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생성(生成)의 문제



우리는 이제까지 존재론적 집합표상과 그 카르마 를 대단히 단순하게 논의하여 왔다. 우리의 관점을 존재에서 사건으로 전환하면 존재론적 집합표상은 용이하게 수정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 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존재와 같은 하나의 개 념을 배제한다고 하여 쉽게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벗 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애써 사건의 관 점에 서서 세계를 해석하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재구성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존재론적 자아의식을 극복할 수 없으며, 무아(無我)의 경지(境地)에 들어갈 수 없 으며, 연대성(連帶性)을 명철하게 인식하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가 여전히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증거이다.1) 이것은 합리적 집합표상 의 카르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대적 집합표상을 통하여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카르마를 발견할 수 있 으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기존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2.4.1.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 者)

존재론적 집합표상이란 시간과 공간의 구조 속 에서 존재가 운동 변화하는 것이 세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가시세계(可視世界)의 이미지를 기초로 하고 있다. 따라서 그만큼 우리의 사고에 있어서 뿌리깊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존재론적 집합표상으로 세계를 해석할 때 에 즉각 부딪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 집 합표상으로는 운동과 변화, 생성(生成)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단히 변화하는 현실 세계 의 모습과 명백히 조화(調和)되지 않는다. 존재라는 것은 자기동일성과 불변성을 그 이미지로 한다. 그 런데 이러한 동일성(同一性)이 변화하여 다른 동일 성으로 전환하고, 불변성(不變性)이 부정(否定)되어 변화가 야기된다는 것은, 존재로서는 설명할 수 없 는 것이다. 존재는 자기동일성인데, 이러한 자기동일 성이 부정(否定)되는 계기(契機)는 존재 자체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A는 A일 뿐이지 A가 B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던 B 라는 존재가 갑자기 생겨나는 생성(生成)이 설명되 지 않는다. 생성은 새로운 자기동일성을 가진 존재 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의 다른 존 재로부터 생성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현실에 존재하 고 있었던 것이며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 라서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생성이 아니다. 만일 그 것이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그것은 무(無)로부터 생겨난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불 가능하다. 무(無)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며 따라서 무엇이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可能性)조차 없는 것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전제하 는 한 생성과 운동과 변화는 설명할 수 없으며 부정 되지 않을 수 없다.2) 이것이 존재론적 집합표상이 부딪치는 난점(難点)이다.

이러한 난점을 해명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 는 탁월한 결론에 이르렀고, 그의 결론은 현대의 집 합표상에 있어서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자신은 스스로 운동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으며 생성되지도 않으면서, 다른 존재를 운동시키고 변 화시키고 생성시키는 것이 실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이것이 부동(不動)의 동자 (動者) 또는 원동자(原動者)이다. 이것은 존재론적 집합표상으로 세계를 해석할 때 이르게 되는 논리적 귀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부동의 원동자 가 바로 신(神)이라고 규정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 아들여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을 정립하였다. 이것이 서양의 중세를 지배한 세계관이었다. 그는 신(神)의 존재에 대하여 다섯 가지 방식으로 증명하였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적용이었다. 3) 이러한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매개로 하여 그는 인간의 집합표상을 두 종류로 나누었으며 그것을 화 해시켰다. 하나는 인간의 이성(理性)에 의하여 형성 되는 집합표상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신의 계시(啓 示)인 성경(聖經)에 의지함으로써 형성되는 집합표 상이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두 종류의 집합표상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이성에 의한 추론은 신의 계시와 같은 결론에 이르며, 인간 이성 으로서 해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의 계시 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합리적 집합표상과 초 월적 집합표상을 가장 성공적으로 조화시켰다.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답에는 신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세계는 신이 주재(主宰)하는 세계였고, 사회와 인생 은 신의 구원에 이르는 도정(道程)이었으며, 삶과 죽 음은 신의 구원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신은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주었던 것이다. 성경 은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하여 신의 권위로 계시한 대답들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 여 성경과 사제의 가르침에 의지하였다.4)

그러나 중세의 초월적 집합표상과 합리적 집합표 상의 조화는 근대에 이르러 붕괴하였다. 그리고 존 재의 운동과 변화 그리고 생성의 문제가 근대에 와 서는 이데올로기적 집합표상의 문제로 되었다.

2.4.2. 과학적 유물론(科學的 唯 物論). 변증법적(辨證法的) 유물론

근대에 이르러 과학이 발전되고 산업화가 진전되 자 인간의 집합표상에 있어서도 중대한 변화가 야기 되었다. 인간의 삶과 사회를 좌우하는 것은 이제는 신(神)이 아니라 객관세계(客觀世界)에 대한 지식과 그 적용이었다. 이제 신은 인간에게 중대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중대 한 문제이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것이며 어쩌면 나 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문제인 것처럼 되었다. 중세 에는 기도(祈禱)하는 것이나 정신적으로 신에 가까 와지는 것은 삶의 중요한 하나의 요소였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는 삶의 중요한 요소는 물질적 가치에 대한 추구였다. 인간과 사회는 세속화(世俗化)되었 다. 이러한 세속화는 합리성의 이름으로 고무되었다. 그것이 문명(文明)의 성격(性格)이라는 점은 무시되 고 다만 합리적이라는 점에서만 진보(進步)로 인식 되었다.

근대의 집합표상이 신을 세계의 중심에서 밀어내 었다고 하더라도 세계는 여전히 존재로 해석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존재론적 집합표상은 과학에 의하여 확고하게 지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세계는 과학적 방법으로 해명되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완전히 해명 될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세계를 물질적으로 해석 하는 것이었으며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原子論)이 부활하였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의 '무(無)는 존재 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수정하는 것이었지만, 그래 도 세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내용은 존재의 이미지와는 상이한 '텅 빈 공간' 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간이 존재한다면 더이상 분할할 수 없는 원자(原子)들이 분리되고 결합되고 운동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변화는 이러 한 불변하는 존재로서의 원자들의 운동으로 환원된 다. 이러한 과학적 이론의 구조는 절대공간과 절대 시간이 존재하고, 그 내부에 운동하는 원자들이 있 으며, 세계는 이러한 원자들의 역학적(力學的) 운동 관계로 해명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존재론적 집합표 상은 가시세계의 자연스런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었 다. 이것이 근대의 과학적 유물론(科學的 唯物論)이 다. 이러한 과학적 유물론은 그가 유신론자(有神論 者)라고 하더라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계 관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에서도 여전히 존재론적 집 합표상의 철학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원자들의 운 동은 왜 야기되는가.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 하여 과학적 세계관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세계 관을 완결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해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근대의 집합표상의 출발은 존재론에 있어 서 독립한 실재로서 정신과 물질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존재는 세 개의 차원으로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하나는 사유(思惟) 를 속성으로 하는 정신이었고 또 하나는 연장(延長) 을 속성으로 하는 물질이었으며, 세째로 이 모든 것 의 근거로서 신(神)이었다. 그리하여 뉴톤을 비롯하 여 많은 근대인들에게는 여전히 세계의 근거(根據) 는 존재적(실재적) 신이었다. 그리고 신은 과학의 대 상이 아닌 분야에 대한 해답이었다. 그리고 신의 근 거는 결국 부동의 원동자에 귀착하는 것이었다. 그 러나 근대인에게는 부동의 원동자의 논리는 합리적 으로 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다.5) 그리하여 신 은 합리적 집합표상이 아니라 초월적 집합표상으로 되돌아간다.6) 이것은 비합리적인 초월적 집합표상 을 승인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합리성과 과학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세계는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 唯物論)은 이러한 합리성과 과학성 을 강조하면서, 근거없는 실재를 인정하는 관념론 (觀念論)을 부정한다. 그들은 신을 개입시키지 않고 세계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다. 그러나 신을 부정할 때 존재론적 집합표상이 제기하는 문제, 즉 부동의 원동자의 문제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이 제시하는 대답 은, 존재적 사물 내부(內部)의 모순(矛循)이 운동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존재적 사물의 외부(外部)에서 운동의 원인을 구하면 그것은 결국 신에 이르게 되 어 버린다. 따라서 존재적 사물의 내부에서 운동의 원인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유물론자 들은 존재적 사물의 내부에 모순이 실재하며, 이 모순이 사물의 운동을 야기한다고한다.7)

존재론적 집합표상에 있어서 변화는 어떤 자기동 일성(自己同一性)이 다른 자기동일성으로 전환(轉換) 하는 것이다. 모순(矛循)은 두개의 자기동일성이 동 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비양립성(非兩立性)이다. 이 러한 모순이 사물의 내부에 실재하므로 동일성의 전 환(즉 변화)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것도 증명한 것이 아니다. 비양립적인 두개의 자기동일성이 '실재' 한다거나, 두개의 동일성의 비 양립적인 상태(즉, 모순)가 '실재' 한다는 것은, 결 코 동일성의 '전환'을 '야기(惹起)' 하는 논리적 근 거가 될 수 없다. 존재와 변화는 여전히 단절(斷節) 되어 있으며 그것은 건널 수 없는 강(江)이다. 이것 은 부동의 원동자에 의한 신의 증명과 동일한 난점 (難点)을 가지고 있다. 원인이 필요없는 차원을 전제 할 때에만 원동자가 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변화'와 동일시 되는 '존재' 상태를 전제할 때에만 자체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다 결론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부동의 원동자나 모순의 논리는 사실 아주 단순 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세계를 가시세 계(可視世界)의 존재물의 유추(類推)로서 세계를 해 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신(神)이나 세계의 연대성을 돌멩이를 사용하여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것이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카르마인 것이다. 그것 은 추상의 카르마이다.

2.4.3. 문제의 해소와 새로운 문 제

세계를 존재의 집합이나 존재의 관계와 운동으로 보지 않고 사건의 관계망(關係網)으로 규정한다면, 운동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그 성격이 변화한다. 왜 운동이 발생하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존재론적 집합표상에 있어서 존재가 주어졌듯이 사 건의 관점에서는 운동이란 당연한 것으로 주어진다. 왜냐하면 사건은 이미 그 자체가 운동이고 변화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존재(여기에서의 존재의 의미는 反復性과 恒常性을 가진 운동체계이다)야 말로 문제 가 된다. 왜 어떠한 운동체계는 반복성과 항상성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의 문제 이다. 이처럼 집합표상의 전환(轉換)은 문제를 전환 시킨다.

사건의 관점에 있어서는 존재, 관계, 과정, 운 동, 변화, 시간, 공간, 본질,현상 이 모든 것이 사실 은 어떤 사건에서 특수한 측면을 집합표상화한 것이 다. 존재도 사건이고, 관계도 사건이며, 운동도 사건 이고, 변화도 사건이다. 존재론적 집합표상은 하나의 사건을 존재와 운동으로 분할(分割)한 후에 다시 이 것을 결합(結合)시키지 못하여 곤란에 빠져 있는 것 이다. 우유를 쏟아놓고 다시 주워 담을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건과 연대성 의 관점에서 세계를 관찰할 때 운동의 궁극적 원인 의 문제는 세계의 진실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집합표상이 제기하는 문제이며 바로 존재 론적 집합표상의 카르마이다. 우리는 스스로 형성한 잘못된 '집합표상이 제기하는' 문제를 마치 세계의 실재(實在)하는 문제인 것처럼 논쟁해 온 것이다.

우리가 사건의 관점에 설 때, 이처럼 운동의 궁 극적 원인이라는 문제는 해소되어 버리지만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존재론적 집합표상에 의지 하지 않고 세계를 본다면, 세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 가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의지해 오던 세계 관을 던져 버릴 때 새로이 나타나는 세계관이란 무 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 속에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해 온 존재의 문제, 운동과 변화의 문 제가 포괄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제까지 사 건과 연대성으로서의 세계로 규정해 왔다. 그러나 사실은 사건과 연대성의 이미지도 존재의 이미지와 의 관계에서 규정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건과 연 대성의 집합표상도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폐기한다면 공허한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하나의 문제를 해 소하였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셈 이다. 연대성으로서의 세계란 무엇인가. 그리고 시간 과 공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세계의 연대성에 대하 여 존재의 상호의존성의 이미지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존재가 부정된다면 존재의 상호의존성이라는 관계도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연대성이란 무엇인가? 존재론적 집합표상에 있어서는 존재가 단순정위(單純定位)하는 무대(舞臺)로서 시간과 공간 이 규정된다. 그런데 존재를 부정한다면 그 단순정 위의 무대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시간 과 공간이란 무엇인가?

2.4.4. 연대성, 위상(位相), 매개 체(媒介體)

연대성의 집합표상에서는 세계의 한 부분을 규정 하기 위해서 사건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사건의 개 념은 존재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사건은 그 사 건 이외의 다른 사건과의 관계의 총체로서 의미를 가질 뿐이다. 이와 같이 어떤 사건과 다른 모든 사 건과의 관계의 총체를 우리는 그 사건의 위상(位相) 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사건의 위상은 존재의 자기 동일성에 대립적인 개념이다. 이것은 연대성의 집합 표상에 있어서 하나의 사건이란 다른 모든 사건에 대한 위상(位相), 즉 연대성에 있어서의 위상에 의하 여 그 자신의 본질이 규정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 하여 하나의 사건이란 다른 사건에 대하여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라 다른 사건들 매개하는 매개체(媒介 體)일 뿐이다. 모든 사건은 다른 모든 사건 상호간 의 관계를 매개하는 매개체(媒介體)이다. 이것이 부 분에 대한 규정으로서의 사건과 전체에 관한 규정으 로서의 연대성의 관계이다. 인드라법망계가 시사하 는 연대성이란 바로 부분이 전체에 대한 위상(位相) 에 의하여 규정되고, 모든 부분은 다른 부분들에 대 하여 매개체(媒介體)로서 작용하는 그러한 연대성이 다.

우리가 상식적 차원에서 제시한 연대성의 긍정적 이미지는 스탈린이 도식화한 변증법적 유물론(辨證 法的 唯物論)의 제1법칙, 즉 만물(萬物)의 통일성(統 一性) 또는 보편적 연관(普遍的 聯關)과 상호작용의 법칙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피상적으로 규정하면 우리가 이제까지 설명한 연대성의 이미지는 만물이 상호연관되어 있고 상호작용 속에 규정된다는 법칙 과 동일한 진술로 생각될 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 은 전체성에 관하여 신을 치워버리고 부분적인 구체 성 외(外)의 전체를 인정하지 않는 구체적 총체성 (具體的 總體性)의 관점에 선다. 그리하여 전체를 구 조화되고 발전하며 형성과정에 있는 구체적 총체성 으로 본다. 모순이 총체성을 구체화하며 총체성 속 에서 모순들이 법칙을 형성하며, 총체성은 이러한 구체화와 법칙의 과정에서 발전하며 형성과정에 있 다는 것이다.4) 우리의 연대성의 이미지와 변증법적 유물론의 구체적 총체성 또는 만물의 상호연관성은 몇가지 점에서 전혀 다르다.

첫째, 구체적 총체성은 '존재'들의 총체성이며 '존재'들의 상호연관성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연대성은 존재들의 연대가 아니다. 연대적 집합표상 에 있어서 '존재'는 아예 철학적 범주(範疇)가 아니 다. 그것은 다만 상식적인 개념일 뿐이다. 나아가 연 대적 집합표상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는 존재(存在) 의 부정(否定)이다. 연대성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이 다. 부분은 전체에 대한 위상에 의해서 규정된다. 모든 부분은 다른 부분들의 상호간을 매개하는 매개 체이다. 부분들은 존재가 아니라 다른 모든 부분들 과의 관계(위상)에 의하여 그 본질이 규정된다. 내부 적 속성에 의하여 본질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만물의 보편적 연관성 내지 구체적 총체성 은 그 외부(外部)에 따로이 존재하는 시간(時間)을 가정하고 있으나, 사건이나 연대성에 있어서 시간은 내부적인 한 측면이다. 구체적 총체성의 이미지는 형성과정에 있고 발전하는 구조적 전체이다. 이것은 전체적 구조를 발전한다는 것은 시간이 외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시간이 전제되지 않는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세계관은 시공 간 속에 단순정위하는 물질적 존재들의 구조가 형 성되고 발전되는 이미지이다. 모순과 총체성의 난 해한 논리들을 넘어서면 다양한 구체적 존재물들을 지배하는 변증법이라는 시간적 법칙이 기독교의 신 을 대치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하여 연대성에 있 어서 시간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세째, 보편적 연관이 합리적 집합표상에 한정하 는 것이라면, 연대성은 세계가 합리성을 초월(超越) 한다는 것을 승인(承認)한다. 만물의 보편적 연관성 내지 구체적 총체성의 내용은 명백하지 않다. 만일 그것이 변증법과 같은 철학적 법칙이라면 그것은 빈 약하다. 주역(周易)은 그러한 법칙을 64 종류나 가지 고 있다. 한편 보편적 연관의 내용이 과학적 법칙 이라면 관념론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계는 근대 적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존재론적 집 합표상이 제시하는 세계의 모습은 너무나 적은 지식 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규정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가시세계의 이미지를 세계전체에 확장할 수 있다는 근대적(近代的) 자만심(自慢心)의 발로이다. 이에 대하여 연대성의 집합표상은 세계가 이러한 합리성 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승인한다. 연대 성의 철학은 초월적 집합표상에 대하여 그것을 언어 (言語)로 논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부정하지 않으 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또한 초월적 집합 표상이 배제되고 철저하게 합리적이라고 주장되는 모든 합리적 집합표상들이 사실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초월적 집합표상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다.

연대성의 긍정적 의미는 궁극적으로 초월적 집합 표상, 또는 집합표상의 초월에 이른다. 이에 대하여 연대성의 부정적 의미는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부정 이다. 그 첫째의 작업은 '존재(存在)'의 부정이었다. 그리고 존재의 부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시간 (時間)과 공간(空間)'의 부정에 이른다. 이것이 우리 의 새로운 주제이다.


Last Updated: 1995년 7월 1일 W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