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존재론적 집합표상



이 질문을 받고 향엄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서 그가 읽었던 온갖 책들을 뒤적여 보았으나 시원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향엄은 자신이 기대고 있던 학문에 완전히 절망하고 다시 위산에게 그 중요 한 질문의 해답을 분명히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위산은,

" 내가 그것을 가르쳐 주면 자네는 후에 나를 비난할 것일쎄. 그리고 내 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그것은 나의 말이고 자네와는 상관이 없네 "

하고 거절하였다. 낙심한 향엄은 책들을 모두 불태우고 그곳을 떠나 행운 유수하다가 어느 절에서 식모살이를 하였다. 어느날 그는 산에서 풀을 베어 내고 밭을 만들 생각으로 땅에 있던 돌을 캐어 내던지다가 그 중 하나가 우 연히 근처에 있던 대나무를 맞히어 대나무에서 바삭 하는 소리를 냈다. 이순 간 향엄은 죽음과 삶을 넘어선 자신의 본 모습, 그리고 세계의 실상을 깨우쳤 다. 그는 암자로 돌아와 목욕재개한 후 위산선사에게 배례하였다.

" 화상이시어 그때에 당신이 그 질문에 대답을 주었더라면 오늘의 이 놀 라운 일을 어찌 체험할 수 있었겠읍니까.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 (吳經熊 저. 전게서 pp. 258-260. 요약)


************ 說 ************


2.1.1. 존재의 문제

향엄이 던진 돌멩이가 대나무에 부딪쳐 바삭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향엄 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향엄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후에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냈을까? 향엄이 하나의 존재(存在)라면 태어 남은 향엄이라는 존재의 시작이고 죽음은 향엄이라는 존재의 종말이다. 인간 에게 있어서 죽음은 존재의 부정이고 그야말로 무(無)에로의 회귀(回歸)이다. 우리에게 돌멩이와 같은 존재는 그것이 생겨나든 없어지든 무관심할 수 있지 만 '나'의 존재와 무(無)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당신이 내일 죽는다고 가 정해 보라. 그것은 당신이라는 존재의 종말이다. 그것 이상으로 당신에게 중 대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위산선사가 향엄에게 물은 것이다. 향엄 의 경전지식(經典知識)을 물은 것이 바로 향엄 그 자신의 문제를 제기한 것 이다.

인간이 세계와 마주설 때 세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는 존재이다. 우선 돌멩이가 존재하고 대나무가 존재하고 고양이가 존재하고 그리고 너와 내가 존재한다. 이렇게 그야말로 자명(自明)한 것으로 보이는 사실에 대하여, 막상 존재란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되면 그야말로 대답할 수 없게 된다. 존재 의 문제는 나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철학자의 문제인 것 같지만, 막상 그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면 바로 우리의 문제인 것이다. 당 신과 나는 태어나기 이전에 어떤 상태였고 죽은 후에는 무엇인가. 이와같이 평범하면서도 심원한 '존재'를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점점 난해(難解) 한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존재의 문제는 서구의 철학적 사유에 있 어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가 되어왔다.

2.1.2. 존재론적 집합표상(存在論的 集合表象) I

철학에서 존재는 가장 보편적(普遍的)인 개념이다. 더 이상 보편적인 개 념이 없기 때문에 존재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개념 역시 하나의 '집합표상'이다. 따라서 정의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존재의 개념에도 어떠한 이미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라는 집합표상은 가시 세계(可視世界)의 존재물(存在物)의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 이다. 우리도 존재물로서 돌멩이와 사람을 염두에 두고 존재의 이미지를 규정 해 보기로 하자.

첫째, 돌멩이는 공간의 한 부분을 점유하는 연장(延長)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둘째, 상당한 시간 동안 변화하지 않는 정지성(靜止性) 내지 불변성(不 變性), 또는 질적 안정성(質的 安定性)을 가지고 있다. 세째, 그것은 외적(外 的)으로 다른 사물과 분리(分離)되어 독립성(獨立性)을 가지고 있다. 네째, 그 것은 내적(內的)으로 그 내용에 있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자기 동일성(自己 同一性)을 가지고 있다. 자기동일성이란 돌멩이가 돌멩이인 이유이다. 돌멩이 가 자기동일성을 상실(喪失)한다는 것은 돌멩이가 아닌 바위나 흙이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돌멩이와는 달리 인간은 이러한 자기동일성을 스스로 의식 하는 자아의식(自我意識)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이 구체적인 존재물에 대하 여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집합표상이다. 우리가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최소한 위의 다섯 가지 존재의 이미지 중에서 하나 이상의 이미지 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간(空間)이 필요하다고 말할 경우에는, 존재는 충만한 연장성의 이미지를 함축(含蓄)하는 것이다. 또 한 존재의 본질과 현상이 구별된다고 할 때, 존재는 불변성과 자기동일성의 이미지를 함축한다. 존재가 운동변화한다고 할 때에도 존재는 연장성, 정지 성, 자기동일성의 이미지를 함축한다. 존재와 사유(思惟)를 구별하는 경우에는 존재는 연장성의 이미지를 함축한다. 존재와 무(無)를 구별하는 경우에는 존 재는 위의 모든 이미지를 함축한다.

철학적 사유(思惟)에서는 존재의 집합표상 그 자체를 대상으로 다시 집 합표상을 형성한다. 즉 구체적인 존재물을 대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물에서 형성된 우리의 추상적(抽象的)인 사고인 '집합표상' 그 자체를 대상으로 다시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존재'는 다시금 이러한 다섯 가 지 이미지 가운데에서 몇 가지를 제거하여 순수한 존재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이렇게 하여 존재를 세 가지 범주(範疇)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돌멩이와 같 이 독립된 실체를 가지나 생성소멸(生成消滅)하는 것. 둘째, 수(數)나 법칙 (法則)과 같이 생성소멸하지 않으나 구체적 실체성이 없는 것. 세째, 영혼(靈 魂)이나 신(神)과 같이 독립된 실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생성소멸하지 않는 것이다. 독립적 실체란 우리가 말하는 분리 독립성, 자아동일성을 종합한 것 이다. 구체적 실체성이란 연장성이다. 한편 생성소멸 여부는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이미지에서 불변성을 상대적 불변성과 절대적 불변성으로 그 이미지 를 확장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번째와 세번째의 것에서 전혀 다른 존재의 집합표상이 재구성(再構成)된 것을 본다. 이것은 집합표상을 대상으로 다시 재구성한 집 합표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존재의 집합표상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 확장된다. 이제는 돌멩이만이 아니라 수나 법칙 그리고 영혼과 신도 존재의 영역에 들 어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존재의 관계가 된다. 첫째 종류의 존재(돌멩 이)는 두번째 종류의 존재(법칙)에 의하여 포괄되며, 두 종류의 존재는 세번 째 종류의 존재로부터 연원하는 관계에 있게 된다. 대체로 이러한 집합표상이 중세까지 서구인의 사고를 지배한 세계에 관한 집합표상이었다. 이것을 향엄 의 공안에 적용한다면 향엄은 법칙의 구속 속에 있으며, 향엄이라는 존재는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신이라는 실재(實在)에게서 연원(淵源)한다는 것이다. 즉 세계는 여러 종류의 존재의 관계가 된다. 이처럼 세계는 존재의 집합이고 존재의 관계라는 집합표상을 우리는 존재론적(存在論的) 집합표상이라고 부 를 것이다.

2.1.3. 존재론적 집합표상 II

근대에 이르러 서구의 존재론적 집합표상은 서구과학의 기반이 되었다. 과학은 객관세계(客觀世界) 즉 첫째 부류의 존재의 세계를 둘째 부류의 존재 의 세계로 규명하는 중심이 되었다. 중세가 이러한 객관세계에 대한 근거를 세째 부류의 존재인 신에게 구했다면, 근대에는 그러한 존재의 근거에 대한 문제를 종교의 문제로 분리하였다.

데모크리토스에서 시작되어 근대과학에 이르는 세계관은 앞의 존재의 이 미지 가운데서 물질적 존재의 속성으로서 네 가지를 완전히 갖추고 있는 원 자적(原子的) 존재로 세계를 환원(還元)하는 것이었다. 데모크리토스와 뉴톤 적 근대과학에 차이가 있다면, 전자가 기계적(機械的)인데 대하여 후자가 역학적(力學的)이라는 정도이다. 뉴톤의 세계에 관한 집합표상은 연장성을 가지고 자기동일성이 불변하며 독립적이고 견고한 전형적인 존재물로서의 기 본입자들이 이루는 역학적 관계가 세계였다.1) 세계는 이러한 존재적 입자 들의 운동으로 환원되었다. 가령 물이 뜨거워지는 것은 그 내부의 입자로서 분자의 운동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이러한 존재적 입자 이외에 시간과 공간이 있었으며, 입자와 운동, 그리고 법칙의 창조자로서 신(神)이 전 제되었다. 존재와 운동, 법칙의 근원적인 근거(根據)로서 신의 실재가 요청되 었으나, 신은 물질세계에 구체적인 방법으로 관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과 학적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구조 속에서 입자와 같은 존재 물들이 배열되고 운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 역시 우리는 존재론적 집합 표상이라고 부를 것이다.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면, 세계란 위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는 존재들의 관계와 과정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존재론적 집 합표상에 대한 우리의 규정은 단순화하고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 치(精緻)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존재론적 전제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존재들의 관계와 과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된다. 가령 헤겔은 존 재와 무 그리고 생성(生成)에 관한 변증법적(辨證法的) 집합표상을 형성하였 다.2) 변증법적 유물론은 제3부류의 존재를 부정하고 순수하게 물질적 존재들 의 변증법적 관계로 세계를 규정한다.3) 그러나 이 모든 집합표상들은 세계 가 존재들의 관계와 과정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일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러한 모든 세계관을 존재론적 집합 표상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존재론적 집합표상은 또한 세계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구조 속에 존재라는 것들이 다른 것과 분리독립되어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單純定位하 며), 배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이기도 하고 근대 과학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는 서로 전혀 다 른 것이며, 시간은 직선적으로 흘러가고, 공간은 텅비어 있으며, 그 속에 존재 물들이 각각 위치를 차지하여 서로 관계를 가지고 운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단순정위(單純定位)의 카르마라"고 부를 것이 다.6) 이것은 가시세계의 유추(類推)에서 야기되는 카르마이다. 그러나 절대 시간과 절대공간의 개념은 붕괴되었다. 시간과 공간은 상호의존하고 존재물들 의 관계에 의존한다.

우리는 단순정위는 당연히 옳은 것으로 생각하고, 반대로 추상의 카르마는 당연히 틀린 것으로 생각하며, 자신은 추상의 카르마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 각한다. 그러나 단순정위의 카르마 자체가 추상의 카르마에 빠져 있는 것이 다. 즉 우리가 가시세계에서 사물들의 변화과정에 대한 추상으로서 시간의 집 합표상을 형성하고, 그러한 추상적인 시간을 구체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또한 가시세계에서 모든 사물을 제거한 텅비어있는 공간을 추상화하고 그러한 빈 허공을 구체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속에 구체적인 사물들에 서 형성된 추상적인 '존재'들이 관계를 가지고 운동변화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서구근대적 집합표상, 즉 존재론적 집합표상은 근본적으로 가시세계의 유 추이다. 그러나 세계는 가시세계를 초월(超越)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가 시세계와 같은 모습으로 해석하려고 할 때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카르마가 야 기되는 것이다.


Last Updated: 1995년 7월 1일 W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