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집합표상의 위상(位相)
1.2.1. 집합표상: 실천(實踐)의 매개(媒介)인간은 집합표상에 의지하여 세계를 해석하고 상황에 대처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집합표상을 재구성하여 상황을 해석하며 가치를 규정하고 행동 을 판단한다. 집합표상의 매개를 통하여 인간이 세 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 실천(實踐)이다. 그리고 실 천 속에서 인간과 세계가 통합되고 집합표상은 재 생산되는것이다. 집합표상이 인간의 실천을 매개한 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집합표상이 인간의 실천을 규정(規定)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세계와 상황을 해석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를 규정하고, 대처하는 방향을 지시함으로써 인간 과 세계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의 실 천을 매개하는 집합표상은 논리적인 이론의 형태를 가지기도 하고, 비논리적이기는 하나 우리에게 별 다른 모순을 느끼게 하지 않는 상식이나 신념의 형 태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본능(本能)도 집합표상에 의하여 그 표 현형식이 규정된다. 가령 우리는 단순히 본능으로 서의 식욕(食慾) 만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농경민족에게 있어서 식욕은 밥을 먹고 싶은 것을 의미하고, 유목민족에게 있어서 식욕은 고기 가 먹고 싶은 것을 의미한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먹기 위하여 농사짓는 법을 연구하는 사람보다 돈 을 어떻게 벌 것인가를 궁리하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쟁기가 있어야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 니라 돈이 있어야 식량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먹는 것과 같은 극히 단순한 인간의 본능적 인 실천도 그 사회의 상식적(常識的) 집합표상에 의지하는 것이다.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 견한 것은 지구의 모습에 대한 집합표상의 전환(轉 換)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의 끝에는 거대한 낭 떠러지가 있다는 집합표상이 지배하는 동안에는 한 쪽 방향으로 계속 항해하는 행동을 감행한다는 것 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었다. 프랑스 혁명은 봉 건적 특권이나 절대주의의 정당성(正當性)에 대한 집합표상이 붕괴됨으로써 야기된 것이다. 미국혁명 은 정치제도로서 세습왕제(世襲王制)의 당연성에 대한 집합표상이 흔들리고, 다수의 지지를 받은 자 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집합표상이 형성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중세시대에 투표 로 왕을 뽑자는 제안을 한 자가 있었다면 그는 웃 음꺼리가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어떠한 나라에서 누가 왕이 되겠다고 나선다면 그 역시 웃음꺼리가 될 것이다. 원자무기(原子武器)의 성격 때문에 강대국의 전면적인 전쟁은 불가능하다는 결 론에 이르고 있다 하더라도, 냉전논리가 모든 사람 들의 집합표상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강대국 들은 핵군비를 계속 증강하였다. 이처럼 집합표상 은 인간의 실천을 매개하는 것이다.
물론 집합표상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은 아니 다. 그러나 집합표상은 현실적 상황과 구조에 긴 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집합표상의 전환이 동반되 지 않고는 어떠한 새로운 실천도 현실적 결과를 낳 지 못한다. 현실의 경험이 집합표상를 구속하지만, 동시에 집합표상이 실천을 규정하고, 실천이 현실 을 형성하는 것이다.
실천의 매개양식으로서의 집합표상은 사회구성 원들에게 공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사회를 형성하는 기반이다. 아무리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도 모든 국민을 여름에는 좀더 빨리 일어나 좀더 빨리 직장에 출근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 그 러나 여름에 한 시간을 앞당기는 썸머타임 제도는 모든 국민에 대하여 한 시간씩 빨리 행동하도록 만 든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순응하게 만든다. 이것이 시간(時間)이라는 집합표상의 위력 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간이라는 집합표상은 권 력적 명령보다 더욱 인간의 실천에 영향력을 가지 고 있는 것이다. 집합표상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를 형성하는 기반이다.
집합표상은 사람들의 실천을 규제함으로써 서로 간에 협력과 거래와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길에서 만나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갑자기 우리에게 달려들어 우리를 살해할 것이라는 것과 같은 염려 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계약을 하는 경우 지켜질 것이라는 신뢰를 갖는다. 이처럼 합법성(合法性)에 대한 우리의 집합표상은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기반 이다. 법률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 속에 형성되 어 있는 집합표상인 것이다. 법률의 내용이 집합 표상으로 전환되어 있거나 적어도 법률을 지켜야 한다는 집합표상이 사회적 질서의 기반이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의 기반을 형성하는 이러한 집합표상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말할 수 있다. 우 선 집합표상을 인간의 의식과의 관계에서 정감적 (情感的) 집합표상, 합리적(合理的) 집합표상, 초월 적(超越的) 집합표상으로 나눌 수 있다. 자본주의 는 부(富)에 대한 선망(羨望)의 정감이 체제의 기반 이 되어 있다. 중세사회는 종교에 관한 초월적 집 합표상에 기반하였다면 근대사회는 이익의 계산에 관한 합리적 집합표상에 기반한다.1) 집합표상은 또한 상식적(常識的) 집합표상과 이론적(理論的) 집 합표상으로 나눌 수 있다. 상식적 집합표상은 너 무나 당연하여 반성할 필요도 없는 생각들이다. 사회관계는 이러한 공통된 상식을 전제로 하여 이 러한 부분내(內)에서만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합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상식은 사실은 과거의 이론적 집합표상이며, 그것이 파편 화(破片化)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시대 다른 사 회, 다른 문화에 가면 우리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2) 집합표상은 또한 사실(事 實)에 관한 집합표상과 정당성(正當性)에 관한 집 합표상으로 나눌 수 있다. 선거에서 한 표라도 많 이 얻은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 은 선거제도의 정당성에 관한 집합표상이 모든 사 람들에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데타 로 권력을 잡은 사람은 구데타의 정당성이나 자신 의 권력 정당성의 집합표상을 스스로 형성하지 않 으면 안된다.3) 집합표상은 또한 지식(知識)의 내 용이 되는 집합표상과 신뢰(信賴)의 집합표상으로 나눌 수 있다. 화폐나 주식시장이나 은행은 신뢰 의 집합표상에 기반한다. 이러한 신뢰의 집합표상 은 너무나 당연하여 논의할 필요조차 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공황(恐慌)은 이러한 신뢰의 집합표상이 붕괴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보여준다.4)
사회는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 한 것으로 생각되는 정감적 집합표상, 상식적 집합 표상, 정당성의 집합표상, 신뢰의 집합표상을 그 근 원적인 기반으로 한다. 실제로 중세사회와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집합표상들은 수백년 동안 또는 천년 이상 변화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집합 표상들은 하나의 시대적(時代的) 집합표상을 형성 한다. 인간은 이러한 시대적 집합표상에 얽매어 있다. 그리고 시대적 집합표상이 갖는 인간에 대 한 규제성(規制性)이야말로 사회와 시대를 유지하 는 원천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변화에 대하여 가장 큰 질곡으로 작용하는 것이 이와 같은 시대적 집합표상인 것이다.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토대가 경제나 군사 와 같이 물질적이거나 유형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시대적 집합표상 의 변동가능성을 논외(論外)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시대적인 집합표상을 변동시킬 수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면 결론은 달라지는 것이다. 이러 한 점은 공자가 최초로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국 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 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공자(孔子)는 군대(兵)와 경제(食)와 신뢰(信)라고 대답하였다. 만약 군주가 그 중에서 하나를 포기(抛棄)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군대를 버린다 고 하였다. 경제가 유지되면 군대는 필요하면 조 직(組織)할 수 있는 것이다. 군주가 다시 하나를 더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자는 경 제라고 대답하였다. 경제적 부유함이 있더라도 사 회관계에서 신뢰의 집합표상이 붕괴된다면 경제적 부유함은 국민 내부의 투쟁을 증가시킬 뿐이고 그 리하여 결코 경제적 부유함은 유지될 수 없는 것이 였다. 사회에서 신뢰의 집합표상이 작동하고 있 으면 다른 모든 것은 재건될 수 있다. 그러나 신 뢰의 집합표상이 붕괴하면 모든 것이 투쟁(鬪爭)의 화근(禍根)이 될 뿐이며 사회는 붕괴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이나 사회에 대하여 어떠한 의미 에서건 간에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 논의 의 여지가 없는 집합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신뢰의 집합표상이 사실은 사회를 형성하는 기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