적 선거제도에 의하여 선출된 정치인이나 관료(官僚)의 결정이 더욱 민 주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경쟁적 시장은 헤게모니의 정당성 여부의 문제 가 제기되지 않고 모든 것을 순수한 경제적 문제로 처리하면서, 정치적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 더욱 민주주의적(즉 모든 사람들의 일상적인 투표 = 購買)으로 해결한다. 말하자면, 경제적 구조 자체가 민주주의를 함축 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누구를 위하여 생산할 것인 가?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은 정당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하여 순수한 경제적 과정(시장의 가격과 구매)이 가장 민 주적으로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비자주권의 이념은 독과점시장에서는 작동할 수 없으며, 사전적(事前的)인 결정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도 무용한 것이다. 독과점 은 소비자주권의 전제인 경쟁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 주권이 일단 상품이 생산된 이후의 사후적(事後的) 심판이며 사전적(事前的)으 로 자원(資源)을 배분하고, 무엇을 생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독점은 전혀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경제적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경제적 헤게모니의 정당성(正當性) 문제이 며, 생산력 해방(生産力解放)의 문제이다.

6.3.2. 독과점(獨寡占)의 헤게모니

현대의 자본주에서는 독과점 대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다. 가령 수십개 수백개의 기업이 그 국가의 모든 재화 및 서어 비스의 반(半) 이상을 생산할 수도 있다. 또는 거대한 몇 개의 기업의 수익이 농업, 임업, 어업에 종사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의 수익을 상회 (上廻)할 수도 있다.2) 발전된 자본주의국가의 양상은 그 국가의 총생 산의 압도적 부분이 소수의 독과점대기업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급기야 는 시장이 독과점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것이다. 독과점을 야기한 원인은 여러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나 일반적으로 생산력(生産力)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산력의 증대는 결국 하나의 기업이 충당할 수 있는 수 요의 범위를 확대한다. 수요가 그에 비례하여 증대하지 않는 한 독과점 의 경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시장을 시장의 근본으로 생 각하고 현실의 독과점시장을 경쟁시장으로 접근시키려는 정책방향은 시 대착오적(時代錯誤的)인 것이다.

독과점대기업은 시장가격에 대하여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다. 시장가 격은 더 이상 주어진 여건이 아니며, 생산자가 적응해야 하는 것도 아니 고, 생산자를 심판하는 것도 아니다. 독과점대기업은 스스로 가격을 결 정하며 수요와 비용을 지배한다. 이처럼 독과점 대기업이 비용, 수요, 가격에 대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는 경우에는 투자(投資)와 생산(生産)을 하지 않기 대문이 다. 가령 연구개발(硏究開發)이란 아무 상품이나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경제성(經濟性) 있는 제품을 개발 하는 것이다.3) 독과점대기업은 생산 이후의 사후적(事後的)인 소비자 의 심판과 시장에 그 운명을 맡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사전적 (事前的)으로 예측되고 조정되고 계획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조정 과 계획을 뒷받침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거대 한 규모의 투자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독과점대기업과 원자적 경쟁기 업은 질적(質的)으로 다른 것이다. 원자적 경쟁기업은 사후적인 가격작 용에 의하여 사회적으로 통합되는데 대하여, 독과점대기업은 사전적인 지식과 정보(情報)에 의하여 계획되고 조정되어야 한다.4)

문제는 독과점 그 자체가 아니라 독과점대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헤 게모니의 정당성(正當性)이다. 가령 어떤 국가에서 국민의 승용차를 전부 공급하고 있는 3개의 독과점대기업이 있다고 하자. 그들은 승용차 의 가격을 인상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으며, 승용차의 품질을 결정하는 헤게모니와, 새로운 모델을 개발함으로써 욕망을 창조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다. 필요하다면 승용차의 생산을 줄이거나 중단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으며, 독점이윤을 취득함으로써 분배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다. 이것은 수십명의 국회의원의 권력을 합친 것보다 더욱 강력한 헤게모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들은 국민의 생활(生活)의 일부분을 직접 지배(支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헤게모니는 어떠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국회의원은 선거에 의하여 그들의 권력헤게모니에 대하여 정당성이 주어진다. 독과 점대기업의 헤게모니는 자유와 사적(私的) 이윤의 추구라는 이유로 정 당화될 수 있는가?

6.3.3. 욕망창조(慾望創造)와 삶의 질(質)에 대한 헤게모니

독과점대기업은 인간의 욕망을 창조함으로써 수요와 가격을 지배한 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심리적(心理的) 헤게모니이다. 이러한 헤게모 니는 권력의 헤게모니보다 더욱 심원(深遠)한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헤게모니가 인간의 삶과 문명에 미치는 영향력에 비하면 권력의 헤게 모니는 단순한 것이다.

케인즈는 인간의 욕망은 편의상 두종류로 구분하였다. "남이야 어 떻게 되든 자기는 그것을 가지고 싶다고 하는 절대적(絶對的)인 필요 와, 그것을 만족시킨다면 남보다도 잘난 것 같이 느껴진다고 하는 상대 적(相對的)인 필요 두가지이다."5) 절대적인 필요는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으로서 생존하는데서 야기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이에 대하여 상대적인 욕망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야 기되는 욕망이다. 상대적인 욕망(필요)은 모든 사람들의 소비가 모든 사람들의 욕망을 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사회에 있어서 생산물 이 많아지면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 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감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 요로 하는 물품이 많아지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의 소비(消費)는 이웃 사람의 소원(所願)으로 된다. 이것은 욕망이 충족되는 과정은 동 시에 욕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6) 자 본주의사회의 소득의 불평등 구조는 이러한 상대적 욕망의 체계를 구조 화시킨다. 소득의 계층적 사다리는 모든 인간의 욕망을 창조하는 사다 리이다. 한 계층의 소비는 그 이하 계층의 욕망을 창조한다. 이러한 구 조에서는 생산자체가 욕망을 창조하는 과정인 것이다. 생산은 일부 집 단의 욕망을 총족시키고 동시에 다른 집단의 욕망을 생성시키는 것이 다.7)

독과점대기업은 이와 같은 욕망창조의 구조적 요인(構造的 要因)에 만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독과점대기업은 직접 인간의 감성(感 性)에 호소하여 적극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창조한다. 현대의 자본주의 경제에는 이렇게 욕망을 창조하는 사업이 하나의 거대한 산업을 형성하 고 있으며 수많은 전문가들이 최고의 지식과 아이디어를 동원하고 수많 은 비용이 지출되고 있다. 광고산업(廣告産業)이 그것이다. 많은 상품 에 있어서 그 상품의 제조비용보다는 그 수요를 창조하기 위한 비용이 더욱 중요하다. 어떤 상품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러한 수요창조의 비용 이 그 상품의 제조비용보다 더 크다. 커뮤니케이션수단과 텔리비젼의 발전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모든 인간들에 대하여 하루에 몇시간씩 붙 들고 욕망창조의 무의식적인 과정을 일상화한다. 현대의 광고산업의 발 전은 인간의 욕망이 존재적(存在的)이 아니라 연기적(緣起的)인 것이라 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제 욕망은 인간의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광고에 의한 설득에서 야기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되 고 있다. 본능으로서의 욕망은 이렇게 창조된 수요를 정당화하고 합리 화하는 명칭에 불과하다.8)

욕망이 창조된다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삶의 가장 기 본적이고 일반적인 형태가 욕망의 충족이 라면, 욕망의 창조는 바로 삶 을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1차적인 형식이며 내용이 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이 외부에 의해서 생성된다면 우리의 삶은 욕망 을 생성시키는 사람에 의하여 규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가 창조한 욕망을 우리의 욕망이라고 생각하고, 그 욕망의 충족에 매달리 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노동하고, 그것을 충족하는 것을 삶이라 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실한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인 논의는 현실에 있어서는 중 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삶이 진실로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 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인생 그 자체에 대한 진리보다는 오히려 인생에 관한 상식적(常識的)인 집합 표상이 현실에 있어서는 더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眞理)가 실 천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식적 집합표상이 사회적 실천을 야기시 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에 관한 상식적 집합표상은 욕 망창조의 과정에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삶이 무엇인 가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물건을 구입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구입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현실의 삶이 규정되는 것이다. 선진국 사람들이 더 멋있는 삶을 살고 부유한 사람들이 더 멋 있는 삶을 살며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바로 삶의 일반적인 모습인 것이다. 그것은 철학자가 오랜 고뇌 끝에 발견한 삶의 진정한 의미보다 현실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위상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일반적일 때, 물질적 욕망 이상의 가치를 찾 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는 철학자의 주장은 광야(廣野)의 외침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가치판단이 아니라, 삶에 관한 사회의 정감적(情感的) 집합표상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리고 삶에 대한 이러한 정감적 집합표상이 바로 욕망의 창조과정에 의하여 규정되 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의 창조라는 사실이야말로 자본헤게모니 가 우리 자신과 사회와 문명을 지배하는 양식이다.

풍요한 사회에 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불만족이며, 인간은 서로 대 립하고, 상대적 빈곤만이 아니라 수많은 절대적인 빈곤이 존재한다. 나 아가 풍요함에도 불구하고 생존투쟁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여기에 우리는 하나의 모순을 발견한다. 우리의 사회가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 한 사회라면 우리는 인류역사상 가장 행복하여야 하고, 인간들 사이에 는 연대감(連帶感)이 충만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모순이 있다. 우리의 생산력은 인간 생활의 기본적인 수요를 충분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도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 람들이 여전히 굶주리고 있으며 빈곤하다. 그리고 생존경쟁은 더욱 치 열하고 인간은 더욱 적대적이다. 우리가 이룩한 생산력은 이러한 사람 들을 위하여 쓰여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 즉 욕망을 창조하지 않으면 그 물품을 구입하지도 않을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지고 있다. 왜 그러한 가? 도대체 이러한 모순을 형성하고 있는 문제의 정체는 무엇인가?

6.3.4. 생산력 해방의 문제

우리는 위의 모순을 생산력을 인간적 필요를 위하여 해방하는 문제 로 규정한다. 그것은 생산력으로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도 하고, 생산내용을 결정하는 헤게모니는 어떻게 정당화되어야 하는 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여 러사람의 서로 다른 견해와 처방이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소유의 사적(私的) 성격이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모순(矛盾)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모순에 적용한다면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생산은 사적 소유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고 사적인 이윤동기에 의하여 지배된 다. 따라서 필요한 생산과 실제의 생산은 일치하지 않는다. 사적 동기 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생산은 욕망을 창조해서라도 구매력이 있는 사람 들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다수의 사람에게 긴요한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고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중요하지 않은 생산이 이루어지 는 것이다. 사적 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구매력을 동반한 유효수요 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욕망을 창조해서라도 구매력을 수요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되는 모순이 야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 산수단을 사회화 할 때, 생산력을 사적 소유의 질곡(桎梏)으로부터 해 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代案)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를 누가 결정하고, 그리고 생산자는 어떠한 동기로 생산하는가, 그러한 체제가 현대의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수준에 미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들이 제기된다.

생산력해방의 문제에 대한 마르쿠제의 주장은 철학적인 것이다. 후 기산업사회로서의 현대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고, 역사상 전례(前例)가 없을 정도로 인간에게 풍요와 자유를 줄 수 있는 능력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는 이러한 능력 을 가장 효과적으로 억압(抑壓)하고 있는 체제이다. 그러한 억압은 욕 망을 창조함으로써 물신숭배(物神崇拜)에 이르게 하고, 이러한 물신숭 배가 인간의식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지향을 재생산한다. 그는 이러한 억압의 구조를 혁명적으로 타파한다면, 인류의 역사상 최초로 인간이 연대의식(連帶意識)에 의하여 행동할 수 있는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억압이 제거되고 인간의 연대의식에 기 초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고 있다.9)

케인즈에게는 생산력해방의 문제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에 게 중요한 것은 고용의 문제였다. 1930년대 당시의 상황에서 고용의 내 용이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는 없으므로, 문제는 나머지 실업상태의 사 람을 고용하는 것이었다.10) 그러나 케인즈는 전혀 다른 각도(角度)에 서 미래상(未來像)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미래상에 있어서 욕망의 창 조와 빈곤, 풍요 속의 빈곤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토지의 희소 성(稀少性)은 본유적(本有的)인 이유가 있으나, 자본의 희소성은 자연 적인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충분한 고용과 충분한 자본축적이 계속된 다면 머지않아 자본이 희소하지 않은 상태가 도래할 것이다. 자본축적 이 충분히 진전되어 자본이 희소하지 않은 상태에 이르러서는 자본의 희소성에 기반하는 재산소득(財産所得) 계층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렇다면 소득의 평등(平等)한 분배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이러한 평등 한 소득에 대응하는 생산이 이루어 질 것이며, 투자의 문제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케인즈의 관점이었다.

갈브레이드에게 있어서 생산력해방의 문제는 경제학자와 우리 모두 가 과거 빈곤한 시대의 집합표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야기되는 것 이었다. 빈곤한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빈곤을 해소할 수 있 는 생산(生産)이었다. 생산이야말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 다. 그러나 이제는 빈곤한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욕망을 창조해야만 소비될 수 있을 만큼 풍요(豊饒)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집합표상은 빈곤한 시대의 생산제일주의(生産第一主義)에 매여 있는 것이다. 풍요한 시대에 있어서의 빈곤은 결코 생산의 부진(不振) 이 원인이 아니며 동시에 생산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풍요속의 빈곤은 사회적 불균형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생산이 사회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정부의 공공서어비스를 확장하여야 하고, 생 산이 아니라 공공부문 특히 교육이야말로 대대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죠안 로빈손에 의하면 오늘날의 자본가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고 있다. 현존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은 현재의 생산력으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이 모두 충족된 다음에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지금까지 자본가는 욕망을 창조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이 계속 될 수 있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욕망을 창조하여 해결하는 생산은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체제는 인플레이션과 실업, 경 제적 불안정, 늘어가는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 등 모든 문제를 여 전히 미해결인 채로 남겨두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경제학의 제 2의 위 기이다.(경제학의 제1의 위기는 고용의 수준(水準)을 설명할 수 없었다 는 데서 야기된 것이었다.) 이제 제 2의 위기는 고용의 내용을 설명할 수 없다는 데서 야기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케인즈 혁명은 위대한 지적(知的) 혁명이 아니라 뒤늦 게 찾아오고 받아들여지므로서 위대한 지적 비극이 되고 말았다. 무엇 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 고용의 내용을 해명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 경제학자들은 고용의 수준에 관한 케인즈의 이론에 묶여 있는 것이다.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소득분배와 관련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소득분배에 관한 이론은 모두 현재의 위기를 구제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경제학자는 모든 사람들이 해답을 원하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을 줄 수 없으며 명백한 것은 경제학이 파산하였다는 것이다.11)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생산력(生産力)의 해방(解放)의 문제로 규정 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도달한 생산력을 사용하여 무엇을 생 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이윤성의 기준에 의하여 생산 력의 사용이 결정된다. 철학적 진리에 입각하여 판단할 때, 아무리 인 간에게 필요한 가치라 하더라도, 이윤성(利潤性)이 없다면 그러한 가치 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르쿠제가 지적한 대로 우리 사회의 생 산력은 진정한 인간적 가치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 억압되어 있다. 원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있어서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또 는 생산력의 해방의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경 쟁시장에서 소비자 주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었으며 자동적으로 해 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소비자 주권이 아니라 욕망의 창조가 일반화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이러한 가정은 무너졌다. 소비자주권의 신화(神 話)는 무너지고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의 독과점의 헤게모니에 의하여 생산력 사용이 결정되었다. 독과점은 한편에 있어서는 생산력을 장악하 고 또한 소비자의 욕망에 대해서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다. 나아 가 인간의 욕망은 실재가 아니라 물질적 상품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것이라면, 생산력 해방의 문제,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경 제와 철학의 근원적인 문제가 된다. 그것은 바로 경제란 무엇이며 무엇 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자본주의적 질곡(桎梏)을 파괴한다고 하여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시 장이나 이윤성의 기준을 철폐한다고 하여 생산력이 인간적 가치를 위하 여 사용된다는 것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원점(原點) 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어떠한 기준으로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를 결 정할 수 있는가? 누가 그것을 결정해야 하는가? 그 헤게모니의 정당성 (正當性)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생산력의 해방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 인가?


주1)

물론 이러한 消費者主權의 이론은 과장되어 있다. 가격은 소비 자의 수요곡선만이 아니라 생산자의 공급곡선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리 하여 소비자주권론은 반쪽의 주권인 셈이다. 또한 소비자주권론은 1인1 표제가 아니라 화폐단위당 1표제이다. 그리하여 富者는 더 많은 투표권 을 가지고 貧者는 적은 투표권 밖에 가지지 못한다. 소비자 주권론이 경 제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인가 하는 점은 槪念定義의 문제이 다. 왜냐하면 경제적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정의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비자 주권의 이론은 경제에 있어서 하 나의 중요한 측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에 있어서의 정 치적 측면이고 동시에 경제에 있어서 헤게모니의 문제이다. 競爭的 시장 에 있어서 개별적 생산자는 시장이나 소비자에 대하여 전혀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지 않다. 소득의 분배가 평등하다면 모든 개인은 어느 누구에 대하여도 종속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일방적 헤게모니가 주어지지 않는 다.

주2)

미국을 예로 든다면 제조, 판매,운수,발전 및 금융에 종사하는 1천개의 기업이 국가에 의해 제공되지 않는 모든 재화와 서어비스의 약 折半을 생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集中이 가장 진행되고 있는 것은 제 조업이다. 미국 최대의 제너럴 모우터즈와 엑슨 양사의 수익을 합친다면 농업, 임업, 어업에 종사하는 모든 기업의 수익을 상회하는 숫자로 된 다. 1971년 1/4반기에는 10억 달러 내지 그 이상의 자산을 갖는 111개의 대기업이 제조업의 전자산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매상의 반 이상을 차 지하고 있었는데 대해 반을 대폭적으로 윗도는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또 5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갖는 333개의 대기업이 전자산의 꼭 70퍼센 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경제의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약 1,200만에 달하는 중소기업 이다. 그 중에는 賣上을 전부합쳐도 4대기업의총액에 미치지 못하는 약 300만의 농가를 비롯하여 300만을 약간 밑도는 자동차수리장, 주유소, 각종 기계 수리점, 세탁집, 새탁기 대리점, 음식점, 그밖의 서어비스 업 자, 200만의 영세한 소매업자, 약 90만의 건축업자, 수십만의 제조업자 등이 있다...... (갈브레이드 저. {경제학과 공공목적} 최광열 역 pp. 62- 63)

주3)

브리스톨-마이어즈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연구실에서 제품을 개 발하고, 다음으로 그 판매방법을 결정한다고 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 다. 그것은 보통, 광범한 소비자에 대한 반응시험 및 그 밖의 시장조사 로부터 시작하고, 이어서 광고경쟁에 관해서의 어떠한 생각까지 포함하 는 市場開拓 가능성에 관한 어느 정도의 전망을 세우고 난 위에 비로소 이러한 특정화된 조건에 적합한 지품의 개발을 연구실에 명하는 것이다. (갈브레이드 저. {새로운 산업국가} 최광열 역 p. 242)

주4)

결국 獨寡占大企業은 가격과 수요, 그리고 비용을 지배함으로써 시장에 대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독과점시장에 있어서 소비자 주권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여지가 없다. 모든 것은 독과점대기업이 지배 한다. 독과점대기업의 이러한 헤게모니는 독과점대기업의 경영자들이 貪 慾스럽거나 권력욕이 강하기 때문은 아니다. 독과점대기업은 거대한 액 수의 투자를 시행한다. 그러한 투자는 시장의 가격변동에 심판을 받아 순순히 撤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원자적 경쟁시장의 소규모 기업들은 경쟁가격에 따라서 이윤을 올리지 못하더라도 용이하게 투자를 철퇴하고 다른 사업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손해를 줄일 수 있다. 거대한 투자는 그렇게 용이하게 철퇴할 수 없으며 실패한 투자는 그대로 쓰레기 가 되어 버릴 것이다. 대기업의 투자는 그 회임기간이 길어 장기간에 걸 쳐 계속 비용이 지출되지 않으면 안된다. 생산공정이 길어질 수록 그에 필요한 운전자금이 계속 투입되지 않으면 안되고 기업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직원들에 대한 임금도 계속 지불되지 않으면 안된다. 동시에 생산 이 개시되어 投資費用을 회수하는 기간도 대단히 길어진다. 따라서 이러 한 대규모의 투자가 시장의 변덕스런 수요와 변동하는 가격에 의하여 수 익이 결정된다면 그러한 투자의 위험성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가격을 지배할 수 없다면 투자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독 과점대기업의 이러한 수요, 가격, 비용에 대한 헤게모니는 투자와 기업 의 존립을 위하여 不可缺한 것이다. 따라서, 독과점 대기업의 수요, 가 격, 비용에 대한 헤게모니, 그리고 그러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계 속적인 헤게모니의 확장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투자와 기 업의 구조에 나오는 것이며 경영주체의 인격적 품성에서 연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독과점기업이란 생산력이 거대한 규모에 이르는 투자사 업의 시장에서의 명칭이다. 그것은 시장에서는 독과점대기업이지만 생산 력의 측면에서 보면 가장 생산력이 증대된 산업인 것이다. 우리가 이러 한 상품의 생산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다면 모르지만 그러한 상품을 기꺼 히 소비하기를 원한다면 독과점을 비난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과점의 헤게모니의 正當性을 규정할 수 있는 체제적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주5)

케인즈. Essays in Persuasion 갈브레이드 저. 풍요한 사회. 최광열 역 p.162

주6)

케인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둘째의 종류의 필요 즉 남 에게 뒤지지 않겠다. 혹은 남보다 앞을 가겠다고 하는 노력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욕망은 " 만족시키려고 한들 한이 없을런지도 모른다. 왜냐하 면 일반적인 수준이 높으면 높을 수록 이러한 욕망도 크게 되기 때문이 다." 나아가 그 밖의 경제학자들도 타인과의 경쟁이라고 하는 것이 욕망 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사 람의 소비는 이웃 사람의 소원으로 된다. 이것은 욕망이 충족되는 과정 은 동시에 욕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충족된 욕망이 많으면 많을 수록 새로이 생겨나는 욕망도 많은 것이다. (갈브레이드 저. {풍요한 사회}. 전게서 p. 165)

주7)

그것은 생산자가 재화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욕망을 창조한다 는 것까지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實業家나 일반 독자는 누가 보아도 명백한 사실을 내가 강조하고 있으므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할 정도로 경제학자가 無視해 왔던 사실인 것이다. 경제학자는 門外漢과는 달라서 이러한 관계 속에는 기존의 개 념을 해치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모 든 경제현상 중에서도 가장 주제넘게 나서는 이 근대적인 욕망창조라는 현상에 눈과 귀를 가려 왔던 것이다. (갈브레이드 저. 전게서 p. 167)

** 근대적인 宣傳과 販賣術은 생산과 욕망을 한층 더 직접적으로 결 부시키고 있다. 선전과 판매술의목적은 욕망을 만들어 내는 것, 즉 그때 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욕망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므로, 자주적으로 결정 된 욕망이라는 개념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사회가 점차 풍요하게 되어 감에 따라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이 더 욱더 욕망을 낳게 한다. 이것이 消極的으로 이루어지는 수도 있다. 즉 생산의 증대에 대응하는 소비의 증가는 사주에 의하거나 허영심에 호소 하는 것에 의해 욕망을 만들어내는 작용을 한다. 혹은 생산자가 적극 적으로 선전이나 판매술에 의해 욕망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욕망은 생산에 의존하게 된다.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한다 면, 전반적인 생산수준이 낮은 경우보다도 높은 경우가 福祉는 보다 크 다고 하는 가정은 이미 통용되지 않는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 지일는지 모른다. 고수준의 생산은 욕망 창출의 수준이 높고 욕망충족 의 정도가 높다고 하는 것 뿐이다. 욕망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에 의존한다고 하는 것에 관해 금후에도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 되므로 그것을 依存效果라고 불러두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갈브레이드 저. 전게서 p. 166. 169. )

주8)

경제학자나 광고업자는 그것이 광고에 의하여 합성된 것이 아 니라 본래의 인간에 내재하였던 그 무엇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는 명제를 이용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 무한한 것 인지 그리고 과연 인간의 욕망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 가 식욕이 있으며 성욕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과연 우리가 지금 현재 사용하고 있는 수많은 물품들에 대한 욕망이 본래의 인간 내부에 욕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국 이것은 욕망에 대한 존재론적인 견해가 잘못이라 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속에 內在하는 실체가 아 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과 외부의 존재물에 대한 관계에서 緣起하는 것이다. 우리는 테레비젼을 구매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출생하는 것 이 아니다. 그리고 테레비젼이라는 상품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어서 는 테레비젼에 대한 욕망이 있을 턱이 없다. 우리가 테레비젼을 認識한 이후에 그에 대한 구체적인 욕망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품을 생산하는 것, 그리하여 상품으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는 것, 그 자체가 인간의 욕망을 創造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산 그 자체가 그 상품에 대한 욕망을 창조한다. 산업사회에 있어서 모든 생산 물에 대한 욕망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창조된 욕망이다. 또한 욕망은 합 리적인 것이 아니다. 소비자는 지금까지 구입해 온 재화보다도 훨씬 나 은 재화를 접할 기회가 있으면 그의 소득에 변화가 없거나 소득이 저 하하고 있어도 지출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듀젠베리(Due senberry)는 이러한 욕망의 과정을 誇示效果라고 불렀다. 넉시(nurks e)는 이러한 과시효과가 후진국의 소비경향을 왜곡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전지구적 커뮤니케이션의 발전은 후진국의 소비경향이 선진국의 소 비경향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은 우선 재화 에 대한 認識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산은 그 생산물을 어 떻게 인간에게 인식시키는가에 의하여 욕망이 창조되는 것이다. ** 우리는 廣告를 통해 미국 여성의 87 %, 남성의 66 %가 방취제를 구매하도록 유도했고, 전체 성인의 58 %가 맥주를 마시도록 했다. 만약 당신이 맥주나 방취제가 전혀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면 광고가 쓸데 없 는 수요를 유발한다고 비난해도 좋다. 만약 당신이 사회적 계층의 이 동, 동물애호, 해외여행 등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邪惡한 일을 장려하는 광고를 비난해도 좋다. 당신이 또한 풍요한 사회를 싫어 한다면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추구하도록 충동질하는 광고에 책임을 물어도 좋다. 만약 당신이 이런 流의 퓨리턴이라면 나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가 없다. 단지 당신을 정신병적 매조키스트라 부를 수 밖에 없다. 나는 라 이톤의 대주교처럼 기도하겠다. "신이여, 나를 저 현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의 잘못으로부터 구해 주소서" 라고. 영국 노동운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존 번즈는 노동자 계급의 第一 次的인 비극은 욕망의 不在에서 야기된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그들 노동자 계급에게 스파르타적 생활을 하지 말라고 충동질 한다고 해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데이비드 오길비 저. {오길비의 고백} 김명하 박종열 역 pp. 168-1 69)

주9)

하지만 그런 현상 뿐이라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노동생산성이 향상되고 물질적인 풍요가 점점 커가는 것을 기초로 하여 의식과 無意 識에 대한 조정과 統制가 행해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후기자본주의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통제 매카니즘의 하나가 되고 있읍니다. 말하자 면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새로이 생산되는 상품을 사도록 만들면서, 그 러한 구매 욕구가 자신들 內部에 실제로 있고 이러한 상품을 삼으로써 그러한 욕구가 사실상 충족된다고 확신시키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새로 운 욕구, 심지어 충동적인 욕구까지도 刺戟시켜야만 합니다. 결과적으 로 인간들은 완전히 상품세계에 대한 物神崇拜에 빠지게 되고 이런 방 식으로 자기자신도 자기의 의식 속에서 자본주의체제를 재생산하게 되 었읍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상품을 사고 그것에 대한 욕구가 실제로 자극을 받아 일깨워지기 때문에 그 상품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상품은 돈으로 지불해야 하는데 그 가격은 점점 비싸 지고 있읍니다. 이것은 또한 다음의 사실을 의미합니다. 즉 종래에는 불가능했던 노동과 사회적 부의 합리적 분배방식을 통해서 생존경쟁을 축소시켜 그 정도를 누구러뜨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奇異하게도 생존 경쟁이 점차 더욱 熾烈해지는 것입니다. 예상이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경향이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현존하고 있읍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 회적인 부 때문에 生存鬪爭은 더욱 첨예화하고 험난해지고 있읍니다. (마르쿠제. 포퍼. 전게서. p. 27)

주10)

노동할 의사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1,000만 명 중 900만 명이 고용되어 있을 때에는 이 900만명의 노동이 그릇된 방면에 도입되었다 는 증거는 없다. 현재의 경제조직에 대한 불평은 이 900만 명이 다른 일에 고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남은 100만 명을 위해서 일이 마 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조직이 실패한 것은 현실의 고용 량을 결정하는데 있어서이며, 그 방향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아니다. (케인즈 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김두희 역. p. 395)

주11)

소비자는 (동기야 어떻든 간에) 공급된 재화 안에서 선택을 한다. 소비자는 拒否權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싫어하는 상품을 구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 主導權은 없는 것이다. 어떤 사회의 특 정한 상품들에 대한 수요의 유형은 어떤 상품들이 공급되는가에 의해서 크게 영향받는다. 인간은 모두가 식량. 의류. 오락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의 필요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충족되는가 하는 점은, 무엇 이 생산되고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쌀을 생산하는 나라에서는 쌀 밥을 특별히 선호한다. 영국에서 양고기를 먹는 습관은 중세의 양모무 역까지 거슬러 올라는 것 같다. 산업생산은 기술개발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으며, 새로운 상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誇示效果(demonstration effect) 에 따라 이에 대한 소유욕이 급속하게 전인구로 분산되어 간다. 이와 같이 공급은 수요을 창조한다. 자동차가 가져온 태도와 행태에 관한 一大革命은 좋든 나쁘든간에 두드러진 실 례다. 근대산업의 거대한 생산력은 자본가적 기업에 대하여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 문제란, 수년 내에 산업국가의 전인구에 대해서 현재 알려져 있는 제품에 대한 수요를 쓸모있는 규격에 따라 모두 충 족시키는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연후에는 자본주 의 제도가 어떻게 계속 機能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이제까 지는, 이 문제는 욕망의 創造에 의해서 해결되어 왔던 것이다. (Joan Robinson, John Eatwell 공저. {An Introduction to Modern E conomics} 주종환 역 pp. 261-262)

** 본 강연은 경제학의 제2의 危機라는 제목을 붙였읍니만 이것은 1 930년대의 대불황에 대하여 제1의 위기라고 한 것에 비유하여 붙인 것 입니다......... 제2의 위기는 전혀 그 성질이 다릅니다. 제1의 위기는 雇用水準을 설명할 수 없었던 이론이 붕괴됨으로써 일어났으나 제2의 위기는 고용 의 내용을 설명할 수 없다는 데서 일어나고 있읍니다........일단 의논 의 핵심이 인정되자 문제도 바뀌어져야 했읍니다. 이제 정부지출에 의 하여 고용이 유지된다는 것을 모두가 동의한 지금에 있어서는 어떤 對 象에 대하여 지출할 것인가를 논의하여야 할 때가 되었읍니다...... 모든 혼란은 단 한가지의 단순한 遺漏에서 일어나고 있읍니다. 그것 은 케인즈가 正統派가 되었을 때 바로 문제를 전환하여 " 무엇을 위한 고용인가"를 논의했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로 생산을 위한 자원배분에 관한 문제이지만 사람들에 대한 생산물의 분배와도 결합되어 있읍니 다..... ( 죠안 로빈손 저. {경제학의 제2의 위기} 전후 세계를 움직인 문제 논설. 신동아 1979. 1 호 별책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