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연대체제와 생산력의 해방

6.4.1. 현재의 생산력과 생산력의 해방

우리는 사람들의 필요한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킬만한 생산력을 가지 고 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상 최초로 인간이 빈곤(貧困)으로부터 해방 되어, 진실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것이다. 물론 아 직도 선진국에서는 풍요 속에 빈곤이 있으며 수 많은 후진국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인류의 생산력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류가 성취한 생산력이 모든 인류를 위 해서 활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생산력은 선 진국이나 특정계급 특정집단의 이익에 묶여 있으며 그들을 위한 특권(特 權)의 도구로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앞으로 생산력의 발전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생산력의 발전 방향은 현재와 같은 방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충분하 다고 말하는 의미는 모든 인류를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이제까지 와는 전혀 다른 세계--인간의 연대의식(連帶意識)에 기초하는 연대세계 --를 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충분함 은 두가지 징후로서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많은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생산력을 흡수하기 위해서 욕망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생산력 이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생산력만으로도 자연환경 (自然環境)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포화상터(飽和狀能)에 이르러 저절로 인간을 탐욕으 로부터 해방시키는 그러한 수준의 생산력 발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 는다.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한다면, 인간이 더 이상 물질적 가치를 둘 러싸고 갈등을 야기하지 않고, 사람들이 모두 욕망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집합표상은 환상(幻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 다. 마르크스주의는 사적 질곡에서 해방된 생산력이 인간의 물질적 대립 을 해소할 것이라는 가정위에 서 있었다.1) 케인즈는 가까운 미래에 풍 부한 자본의 축적이 인간을 경제적 중압에서 해방할 것이라고 하였다.2) 이러한 개념은 사실 서구근대의 일반적 집합표상이지만 예수나 석가(釋 迦)는 다르게 이야기 하였다. 물질적 발전이 인류에게 낙원을 선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到來)해 있다. 다만 이미 도래해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폭행(暴行)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갈브레이드도 물질적 생산의 증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였 다.3) 때문에 우리는 인류가 도달한 생산력--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 새로운 세계를 실현할 수 있는 충분한 생산력--에서 출발 한다.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생산력을 인간을 위하여 해방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인간을 위하여 해방하는데 실패하였다. 그 실패 의 증거가 풍요(豊饒)속의 빈곤이며, 욕망의 창조이며, 경제적 불안정과 대립이며, 환경의 오염이다. 소비자주권은 다만 신화일 뿐이며, 생산력 을 인간적 가치를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유도하지 못한다. 시장은 생산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자원을 배분하지 못한다. 독과점의 헤게 모니는 사적 이윤에 기준하는 것이며,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경제는 욕망을 창조하면서까지 생산력을 소모하고, 인간의 삶을 저속하게 하고, 갈등과 대립의 원천이 되고 있다. 따라서 생산력의 해방 의 문제는 바로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 인간의 경제의 문제이다.

6.4.2. 연대체제의 소득분배와 생산력의 해방

생산력 해방의 문제는 우선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생 산자는 이윤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윤은 기업가만이 아니라 노 동자에게도 생존의 조건이다.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필요 가 아니라, 구매력(購買力)을 가진 유효수요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구매력을 가진 집단이 생산자의 제품에 대하여 수요를 가지고 있 지 않다면,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들의 욕망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구매력이 없는 사람들은 설사 그들이 굶어죽는다 하더라도 이윤과 는 무관한 것이고, 생산자에게도 무관한 것이며, '무엇을 생산할 것인 가' 하는 문제도 그들을 위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평등(平等)한 소득분배가 생산력 해방의 문제를 해결하는 관 건(關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소득이 평등하게 분배 된다면 생산자는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대중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소 득의 분배가 평등한 상태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은 평등한 유효수요를 가진다. 어떤 사람은 상품이 필요하나 구매력이 없고 어떤 사람은 구매 력은 있으나 욕망이 없는 그러한 왜곡(歪曲)된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대경제체제의 기본적인 성격은 소득분배의 평등성을 지향하는 것이므 로 생산력은 대중을 위하여 해방된다. 소득분배가 평등한 상태에서는 일 부 사람들의 기본적인 수요를 충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욕 망을 창조하는 상황은 야기되지 않는다. 생산력은 사람들의 생활의 기 본적인 수요부터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활용된다. 왜냐하면 욕망의 창조 는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 욕망을 지향한 생산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연대체제에서는 빈곤에 의 한 인간의 소외가 사라지고, 동시에 욕망의 노예가 되는 인간의 소외 역 시 사라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득의 평등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소득분배에 관 한 법칙을 해명해야 한다. 그러나 시장기구에 있어서 소득분배의 법칙 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득분배의 법칙이란 결국 요소가격(要素價格)의 문제이고 가격은 모든 변수의 종합적 결과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자본 주의 자산시장은 상품화한 부가 거래된다. 소득분배는 자산상품의 분배 와 함께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산시장은 법칙적 정합성(整合性)이 없다. 때문에 소득분배의 법칙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없는 것을 찾으려는 노력 이다.

연대체제에서는 소유소득이 제거된다. 그리고 노동에 의한 시장소득 은 불평등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며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기동의 기제이다. 그리고 소득분배의 평등성은 시장소득과 연대소득, 연금소득 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평등하게 분배된 소 득에서 야기되는 수요구조에 대응하는 생산에 있어서는 풍요속의 빈곤 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객관적 진리로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평등한 수요구조에 대응 (對應)하여 이루어지는 생산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전지(全知)한 초인이나 전능한 집단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진 리의 기준에 따라 생산의 내용을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력이 해방된다고 하여 무조 건 모든 것을 많이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원배분(資源配分) 의 문제는 존재한다. 그것은 권력이나 이론의 일방적 결정에 의하여 생 산의 우선순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수요구조에 의한 대중 적 수요의 종합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력의 해방 문제는 의외로 단순한 답을 가지고 있다. 그 것은 소득의 평등한 분배이고 이러한 평등한 분배에서 형성되는 수요구 조에 생산력이 대응하는 것이다. 평등한 소득과 평등한 수요구조에 대 응하여 작동하는 시장이 생산력을 해방하는 것이다.

한편 생산력 해방의 공급측 조건은 생산이 생산자의 생존조건이 되 는 질곡(桎梏)을 철폐하는 것이다. 생산이 생산자의 생존조건이 되어 있을 때 어떠한 가치를 가진 생산인가 하는 문제는 뒤로 돌려진다. 오 로지 더 많은 생산이 최고의 가치를 가질 뿐이다. 연대체제에서의 연대 소득이 이러한 질곡을 철폐한다. 생산자는 자신이 생존하기 위하여 타 인의 욕망을 창조하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을 위하여 생산 에 이르는 경향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 생산력이 어디에 사용되어야 하는 문제는 자아실현적인 생산동기와 평등한 수요구조를 인연(因緣)으로 하 여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구조 속에서만 생산력의 발전이 인간 으로 하여금 물질적 욕망에서 해탈(解脫)할 수 있게 하고, 인간의 연대 에 눈을 돌리게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욱 우월한 물질적 가치를 소유하고 소비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물질적 가치가 삶의 내용을 좌우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가치는 인간의 연대와 같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문명에 이르는 길이다.

6.4.3. 헤게모니의 정당성(正當性)과 생산력의 해방

소득의 평등한 분배는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바탕을 이룬다. 시장에 의한 소비자주권의 이론을 전제한다면 소득의 평등한 분배는 문제를 해 결한다. 즉 모든 사람들의 소득이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고, 그러한 평 등한 수요구조에 대응하여 이루어지는 생산은 소비자들의 건전한 선호 (選好)를 반영하리라는 것이다. 생산자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는 소비 자들의 선호에 의하여 좌우되며, 생산의 내용과 수량에 있어서 소비자 들이 주도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소득의 평등한 분배 는 1차적으로 생활의 기본적(基本的)인 수요(需要)에 대응하여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장한다. 평등한 분배가 대중적인 식료품에 대한 구 매력(購買力)을 보장하고 있을 때, 이를 외면하는 고급의 식료품은 생 산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평등한 수요구조하에서는 고급 식료품에 대한 수요가 적을 것이며 생산자는 식량의 부족을 용이하게 인식하고 그 생산으로부터 이윤을 얻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주택이 부족한 상황에 있어서 고급주택은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 득의 평등성은 고급주택에 대한 수요를 야기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주택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생산자에게 용이하게 인식될 것이기 때문이 다. 의식주가 부족하다면 고급레저산업에 자원이 배분되지는 않을 것이 다. 왜냐하면 그러한 레저의 수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 미에서 평등한 분배를 전제로 할 때 소비자주권의 이론은 유효하다. 동 시에 평등한 소득분배가 전제될 때 시장은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보 장한다.

그러나 소득의 평등한 분배가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해결의 전부는 아니다. 대규모의 자본이 투자되는 대기업의 경우에 있어서는 생산은 사전적(事前的)인 조정과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거대한 투 자에 대하여 소비자주권에 의한 사후적(事後的)인 심판은 다만 자원의 낭비(浪費)를 의미할 뿐이다. 생산의 사전적인 조정과 계획의 문제는 그 생산을 주도하는 집단이 갖고 있는 헤게모니의 정당성 문제이다. 자 본주의에서 독과점 대기업은 사적 이윤동기에 의하여 움직인다. 사적 이윤동기는 독과점대기업이 생산내용을 결정하는 기준이며, 동시에 독 과점대기업 헤게모니의 정당성이 기초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산 이 단순히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내용을 결정적으로 좌 우하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중대한 결정과 그 결정을 유효(有效)하게 하는 가격, 수요, 비용에 대한 지배적 헤게모니는 사적 이윤추구의 자 유로 정당화(正當化)될 수 없다. 이것이 생산력 해방의 또 하나의 문 제이다.

생산력 해방의 문제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하는데 대 한 헤게모니의 정당성 여부를 제기하는 것이다. 생산력 해방의 문제는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생산의 우선순위(優先順位)를 작성하는 문 제가 아니라, 그러한 가치판단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그 결정을 지배하는 헤게모니의 정당성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자본배분 (資本配分)과 투자 그리고 대규모 생산자본 헤게모니의 정당성 문제이 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무엇을 옳은 것인지를 결정하는 체계가 아니 라, 그것을 규정하는 권력의 정당성을 민중이 결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 다.) 그리하여 경제의 문제가 헤게모니에 대한 정치의 문제로 전환한 다. 경제의 문제는 경제적 이론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연대체제에서는 대기업을 비롯한 일체의 경제적 헤게모니는 연대매 체에 의한 대중적 가치합의(價値合意)의 과정에서 정당화된다. 그것은 대중의 민주주의적 합의가 생산력의 사용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력의 사용에 관한 근원적인 결정은 연대자본의 배분에 관한 중앙 화백회(中央和白會議)의 의사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더 낮은 차원 에서는 투자기관의 투자결정에 대한 대중의 참여과정에서 헤게모니가 결정된다. 연대체제에서는 대기업으로서의 연대기업의 헤게모니에도 대 중이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대기업은 수요에 대한 정보와 소비 자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하여 대중네트워크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헤게모니 과정에서 매개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연대매체이다. 연대체제 에서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 투자내용을 결정하는 문제, 연 대자본의 배분의 문제는 연대매체를 매개로 하는 정치적 가치합의의 문 제이다. 여기에서 연대매체는 정치적 가치매체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러한 연대매체의 정치적 기능이야말로 연대매체의 사회적 의미이다. 대 중은 사회적 연대자본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연대매체 를 매개로 하여 경제적 민주주의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연대체제는 개인의 사회가 아니라 조직의 사회이다. 그것은 정보에 의하여 통합되는 대중네트워크의 상호관계망이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상호작용에서 대중의 자아실현과 가치관이 사회적으로 조직되는 것이 다. 그리고 그 경제적 결과가 생산의 내용을 형성한다. 연대체제에서 신탁(信託)과 조직사회에로의 이행은 바로 생산력을 해방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것은 경제에 있어서의 정치적 측면, 즉 경제적 민주주의의 양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민주주의의 문제는 경제의 이론으로 완결(完結)될 수 없다. 생산력해방의 문제는 대기업의 헤게모니 문제만 이 아니며, 지식과 정보, 지적 소유권의 문제, 정보 커뮤니케이션에 의 한 사전적 통합의 문제를 포함한다. 시장은 사후적인 경제통합의 양식 이다. 이에 대하여 생산력 해방의 문제는 사전적(事前的)인 경제통합 의 필요성을 제고(提高)한다. 그것은 종래의 계획과는 다른 생산자이면 서 동시에 소비자인 대중의 사전적인 정보적 통합을 필요로 한다. 우리 는 이러한 사전적인 통합의 과정을 네트워크 조직 사회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네트워크조직 사회의 보다 본질적인 논의는 정치적 이론의 영역 이다. 그것은 기존의 정치이론과는 다른 정치의 이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1인1표제의 서구민주주의에 관한 종래의 이론과도 다른 새로운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이다. 우리는 연대매체의 정치적 기능, 연 대부문 중앙화백회의의 경제적 민주주의의 과정에 관하여 제 2권 상권 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6.4.4. 국가간체제(國家間體制)의 문제

생산력 해방의 문제는 소득의 평등한 분배, 생존의 구속에서 해방된 자아실현적인 생산, 그리고 연대자본에 대한 경제적 민주주의만으로 완 결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또 다른 질곡(桎梏)이 존재하는 바 그것은 국 가간체제(國家間體制)로서의 세계체제의 문제이다. 근대세계는 제국(帝 國)의 체제가 아니라 국가간체제이다. 세계에 보편적인 질서는 존재하 지 않는다. 국가가 인간 공동체의 최종적 단위이다. 국가를 넘어서면 그곳에는 국가간에 무정부적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 있어서 국가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이러한 국가간체제로서의 세계 사회에 존립(存立)해야 하는 근대국가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목표로 하는 체제이다. 모든 국가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를 추구하고 군사 적으로 강력한 국가를 추구한다. 그리고 국가가 경제적인 부유함과 군 사적인 강력함을 추구할 때, 경제에 있어서 인간적 가치는 압박당한다. 근대국가체제와 국가간 세계체제에 있어서는 국가의 목표가 인간의 가 치에 우선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목표는 생산력의 해방 그리고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와 배치되는 것이다. 가령 군비축적을 위한 생산력의 사 용이 다른 모든 것을 우선하며 군수산업에서 경제적 가치를 얻고 있는 세력과 집단의 이익이 국가안전이라는 명분에 편승하여 생산력의 사용 에 우선권을 행사한다. 관상인(棺商人:葬儀社)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의 죽음을 필요로 한다. 결국 생산력의 해방의 문제는 국가와 세계 체제의 문제와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을 위한 생산력의 해방은 하나의 국가의 차원에서 결코 완결되 지 않는다. 생산력의 해방은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 다. 여기에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국가와 세계의 문제이다. 그것은 이책의 또 하나의 주제인 전쟁의 철폐에 관한 주제와도 연관되 어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제 2권 하권에서 다루기로 한다.

6.4.5. 삶의 시간(時間)과 문명

생산력 해방은 인간과 사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생산력을 증 가시키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진보의 척도는 아니다. 인간의 삶은 물질적 생산력으로 규정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우리가 생산력이 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물질적 재화(財貨)의 생산성을 주로 의미한다. 인간의 서어비스에 대하여 가지는 생산력이라는 의미는 대단히 애매한 것이다. 따라서 생산력의 해방이 문명을 향상시키고 인간을 고양(高揚) 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력의 해방은 다만 문명을 향상시키고 인간을 고 양하는 물질적 기반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오히려 생산력의 해방이 인간에게 주는 자유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문명의 문제이다.

문명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시간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의 물질문명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시간의 대부분이 물 질적 재화의 생산과 소비에 사용된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사람들은 물 질적 재화의 생산과 소비에 삶의 대부분을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 삶의 가치는 물질적 욕망을 넘어서는 데에 있다. 우리는 물질적 문명에 관한 시대적 집합표상의 카르마에 묶여 있어 보다 올바른 삶에 대한 상상력 이 빈곤하다. 생존하기 위하여 허덕이거나 물질적 소비를 과시하는 것 이 우리를 지배하는 삶의 집합표상이다.

이에 대하여 전혀 다른 삶과 문명을 상상할 수 있다. 사람들이 모두 종교적 명상(冥想)에 그들의 시간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명 이 될 것이다. 이때에는 물질적 재화는 단순히 생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에 많은 시간 을 사용하지 않으며, 그 소비에도 많은 시간을 소모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물질적 재화에 대하여 많은 가치를 두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가치를 지향(志向)하는 다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 의 삶의 내용과 사회의 성격은 종교적 깨달음이나 교리를 둘러싼 논쟁 이 주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이처럼 물질적 재화의 중요 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경우는 극단적인 것이지만 이러한 사회가 무의미 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양 극단의 중간적인 형태로 우리는 사회적 성 격과 삶의 성격을 여러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규정의 기준이 되는 것은 삶의 시간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지향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상력(歷史的想像力)은 우리의 상식적 집합표상의 카르마를 보여준다. 우리는 인간과 사회에 대하여 1차적으로 중요한 것 은 물질적 재화라는 집합표상에 사로잡혀 있다. 더 많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고 더 많은 물질적 재화를 소비하는 것이 가장 진보된 사회라는 집합표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체제는 모든 인간에 대 하여 물질적 생산과 소비에 그들의 삶의 시간의 전부를 바치도록 강요 하는 체제이다. 학문과 예술, 여가, 종교적 깨달음, 인간간의 친교(親 交) 모든 것도 이러한 재화의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에서 규정된다. 가 령 재화의 생산과 소비가 충분한 다음에야 비로소 여가시간이 증가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학문과 예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고, 종교 에도 더 많은 시간을 바칠 것이라는 집합표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러한 집합표상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인 집합표상이며 근대의 산업혁명이 인간과 사회와 문명을 지배하는 양식이다.

근대의 산업혁명에 비교될 수 있는 현대의 정보혁명은 삶과 문명에 대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산업혁명이 자본과 가치매체의 차원에 있어서의 혁명이었다면 정보혁명은 커뮤니케이션과 집합표상의 차원에 있어서의 혁명이다. 이것은 삶의 시간에 있어서 물질적 재화의 비중을 감소시키며 지식과 정보와 같은 비물질적 가치의 비중을 증가시 킨다. 이러한 정보혁명의 방향과 연대체제를 결합하면 어떠한 문명이 도출(導出)되는가? 연대체제에 있어서의 정보혁명은 어떠한 삶과 문명 을 의미하는 것인가? 나아가 정보혁명의 과정에서 연대체제는 어떻게 자기를 실현하는 추진력을 가지게 되는가? 우리는 연대체제와 정보혁명 이 정합성(整合性)을 가지고 있다고 규정한다. 연대체제는 한편에 있어 서는 자본을 해방하는 것이며 동시에 지식정보커뮤니케이션의 차원을 사회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자본의 해방은 자본헤게모니의 약 화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며, 그에 대체하여 지식정보가 인간의 삶과 사회를 형성하는 전략적 차원으로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대매체는 이러한 지식정보커뮤니케이션의 네트워크조직을 매개(媒 介)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혁명과 연대체제의 결합은 인간의 자기실 현을 위하여 생산력을 해방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에 있어서의 물질 적 소비는 과시의 사다리가 아니라 개성과 주관의 표현이 되고 인간의 자기실현이 된다.5) 이제는 더 이상 물질적 재화의 다과(多寡)에 의존 하는 원시적 물질적 삶이 아니라, 개성과 주관과 자기실현의 보다 품위 있는 삶의 형식이 문명의 성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물질적 재화의 생 산과 소비에 삶의 시간의 대부분을 소비하지 않게 된다. 기본적인 물 질적 가치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생산과 소비에서 자기실현이 사회적 가치의 실현에 연결되고 개성과 주관의 발현(發現)이 타인과의 연대에 기여하는 그러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물질적 상품의 다과는 더 이상 선망(羨望)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산업사회에 있 어서 거대한 쌀창고를 지어놓고 백만석의 쌀을 보관하고 있는 농업사회 에 있어서의 전형적인 부자의 모습이 다만 웃음거리인 것과 같은 것이 다.4)

이러한 문명에서 욕망의 창조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욕 망의 창조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인간이 존재적 탐욕이 아니라, 연대 속에서의 자아실현, 연대에의 지향 (志向)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욕망의 창조가 아니라 보다 고양된 가치의 지향을 생산하는 것이며 인간을 고양(高揚)하는 것이다. 오랫동 안 종교인들이 외쳐왔던 인간의 도덕적 고양이 이제는 사회의 일반적인 과정이 된다. 왜냐하면 물질적 가치가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 기 때문이다. 연대체제에 있어서는 소득이 평등화하게 되어 소득과 소 비에 있어서 계층적(階層的) 사다리는 없어진다. 때문에 더 많이 소유 하고 소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돋보이는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이 인간의 정감적(情 感的) 집합표상을 변혁한다. 물질적 가치의 소유와 소비에서 인간이 구 별되지 않게 될 때, 인간은 빵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물질적 재화에 대한 욕망창조가 정지하고 다른 가치 가령 학문이나 종교, 예 술, 진(眞), 선(善), 미(美) 등에 대한 욕망이 창조되는 기제가 일반화 한다. 그것은 바로 지식과 정보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내포되는 것이 다. 이제 인간은 물질적 가치의 소유와 소비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실현과 사회적 연대에 의하여 평가되고 규정되고 자기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근대적 집합표상이 붕괴되고 새로운 집합표상이 일반화되는 것이다.5)

따라서 연대사회는 단순한 경제적 체제의 변혁을 넘어서서 문명의 전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생산력 해방의 문제, 경제의 문제, 경제체제의 문제가 문명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러한 문명의 문제에 관하여 제 3권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주1)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分業의 극복과 인간의 人格性의 해방을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의 결정적 특징으로 들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生産過剩을 기초로 하는 자유로운 사회와 자유로운 인격성으로 생각했 다. 그것은 국가도 없고, 계급도 없으며 그리고 당도 없는 사회이다. 즉 "자유의 나라는 窮乏과 외적 목적성에 의하여 强要된 노동을 하지 않게 되는 데서 비로소 열린다." 거기에는 "自己目的이기도 한 인간의 능력개발 즉 참된 자유의 나라가 열린다." (W. 레온하르트 저. {소비에트 이데올로기} 강재륜 역 p. 290)

*공산주의 사회에서 하루는 다음과 같이 보내질 것이다. "자연적 慾望(식사와 수면)에는 약 10시간이 소요된다. 의무적 노동 에는 4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각자 약 10시간의 餘暇를 가진다는 것 을 의미한다. 그리고 약 4시간이 그 사람에게 관심있는 정신노동이나 독서에 사용되고,같은 시간이 활동적인 소포츠와 아마츄어 예술에 사용 된다면, 이 경우 2시간이 TV, 음악회 또는 영화관에서 휴식할 수 있는 시간으로 남는다." (W. 레온하르트 저. 전게서. p. 296)

* 1960년 초 후르시쵸프는 소련은 언제 공산주의를 달성하게 되느냐 는 인도의 언론인 흐바야 아마드 아바스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 다. "우리는 1975년과 1980년 간에 우리 목표를 어김없이 달성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것은 전쟁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새 黨綱領도 공산주의 건설이 여러 단계에 걸쳐 지속적으로 완성된 다고 내다 본다. 1980년까지는 "소련에 공산주의 사회가 반드시 건설 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건설은 후속되는 시기에 완성된 다는 것이다. 그 당강령의 맺는 말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당은 엄숙하게 고한다. 현세대의 소비에트인은 공산주의에서 살게 될 것이 다! " (W. 레온하르트 저. 전게서 p. 309. 310)

주2)

사실 케인즈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다시 메우는 일을 누구에게 도 원하지 않았읍니다. 케인즈는 기분좋게 白日夢의 세계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즉 투자를 30년 정도 完全雇用水準에서 유지한다면 자본설비 의 필요가 모두 충족되고 財産所得은 廢止되며 빈곤은 소멸되고 문화생 활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이었읍니다. (죠안 로빈손, 전게논문)

* 天地開闢 이해 처음으로 인류는 영원한 문제..... 즉 경제의 重壓 으로부터 해방되어 얻은 自由를 어떻게 이용하는가, 과학과 경제성장의 여택이 인류에게 가져오게 할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나아가서는 어 떻게 현명하게 그리고 기분좋게 또 만족스럽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 가라고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케인즈) ( 갈브레드 저 {새로운 산업국가} 전계서 396)

*그런데 이러한 사태는 어느 정도의 개인주의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利子生活者의 安樂死이고 또 따라서 자본의 稀少 價値를 착취하려고 하는 자본가의 사회적인 壓力의 안락사를 의미한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자는 토지의 지대가 순전한 희생에 대한 보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순전한 희생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자본의 소유 자는 토지의 소유자가 토지가 稀少하기 대문에 지대를 획득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본이 희소하기 때문에 이자를 획득할 수가 있 다. 그러나 토지의 희소성에는 本有的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자본 의 희소성에 본유적인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희소성에 대한 본유적인 이유는 이자의태로서의 보수를 제공함으써만 유도할 수 있는 있는 순전한 희생이라는 의미에 있어서는 결국 개인의 소비성향이 --자 본이 충분히 풍부해지기 전에 완전고용이 純貯蓄을 중단시키는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 나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본의 不足狀態가 소멸되는 점까지 자본이 증가할 수 있도록 하는 공공적 저축의 수준이 국가의 힘을 통하여 유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자본주의의 이자생활자적인 측면을, 자기의 할 일을 끝마친 후에는 소멸할 過度的인 局面으로 본다. 그리고 그 이자생활자 적 측면의 소멸에 따라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많은 것들이 변화 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자생활자, 즉 무기능한 투자가의 안락 사가 급작스러운 것이 아니고 최근 우리가 영국에서 본 것 같은 점진적 이면서도 오랫동안에 걸쳐서 지속되는 과정일 뿐 革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주장하고 있는 있는 사태질서의 큰 장점인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자본의 부족 상태가 소멸하고, 따라서 無機能한 투자 가가 특별보수를 받지 못하게 될 때까지 자본량을 증가시킬 것을 실제 에 있어서 목표로 해야 하고, 또 금융가, 기업가 등등( 이런 사람들은 확실히 자기의 기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의 노동은 현재보다도 훨씬 싸게 획득할 수가 있을 것이다)의 知能과 결단과 실천적 기술을 합리적 인 보수조건하에서 사회봉사에 언제나 종사할 수 있는 直接課稅의 기획 을 실제에 있어서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달성 될 수 없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케인즈 저. 전게서(일반이론) pp.392-393)

주3)

대립적인 두사람의 경제학자가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는 이 러한 전망은 그러나 근대적 집합표상의 카르마이다. 인간의 욕망을 포 화시키는 생산력 수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이 욕망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의 飽和라는 것은 존재하 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이 無限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 간의 욕망은 실체가 아니라 緣起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결정하여 확정 된 상태로 인간에 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과 사물, 인간과 세계와 의 관계에서 연기하는 것이며 그것은 불확정적인 관계이다. 따라서 욕 망의 포화나 또는 욕망의 충족으로 인간이 도덕과 연대로 되돌아 온다 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인간에게는 완전히 충족됨으로써 도덕과 선, 그리고 연대로 되돌아오는 그러한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마르크스나 케인즈는 존재하지 않는 幽靈--그들이 만든 집합표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집합표상의 카르마이다. 몰론 수 많은 사람들의 현실인 빈곤은 엄연히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실체가 아니라 관계이다. 빈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며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이다. 그리하여 욕망의 충족과 인간의 연대에로의 회귀는 생산력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고대나 중세인보다 풍요한 생활 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풍요 때문에 --그 생산력 때문에-- 고대나 중세인 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 연대적인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나 케인즈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경고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예수와 석가가 우리 인류에게 가르친 것이다. 예수의 산상수훈 은 그 어디에도 물질적 풍요가 인간을 연대하게 한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는 2,000년 후에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면 하느님의 나라 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예수는 먼저 그 나라 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물질적인 것은 그에 더하여 자연 히 주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석가는 인간이 금욕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 나 욕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해탈의 처음이라고 하였다. 현대의 일반적인 상황인 욕망의 창조는 말하자면 예수나 석가 의 가르침에 정확하게 逆行하는 것이다.

* 생산의 增大는 사회의 성공의 最終的인 기준도 아니고 모든 社會 惡을 해소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이 책이 강조하고 싶었던 골자 이다. 그리하여 케인즈주의 정책은 경제의 산출량 및 소득의 확대에 거의 전적인 力點을 두고 있으므로 이 책은 케인즈주의 정책의 근본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이것에 대한 케인즈파의 공통된 반응은 우리 국민 의 이만저만한 퍼센트의 사람들이 최저필요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 처분 개인소득 밖에 얻지 못하고 있는 경우에 갈브레이드는 도대체 어 째서 이처럼 매정스러운가. 누구나가 이만저만한 소득을 얻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사회적 균형의 문제를 걱정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하는 것이 었다. 즉 모든 사람이 그가 개인적으로 흡족하다고 생각하는 상태 혹은 그가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통계에 의해 최저소득으로 생각되는 수준 에 달하게 되었을 때에 이 문제는 생각해도 된다고 하고 있는 것이 다....... 나를 괴롭힌 것은 그들의 주장의 어리석음이었을 것이다. 모 든 사람 혹은 거의 모든 사람이 어느 최저수준에 달하기 까지는 우리들 의 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고찰을 영원히 연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 다. (갈브레이드 저. {풍요한 사회} 제3개정판 서문. 최광열 역. p. 22)

주4)

공업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소비적 욕구는 자원이나 에너지 등의 재물 소비 증가에 향해져 있던 탓으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고임금은 직업선택의 자극 동기로서 언제나 효력이 있었다. 즉 고임금의 직장에 는 유능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가사회에서는 소비적 욕구는 보다 많은 지가에 향해진다. 이곳에서의 고소득자와 저소득자의 소비생활의 차이는 고급품을 살 수 있는가, 흔한 물건으로 참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즉 돋보이는 것, 또는 자기만족(주관적 충족)의 문제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직업자 체의 돋보이는 것 또는 자기만족과 경합하게 된다. 재물의 다과를 문제로 삼은 공업사회의 소비욕구는 직업의 돋보이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니까, 소득의 자극 동기는 직종의 한계를 넘 어 유효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가사회에서는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소득이 많아져서 소 비면에서 돋보이는 것 또는 자기만족이 얻어졌다 해도 직업의 돋보이지 않는 것에서 그것이 상실되는 경우에는 무효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최근의 젊은이들이 급여가 많은 지저분한 직업보다는 , 비록 저임금일 지라도 창조적인 직장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일 것이다. (사까이야 다이찌 저. 전게서. pp.240--241)

주5)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항상 선(善)<하고> 연대감을 가지 고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우선 첫째로, 아마 역사상 최초의 일이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연대감을 가지면서 선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인 간입니다. 나는 산업사회가 이룩한 업적을 토대로 하여 지배를 위해 억압된 충동을 해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렇게 해 방된 충동, 즉 파괴적 충동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삶의 충동을 기반으로 하여 역사상 최초로 일종의 연대감과 같은 것이 실제로 실현될 수 이 믿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충동은 공격충동과 대립하고 있으며, 사실상 그 충동에는 삶을 개선하고 삶을 보다 크게 향유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가능성과 조건의 맹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충동 은 타인의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타인과 더불어 하겠다는 씨앗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쿠제. 포퍼. {혁명이냐 개혁이냐} 홍윤기 역. p.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