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시간(時間)과 연대성(連帶性)
- 3.1.1.할머니의 점심공안
- 3.1.2.시간이라는 집합표상
- 3.1.3.단순정위(單純定位)의 카르마
- 3.1.4.연대성의 한 측면으로서의 시간
************** 緣 **************(1) 덕산(德山)은 일찌기 출가하여 모든 경전에 박학하였고 특히 금강경에 정통하여 스님들에게 자 주 금강경을 강의하여 스님들로부터 그의 속성 주씨 를 붙여 '주금강(周金剛)' 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었 다. 그는 남방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한다는 소 리를 듣고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리라 결심하고 광주리에 '금강경 청룡소초'를 넣어 짊어지고 용담 (龍潭)선사가 가르치고 있던 호남지방을 향하였다. 도중에 용담사 입구의 길 옆에서 배가 고파 짐을 내 려놓고 그곳에 있던 떡장수 할머니로부터 떡을 사려 고 하였다. 그 할머니는 덕산의 광주리를 가리키며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덕산이 `금강경 청룡소초' 라 고 대답하자 할머니가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여쭈어 볼 말씀이 있는데 대답을 잘 해 주시면 점심을 공짜로 드리고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로 가 보십시오. 금강경에 보면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고 하였읍니다. 그런데 상좌께서는 어느 마음에 점심을 들자고 하십니까 ? "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未審上座點個心)
덕산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점심을 먹지 못하고 용담사로 갔다. 그곳에서도 용담선사의 질문 에 대답을 못하고 깨닫기 위하여 한동안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吳經熊 저. 전게서 pp.233-234 요약)
(2) 단순한 역학적(力學的) 장소이동까지도 벌써 그 속에 하나의 모순(矛盾)을 내포하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고차적인 물질의 운동형태나 또 특히 유 기적 생명과 그것의 진화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앞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한 존재가 어느 순간이나 동일(同一)하며 또 동일하지 않은 데 있다 고 말한 적이 있다. 따라서 생명이라는 것도 역시 사물 및 과정 그 자체에 존재하여 부단히 성립되고, 해소되는 모순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순이 중지 하면 생명도 중지하고 죽음이 온다.......
보리알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수억만개의 보 리알을 벗겨 삶아 먹는다. 그러나 이러한 보리알 중의 하나가 적당한 조건을 만나, 다시 말해서 적합 한 지면에 떨어져 온도와 습기의 영향을 받아 그 자 체에 독특한 변화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싹이 나온다. 보리알 자체가 없어진다. 부정(否定)된다. 그 리고 그 대신에 거기서 보리알의 부정인 한 식물 이 발생한다.
( F. 엥겔스 저. {반듀링론} 김민석 역. p.133. 1 47)
************** 說 *************** *
떡을 팔고 있던 할머니가 덕산스님에게 점심을 내기에 걸고 질문한 내용은 무엇일까? 덕산스님은 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점심을 굶지 않으 면 안되었을까? 할머니는 덕산스님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스님께서는 이제 점심을 드실려고 하 는데, 과거(過去)의 시간에는 점심을 드실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는 흘러가버린 시간으로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미래(未來)의 시간에도 점심을 드실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시간은 아직 이르지 않은 시간으로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현재(現在)의 시간은 점심을 드시기에 충분한 시간입니까? 도대체 현재 라는 시간이 실재하는 것입니까? 순간적으로 과거 가 되어 버리는 흐름 속에 실재(實在)하는 현재의 시간을 붙잡을 수가 없읍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마 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다 고 합니다. 점심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어느 시간에 어느 마음에 점심을 먹을 수 있겠읍니 까. 도대체 점심을 먹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이 것이 할머니가 덕산스님에게 제기한 공안이었다.
우리의 시간에 대한 상식적 집합표상은 존재론 적 시간관이다. 시간이란 과거에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또는 반대로 시간이란 미래에서 흘러들어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 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의 과정에서는 현재 가 규정되지 않는다. 현재의 시간이란 무엇인가. 오 늘은 현재가 아니다. 지금은 오전이니까 오늘의 오 후는 미래이고 오늘의 새벽은 과거이다. 오전10시 에서 11시 사이는 현재가 아니다. 지금의 시간은 10 시 30분 근처를 지나고 있으니까 반(半)은 과거이고 반은 미래이다. 현재의 시간이 일정한 폭(幅)을 가진 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현재는 즉시 과거와 미래로 분할(分割)되어 버리므로 그러한 현재는 존재할 수 없다. 가령 현재가 10시 30분과 10시 31분 사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즉시 10시 30분 30초 등 임의의 더 작은 시각을 기준하여 과거와 미래로 분할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현재가 폭을 가지지 않는 임의의 시점(時點)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로(zero)이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 는다. 그리하여 덕산스님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점심 을 먹을 수 있는 현재의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그 할머니로부터 점심용으 로 떡을 받을 수 있는가.
점심을 먹는 사건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우리는 시계(時計)로 그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점심을 먹는데 '시간'이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빵이나 밥, 떡 을 먹는 것이지 시간을 먹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 리가 점심을 먹기 위해서 시간이라는 괴물(怪物)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라는 아름 다운 처녀(處女)의 시중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점심을 먹을 뿐이다. 이러한 점심을 먹는 사 건에 대하여 우리가 앉아 있는 일정한 장소로서의 공간과, 점심을 먹는데 걸리는 시간과, 점심을 먹는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으며 그렇게 인식한다. 즉, 누가 언제 어디서 얼마동안 점심을 먹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간, 공간, 존재, 운동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 다. 시간은 다른 사건과의 관계에서 그 사건을 인 식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몇 시에 점심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해가 중천에 왔을 때 점심을 먹었다고 하 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다른 사건과 의 관계를 집약적(集約的)으로 표현하는 집합표상이 지 시간 그 자체가 어떠한 실재(實在)인 것은 아니 다.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는데 시간이라는 집합표상 (개념)을 사용한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에게 시간이 어떠한 독립한 존재(즉 自己同一 性)라는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추상(抽象)의 카르마에 빠진다. 즉 시간이라 는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인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 할머니는 이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어떠 한 존재라면 그것을 분할(分割)할 수 있으며, 점심을 먹는데 의미를 가지는 부분은 현재라는 부분이다. 그런데 현재라는 부분은 아무리해도 존재하지 않는 다. 이러한 추론이 시간의 카르마이다. 시간이 돌멩 이와 같은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시간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할 때에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돌멩이와 같이 취급한다. 왜냐하면 존재의 이미지는 결국 돌멩이에서 유추된 것이며, 다른 존 재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 다. 그러나 시간은 돌멩이가 아니다.
이러한 결론은 사실은 상식(常識)이다. 누구도 시 간을 우리 앞에 내어 놓지 못한다. 자기가 차고 있는 시계를 내어 놓고 이것이 시간이라고 주장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돌멩이와 같 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승인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을 철저하게 추구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시간에 대하여 가지는 이미지는 달력이나 시계 등과 같은 것에서 유추된 것이다. 세월(歲月) 이 사람을 늙게 만든다고 한다. 문학적으로는 일상 적인 표현이나 세월이라는 시간이 사람을 늙게 만드 는 것이 아니다. 늙어가는 것 그 자체가 사람이라는 사건이며 이러한 사람의 평생이라는 사건과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도는 사건을 비교하여 인생 70년 등 으로 시간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구 (地球)를 회전시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사람을 늙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은 태어 나서 늙고 마침내 죽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30 세의 시점에서 갑자기 젊어지기 시작하여 어려지고 마침내 애기가 되어 이윽고 죽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에게만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인가. 아니다. 그의 변화(變化)의 방식(方式)이 다른 사람과 다를 뿐이다. 이것은 마치 씨앗이 꽃이 되는 것과 씨앗이 썩어버리는 것은 서로 변화방식이 다른 것과 같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시간이 달리 작용했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람이 젊어져 애기가 된다 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이 늙는 것과 마찬가 지로 하나의 사건이며 시간이 흐르는 방향과는 관계 없는 것이다. 도대체 '시간이 어떠한 방향으로 흐른 다'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표현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과 물(水)이 흐르는 것은 다르다. 어떤 사람이 빛 의 속도에 가까운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왔더니 자신의 아들이 자신보다 더 늙어 있었다 고 하자. 이때 그 사람에게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 고 그의 아들에게는 시간이 빨리 흐른 것인가. 아 니다. 이것은 우리의 잘못된 집합표상이다. 두 사람 의 변화하는 방식, 늙어 가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 다. 오랫만에 만나 친구가 자신보다 훨씬 젊어 보인 다고 하여 그에게만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고 할 수 는 없다. 우주선의 여행자나 오랫만에 만난 친구나 모두 동일한 경우이다.
우리는 점심을 먹을 수 있으며 제논의 화살(附 錄 참조)은 날아갈 뿐이다. 사건의 외부에서 사건에 관여하는 독립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存在)라고 하면 즉시 시간은 존재 외부에 독 립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사건(事件)이라고 하면 시간은 사건 내부(內部)적 한 양상이다. 시간은 세계 의 연대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집합표상이다. 우리가 존재 외부(外部)에 독립해 버린 시간을 전제하여 운 동을 설명하려고 할 때 모순에 부딪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존재론적 시간의 집합표상을 던져 버리고 세계의 연대성을 나타내는 시간의 집합표상 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존재론적 집합표상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분리(分 離)되고, 존재도 서로 분리되며, 존재물의 운동(변 화)도 서로 분리되어있다. 시간과 공간의 무대(舞臺) 위에 존재가 단순정위(單純定位)한다. 그리고 그 존 재는 시공간의 구조 속에서 운동변화하는 것이다. 운동변화라는 것은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고 운동변화의 주체로서 존재물이 필요한 것 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시간을 전제(前提)로 한다면 우리가 점심 을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화살이 날아가는 운 동도 불가능하다. 즉 제논(Zenon)의 역설처럼1) 날 으는 화살은 정지(停止)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 여 엥겔스는 존재론적 시간을 전제로 하여 화살이 날아간다는 현상에서 실재하는 모순(矛盾)을 발견한 다. 보리알이 싹이 트는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보리알은 매순간 보리알이면서 동시에 보 리알이 아니기 때문이다.2)
제논이나 엥겔스나 동일한 전제(前提)에 입각해 있다. 즉 존재론적 시간의 집합표상을 전제로 하여 운동과 변화를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존재론적 시간은 분할이 가능하며 이렇게 분할되는 시간으로 운동과 변화를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것은 추상(抽象)의 카르마이다. 우리는 화살이 날아 가는 사건과 보리알이 싹이트는 사건, 덕산이 점심 을 먹는 사건에서 시간의 집합표상(集合表象)을 형 성하는 것이지, 우리가 형성한 시간의 집합표상에 부합(附合)하는 그러한 실재가 현실의 운동과 변화 에 직접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분리된 존재, 시간, 공간의 구조가 아니다. 여기에 존재론적 집합 표상을 적용시키려는 것이 단순정위(單純定位)의 카르마이다.
제논은 존재론적 시간의 집합표상을 전제로 하여 운동과 변화를 부정하였다. 엥겔스는 존재론적 시간 의 집합표상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현실의 운동과 변화의 사실과 조화시키기 위하여 모순이라는 집합 표상을 창조하였다. 연대적 집합표상은 그 전제(前 提)를 부정한다. 즉 존재론적 시간의 집합표상을 부 정한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존재론적 집합표상과 같은 시간을 부정한다면 시간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 는 것인가. 우리가 시간의 존재성을 폐기하는 것 은, 시간이라는 집합표상에 대응하는 세계의 어떠한 사실이나 성격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 다. 우리가 시간의 개념을 지극히 유용하게 사용하 고 있는 것은 그에 대응하는 세계의 어떠한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폐기한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괴물(怪物)이 세계를 조정한다는 그러한 상상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 다. 이러한 상상을 버릴 때 오히려 세계는 우리에게 하나의 신비(神秘)를 제공한다. 즉, 이러한 시간의 괴물이 모든 사물을 조정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물의 운동과 변화의 리듬이 대단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너무나 신비하게 연관되어 있어 신이나 괴물이 어떠한 법칙을 부과하 여 모든 사물들을 조정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정 도이다. 그것이 바로 세계의 연대성(連帶性)인 것이 다. 우리가 시간이라는 집합표상을 지극히 편리하 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시간의 개념 속에는 이러한 세계의 연대성이 당연한 것으로 내장(內藏)되어 있 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대성은 너무나 당연하여 마 치 하나의 실재(즉, 시간)가 이러한 이러한 연대성을 조정하는 것처럼 간주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에 대한 집합표상은 이러한 세계의 연대성을 존재화 (存在化)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과정적 성격에 있어서의 연대성이다. 우리가 시간의 존재론적 집합 표상을 버리면 이제까지 그러한 개념 속에 묻혀져 버렸던 세계의 연대성이 확연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첫째, 시간의 집합표상은 사건들이 반복적(反復 的) 리듬, 반복적 패턴(pattern)을 가지고 있는데서 형성된다. 이것을 우리는 사건의 패턴이 시간에 의 지하여 그 리듬을 반복하는 것처럼 간주한다. 그러 나 우리는 사실 왜 많은 사건에서 이와 같은 리듬이 나 패턴이 반복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모래를 공중에 흩뿌릴 때처럼 흩어져 버리지 않고 우리 몸 의 각 기관들은 혈액순환이나 신진대사를 반복한다 는 것을 안다. 원자는 반복하는 확률파(確率波)의 패 턴이다. 분자는 반복적으로 진동하는 구조의 패턴이 다. 유기체는 반복하는 다차원적(多次元的)인 상호 의존의 패턴이다. 수많은 사건들이 이러한 일정한 리듬으로 일정한 패턴을 반복한다. 이같은 사건의 내부에 있어서의 패턴의 반복성은 우리가 그것을 분 리하기 어려운 단일(單一)한 존재로 간주할 만큼 그 내부적 연대성이 완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 건의 반복적인 리듬에서 우리의 시간의 집합표상이 구성된다. 그리하여 시간의 이미지는 반복하는 리듬 이다. 시계(時計)는 이러한 리듬을 인위적으로 재현 (再現)한 것이다. 인간은 점심시간이 되어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식사하는 리듬을 시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부분의 -- 우리 가 존재라고 부르는 것 내부의 -- 상호의존성, 연 대성을 대변하는 인간의 집합표상이다. 이러한 의 미에서 시간은 존재의 정합성(整合性)의 표현이며 자연의 리듬이다.
둘째, 시간은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 이 실제로는 상호관계가 있으며 상호의존하고 있다 는 것을 발견하게 해 준다. 이것은 세계가 존재론적 인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초월하는 상호연관의 연대 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과관계에 대한 집합 표상은 존재와 존재를 연결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 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러한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으며 존재적 인과관계를 초월(超越)하는 연대성이 다. 한국의 갑돌이가 살아가는 것과 남아메리카에서 부는 바람은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의 갑돌이가 1,000년을 살지 못하고 70세에 죽는다는 것과 지구 전체의 환경은 긴밀한 관계에 있다. 다른 혹성에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가진 생물 체가 있다면 그 생명의 주기(週期)는 다를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생존의 기간이 유사하다는 것, 마찬가지로 고양이의 생존의 기간이 유사하다는 것 을 안다. 이것은 시간이라는 신이 고양이와 인간에 게 그 정도의 시간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지구와 우 주 모든 사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의 사건 들의 모든 사물의 상호의존관계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존재들의 일정한 패턴의 반복 하는 리듬이 상호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백합꽃이 피어서 지는 리듬과 꿀벌이 번식하고 성장하는 리듬 은 상호의존한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리듬과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리듬은 상호 의존한다. 그리 하여 세계와 사물들은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 도 사실은 상호의존적이고 전일적(全一的)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밀접함 -- 그 밀접한 상호관계 --이야 말로 세계의 상호의존적인 연대 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무의 식적으로 시간의 집합표상으로 표현한다. 사건의 내부적 연대성만이 아니라 사건 상호간의 관계의 밀접성, 상호의존성, 연대성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시간인 것이다. 상대성 이론(相對性理論)은 하나의 운동계 내에서의 모든 변화, 사건의 리듬은 전체적 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우리 가 지구에서 쏘아올린 인공위성이 빛의 속도에 가까 이 갈수록 그 인공위성 내부에서의 시간은 지구에 비하여 늦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인공위성 내부의 시계만이 늦게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천천히 늙고, 고양이도 생명의 주기가 지구에 비하여 길어 지며, 국화꽃도 지구에서보다 더 오래 피어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모든 변화의 리듬이 늦어 진다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신(神)이 존재하여 그렇 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인공위성 내부의 각 사 물의 변화의 리듬이 동일한 정도로 늦어질 만큼 그 상호의존성과 연대성이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 그 인공위성 속에서의 인간이 호흡하 고 늙어가는 리듬과 그 속의 달팽이가 기어가는 리 듬이 동일한 속도로 늦어지는 것일까. 만일 시간 이라는 괴물이 그렇게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것은 인간이 호흡하는 리듬과 달팽이가 기어가는 리 듬 사이에는 밀접한 상호의존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연대성이고 우 리는 그것을 존재화하여 시간의 개념으로 단순화하 는 것이다.
세째, 이처럼 시간은 세계의 연대성의 한 측면인 바, 그것은 역동적(力動的)인 연대성이다. 시간은 운 동과 변화의 과정적(過程的) 역동성의 차원에서 세 계가 연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은 달팽이라는 존재와 인간이라는 존재의 연대성이 아 니라, 달팽이가 기어가는 리듬과 인간이 호흡하는 리듬의 연대성이다. 즉 세계의 연대성은 역동적인 과정의 연대성이고, 그것을 우리는 시간의 개념으로 측정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대성의 이미지 로서 인드라법망계를 들었다. 그것은 대단히 정적 (靜的)이고 공간적인 이미지의 연대성이다. 이에 대 하여 세계의 시간적 성격이 시사(示唆)하는 것은 세계가 역동성의 차원에서 전일성(全一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의 연대적 역동성, 역동 적 연대성이 들국화를 피어나게 하고 돌멩이를 형성 하고 허물며 당신과 나의 삶과 죽음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이러한 모습은, 시간이 사건과 연대성 의 내부적 양상(樣相)이며 사건과 세계의 연대성을 표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존재론적 집합표상에서 는 시간은 존재와 상대적으로 독립하여 존재 외부 에 있지만, 연대적 집합표상에서는 시간은 사건의 연대성의 내부적 양상이다. 시간을 또 다른 실재로 개념화하여 사물 외부에 독립시켜 존재화하고, 세계 의 모든 현상을 이러한 존재적 시간에 귀속시키면, 세계의 연대성은 사상(捨象)된다. 그러나 시간이 사 물과 분리된 실재가 아니라 사물에 내재하고 사물들 의 상호관계 속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세계 의 연대성의 표현이다. 사건과 세계의 연대성은 시 간을 통하여 가장 극명(克明)하게 표현된다. 시간 그 자체가 바로 세계의 연대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