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연대적 집합표상




2.2.1. 사건(事件)과 연기(緣起)

향엄이 깨달은 계기(契機)를 이룬 것은 돌멩이가 대나무에 부딪쳐 바삭하 는 소리가 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계기는 우리에게 존재와는 전혀 다른 이미 지를 준다. 그것은 존재라는 이미지보다는 '사건(事件)' 이라고 부르는 것 이 더 적절한 이미지이다. 우리는 '존재'라는 이미지를 버리고 세계의 해석 에 있어서 '사건(event)'의 시각(視角)에서 출발하려고 한다. 사건의 이미지 는 대나무에서 바삭하는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삭하는 소리는 시 간적으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過程)이다. 바삭 하는 소리는 다른 것과 분리되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대나무와 돌멩이 그리고 공기의 움직임 등과의 관계(關係)이다. 이러한 관계와 과정으로서의 사건은 확정된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소리이고 무엇이 공기 이고 무엇이 돌멩이와 대나무의 부딪침인가?

우리는 존재의 이미지에 대비하여 사건의 이미지를 설명할 수 있다. 사건 은 공간적 연장이 확정되지 않으며 연장이 없을 수도 있고 무한할 수도 있 다. 그리하여 사건은 연장성(延長性)이 그 개념의 핵심적 요소가 아니다. 또 한 사건은 시간적으로 불변(不變)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의 변화로 이루어 진다. 사건은 외적(外的)으로 경계(境界)를 지울 수 없으며 분리되거나 독립 되지 않는다. 사건은 내적(內的)으로 자기동일성이 규정되지 않는다. 존재의 이미지에 있어서 핵심적인 이미지인 연장성, 불변성, 분리독립성, 자기동일성 등은 사건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건이 존재에 대하여 대립적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건과 존재 는 동일한 것에 대한 서로 다른 집합표상인 것이다. 돌멩이 내부의 원자적 (原子的) 세계를 무시하고, 바위에서 모래에 이르는 과정을 사상(捨象)하고, 돌멩이와 주변의 땅과 하늘, 물과 바람의 관계를 단절(斷絶)하고, 인위적으로 분별하여 분리독립되고 불변하는 자기동일성을 부여하여, 하나의 사물로서 집합표상화할 때, 그것을 돌멩이라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다. 존재는 사건 의 한 측면(側面)이며 부분적(部分的) 집합표상이다.1)

사건의 시각(視角)에서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면, 이제까지 존재로 규정하 였던 것이 모조리 사건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대나무나 돌멩이 를 하나의 존재물로 규정한다. 그러나 대나무를 관찰하는 기간을 10년이나 10 0년으로 하여 본다면 그것은 순간적으로 발아하여 성장하고 피었다가 사라지 는 하나의 사건이다. 돌멩이도 수억년의 시간에서 보면 마찬가지이다. 다른 한편 대나무를 미시적(微視的)으로 관찰한다면 수많은 분자나 원자들이 격렬 하게 야기시키는 사건의 집합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인간 역 시 하나의 사건이다. 인간은 태어났다가 죽는 과정으로서의 하나의 사건이며, 다른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로서의 하나의 사건이며, 24시간마다 모든 세포가 대체되는 췌장과, 열흘만에 전면갱신(全面更新)되는 백혈구와, 한달만에 대부 분의 담백질이 교체되는 뇌(腦) 등 복잡한 사건의 집합이 바로 인간인 것이 다. 존재는 사건의 특수한 유형이다. 즉 어떠한 측면에 있어서는 같은 유형의 사건이 상당한 시간에 걸쳐 반복(反復)되는 그러한 사건의 장(場), 또는 사건 의 체계를 우리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건은 세계의 모든 현상에 대한 가장 보편적(普遍的)인 집합표 상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러한 사건을 '연기(緣起)'로 표현한다. 사물과 현 상과 세계를 연기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존재는 보편적인 규정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특수한 규정이 된다. 이렇게 존재의 집합표상을 사건의 집합표상 으로 대체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2.2.2. 분별(分別)의 철학

존재의 집합표상을 사건의 집합표상으로 대체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 니다. 사건의 집합표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데는 연장성, 분리독립성, 불변성, 자기동일성 등의 기준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을 사용하지 않으면 세계를 규정(規定)할 수 없게 된다. 바삭하는 소리에 대하여 대나무 와 돌멩이는 제거하고, 그 부딪치는 순간의 공기의 진동만을 그 바삭하는 소 리의 사건으로 규정할 것인가? 그리고 공기의 진동은 어느 정도의 공간적 영 역(領域)과 어느 정도의 시간적 지속(持續)을 끊어서 '바삭하는 소리'라는 사 건으로 규정할 것인가? 그리하여 존재를 부정하면 사건마저 규정할 수 없게 된다. 그리 고 사건의 관점에서는 존재, 시간, 공간, 운동, 변화등도 규정되지 않는다.2)

나아가 존재론적인 집합표상을 부정하는 것은 언어(言語)를 부정하는 것 이다. 언어자체가 존재론적인 것이다. '돌멩이'라는 표현이 이미 돌멩이가 '존재'라는 이미지를 함축한다. '돌멩이'라는 언어적 표현이 돌멩이라는 존재 의 '자기동일성'을 의미하며, 그렇지 않으면 '돌멩이'라는 표현은 무의미한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세계를 존재화(存在化)하는 것이고, 따라서 '추 상의 카르마'를 야기한다. 모든 개념적 파악(把握)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부터 분리독립된 자기동일성(즉 存在)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추상 의 카르마'를 피하고 세계를 사건으로 규정하려고 하면, 언어와 개념으로 파 악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점에서 초월적 집합표상 또는 집합표상의 초월(超越)으로 통하는 상상력의 발휘가 필요한 것이다.3) 그러 나 우리는 초월적 집합표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를 인식(認識)한다는 것을 세계를 개념적(槪念的)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카르마를 제거하는 가 적은 새로운 집합표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집합표상을 초월(超越)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합리적 집합표상을 지양하고 발전(發展)시키는 것이다.

합리적 집합표상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세계를 임의로 분할하는 것이 며, 우리의 주관(主觀)을 투입(投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은 객관 적인 경계(境界)가 없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어떠한 사건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인 복잡한 상호관계의 과정에 대하여, 인간이 임의적 으로 관계영역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리를 형성하는 대나무, 돌맹이, 공기 진동의 시공적 영역 가운데 한 부분을 절단(切斷)해 내어 '바삭하는 소 리'라는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나무의 신진대사(新陳代謝)에 관계되는 수분과 태양, 영양의 제공 시스템을 이루고 있는 관계망 가운데, 어 느 정도의 시공적 영역의 사건의 집합을 그 대나무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주관을 투입하여 선택 함으로써 소리와 소리 아닌 것, 대나무와 대나무 아닌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건의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려고 할 때 최초의 전제(前提) 는, 세계는 우리의 주관을 투입하여 세계를 분별(分別)한다는 것이다. 주관적 관점이 투입되지 않으면 단 하나의 사건도 규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 주관적 관점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 만 우리의 세계에 대한 해석에는 그 기본적 단위의 규정에서부터 항상 객관 적으로 무한(無限)한 사실에 부딪치며, 우리는 주관적 관점으로 이러한 무한 한 사실 가운데에서 특정한 것을 선택(選擇)하고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객관적 세계가 우리에게 반영(反映)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관을 투입하 여 세계를 분별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세계에 관한 집합표상을 창조하는 것이 다.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세계를 부분으로 나누는 분별(分別)이다. 그리하 여 합리적 집합표상은 세계를 분별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그것은 간단 히 말하여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4) 다만 이러한 분별 이 달(月)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하지, 달(月)은 아닌 것이다.

2.2.3. 연대적 집합표상(連帶的 集合表象)

우리가 사건으로 세계를 볼 때 즉각 발견되는 것은, 세계가 사건의 상호의 존관계(相互依存關係)라는 것이다. 주관을 투입하여 세계에서 사건을 분별할 때, 세계는 하나의 사건과 다른 모든 사건들의 상호의존관계로 세계를 해석된 다. 하나의 사건은 자기동일성이 객관적으로 규정되지 않을만큼 세계는 상호 의존의 관계망이다. 이렇게 볼 때 세계는 무한(無限)한 사건의 상호의존관계 로 나타난다. 바삭하는 소리는 돌멩이와 대나무 그리고 공기에 의존한다. 그 것은 돌멩이와 대나무와 공기를 인연(因緣)으로 하여 연기(緣起)한 것이다. 바삭하는 소리는 대나무를 형성한 수분과 영양분 그리고 태양열 그리고 바람 과 구름, 공기를 형성하는 여러 요소들, 돌멩이가 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 향엄이 그 장소에 가게되고, 향엄이 돌멩이를 던지게 된 이유, 나아가 향엄이 존재하게 된 이유로서 향엄의 어머니가 향엄을 낳은 사건.....등 우리는 바삭하 는 소리에서 무한한 사건과 전우주와 시간의 전역사에 이른다. 즉 우리가 하 나의 사건을 규정하는 것은 전우주를 규정하는 것이다.5)

이렇게 사건으로 세계를 파악할 때, 세계는 상호의존하는 전체성(全體性) 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분리독립된 개개의 벽돌에 의하여 건축되는 세계가 아 니라,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으로 연결된 그물망의 한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 가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한 사건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우리가 사건과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그중에서 몇개의 사건의 상호의존으로 인식하는 것 이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두 개의 사건의 상호의존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두 개의 사건의 상호의존관계는 그 두개의 사건이 형성하는 전체사건과의 또 하 나의 상호의존관계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하나의 현상은 두 종류의 상호의존, 즉 두 개념간의 상호의존과, 그 두 개념과 전체개념과의 상호의존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세계는 이러한 이중의 상호의존 관계로 일단 접근할 수 있다. 이 것은 불가(佛家)에서 말해지는 가장 단순한 연기법(緣起法)에 그대로 표현되 어 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저것이 일어나므로 이것이 일어난다.} 이러한 연기법에서 '이것'과 '저것'이 상호의존하고, '이것' '저것'이 각각 이것 저것을 포괄하는 '전체'와 상호의존한다. 이러한 상호의존관계에서 각 부분과 전체가 상호규정(相互規定)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연기법에서 '이것', '저것', '이것 저것을 포괄하는 전체'는 각각 분리독립된 존재가 아 니다.6) 저것이 없으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또한 전체가 없으면 이것 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러한 점은 '저것'과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연기법은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이것이나 저것으로 표현되는 개개의 사건들이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것 은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부정이다. 둘째로, 그것은 하나의 사건에서 세계전체 에 이르는 인식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법(緣起法)은 우리가 분별(分別)한 사건을 다시 상호의 존으로 파악함으로써 언어적 카르마를 감소시키며 세계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념적 분별과 그 상호의존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불가분적(不可分的)인 전일성(全一性)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일적인 세계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다. 개념적 분별의 세계에서는 그 것은 우선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부정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존재를 부정하고 사건과 연기의 관점에서 세계를 규정하고 해석하는 것을 우리는 연대적(連帶 的) 집합표상이라고 부를 것이다.

연대적 집합표상은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부정(否定)의 철학으로 서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카르마를 규명하는 것이다.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부 정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세계의 진실한 모습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7) 다른 하나는 긍정(肯定)의 철학으로서 세계의 불가분적인 전일성, 연대성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에 관하여 존재론적 집합표상과는 전혀 다른 문 제를 제기하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8)

2.2.4. 향엄의 공안

향엄이 이와 같은 바삭하는 소리를 듣고 얻은 깨달음은 어떤 것이었을 까?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무엇이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알게 되었을 까? 그것이 아니다. 햐엄의 최초의 깨달음은, 그의 공안(태어나기 이전의 자신에 관한 질문)이 존재론적인 집합표상에 입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무엇이었고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질문은, 그의 존재 적 동일성(同一性: 分離獨立되고 不變하는 自己自身)을 전제(前提)로 하는 집 합표상이다. 세계를 사건으로 해석하고 자신을 존재로 규정하지 않는다면 태 어나기 이전의 자신이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러한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카르마였다. 그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다. 그는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카르마를 깨닫자 자신 이 문제가 되지 않는 문제에 매여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폐기할 때, 그는 태어나기 전의 존재적 (存在的) 자아(自我)와 죽은 후의 존재적 자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의 존재적 자아마저 부정(否定)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현실의 존재적 자 아를 긍정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태어남으로 시작되고 죽음으로써 끝나는 그 러한 전형적인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고, 이것 역시 존재론적 집합표상 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자신을 존재로서 관찰하지 않으며, 자신의 독립적 자기동일성, 자아의식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 라 자신이 스스로 형성한 집합표상(集合表象)일 뿐이다.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기동일성은 자신이 형성한 존재론적 집합표상일 뿐이다. 여기에서 벗어날 때 그의 공안은 의미를 잃게 된다. 그것은 문제로서 성립하지 않는 다. 자기동일성이 부정되는데,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무엇이었으며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성립될 수 없다. 세계가 존재가 아니듯이 향엄이라는 인간도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주관을 투입 하여 형성한 존재적 가상(假像)일 뿐이다. 바삭하는 소리를 존재로 규정한다 면 그것은 전우주적(全宇宙的) 관계망의 한 순간의 한 부분을 주관적으로 절 단(切斷)하여 존재의 집합표상으로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성은 우리의 집합표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전우주적 관계망의 한 부 분을 주관적으로 절단하여, 독립하고 불변하는 자기동일성을 가진 존재로 규 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자신과 세계의 진실한 모습이 아니 다.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사건인 것이다. 우리 자신의 자기동일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며, 우리가 형성한 집합표상으로서의 자기동일 성에 대하여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허구(虛構)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이러한 자기동일성의 부정은 동시에 자아(自我)의 무한한 확대를 가져온 다. 세계를 사건으로서 해석할 때 전우주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자기 자신은 우주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우주와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에게 혜가(慧可)의 공안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혜가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라 고 규정하였던 불안에 떠는 마음이라는 것이 사실은 자신이 형성한 존재론적 집합표상, 허구의 집합표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향엄과 혜 가는 동일한 공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폐기하고 사건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때 우 리의 문제는 달라진다. 이제까지 스스로 자신이라고 생각하였던 개별적 존재 적 자기동일성이 부정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전우주적 전일성(全一性)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사건이라고 한다면, 세계는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것은 향엄이라는 개별적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가 된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개별적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진실한 모습(眞面 目)이 어떠한가 하는 문제로 전환되는 것이다.

********* 願 ***********

어떤 나그네가 호랑이에 쫓겨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 절벽이 나타났고 절벽에서 호랑이에게 몰린 나머지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절벽 밑 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던 나그네는 구사일생으로 절벽 중간에 뻗어나온 나뭇 가지를 붓들 수 있었다. 그런데 아래를 보니 깊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강 물이 흐르고 있었고, 강물에는 나그네를 잡아먹으려고 악어가 입을 벌리고 떨 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를 보니 여전히 호랑이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그네가 붓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들쥐가 나타나 갉아먹고 있지 않은 가. 자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겠는가?


Last Updated: 1995년 7월 1일 W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