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세계에 관한 동양적 집합표상
********* 緣 **********天尊地卑 乾坤定矣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
乾知大始 坤作成物
세계는 하늘과 땅이다.
하늘(天)은 일체를 생성시키는 장엄함(尊)이며, 땅(地)은 모든 것을 수용하 는 겸손함(卑)이다. 이러한 이미지에 의하여 건곤(乾坤)의 집합표상이 규정된 다(定矣).
하늘에는(在天) 사물과 세계에 관한 역동적인 정보(象)가 형성되며(成), 땅 에는(在地) 사물과 세계의 관계장의 존재적 유형(形)이 형성된다(成). 이러한 정보적 역동성과 관계장의 존재성이 교류하고 결합함으로써 무상한 변화(變 化)가 나타난다(見矣).
하늘의 집합표상(乾)은 거대한 시작(大始)을 아는(知) 것과 같은 일체의 생성에 관한 정보의 이미지이며, 땅의 집합표상(坤)은 일체의 사물(物)을 형 성(成)하여 그것을 연대관계 속에 작용(作)하게 하는 이미지이다.
Heaven is lofty and honourable; earth is low. Khien and Khwan were determined(in accordance with this)
In the heaven there are the(different) figures there completed, and on t he earth there are the (different) bodies there formed. Corresponding to th em were the changes and transformations exhibited.
Khien (symbolises Heaven, which) directs the great beginnings of thin gs; Khwan(symbolises Earth, which) gives to them their completion.
(周易 繫辭傳 제1장. 번역 Z. D. Sung 文化圖書公司)
********** 說 *********
위의 예문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제일장(第一章)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철학적 범주는 서구철학의 범주와는 전혀 다르다. 하늘(天)과 땅(地) 는 서구의 어떠한 철학에서도 철학적 범주(範疇)가 아니다. 하늘 땅, 건곤, 상 (象)과 형(形), 시작을 아는 것(知始), 사물을 관계 속에서 작용하게 하는 것 (作物) 등 모든 개념들이 서구철학에는 없는 범주들이다.1) 굳이 비교한다면 상(象)과 형(形)을 서구철학의 형상(形相)과 질료(質料)에 비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들은 서로 전혀 다른 개념들이다. 상은 사건의 내부적 통일을 형 성하는 의도(意圖)나 정보(情報)의 이미지이며, 형은 외부적으로 드러난 사건 의 유형적 관계(關係)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동양 고전의 해석에서는 그 개념 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왜 서구철학과는 전혀 다른 범주들이 등장하였는가 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적 집합표상이 그 기원에서부터 존재론적 집합표상이 아니라 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적 집합표상에서는 존재론적 집합표상에서 사용하는 철학적 범주들은 사용하지 않으며, 위의 철학적 범주들은 존재론적 집합표상 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우리가 단순하게 세계를 바라본다면, 세계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물들이다. 또 한편 그러한 사물과는 다른 하늘과 땅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세계는 하늘과 땅의 연대성으로 규정될 것이다. 그리고 눈 앞의 사물은 하늘과 땅의 작용으로 인한 변역(變易: 變化) 의 순간적 단면(斷面)인 것이다. 변역이 중심적 이미지이며 존재는 종속적 이 미지인 것이다. 우리가 서구적 철학의 선입관에서 벗어나면, 세계를 하늘과 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세계를 존재로 규정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러나 이러한 차이가 세계를 해석하는 집합표상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야기한 다.
하늘은 우리가 말하는 창조적 역동성으로서의 시간의 이미지이며, 땅은 우 리가 말하는 존재의 관계장으로서의 공간의 이미지이다. 하늘은 사물과 같은 존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그 내용이 공허하고 그 작용은 너무나 역동적이 다. 그리하여 그것은 존재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무(無)에 가까운 것이다. 땅 역시 존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광대(廣大)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존재라 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존재를 품어안고 모든 존재를 실으며(載), 모든 존재를 기르는 거대한 장(場)의 이미지이다. 한편, 모든 사물들은 이러한 하늘 과 땅의 상호교류에 의하여 끊임없이 생성소멸하는 것이며, 존재라고 하 기에는 너무나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그리고 사물들은 존재라는 범주로 포괄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존재의 개념은 철학적으 로 중요한 범주가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동양의 철학에서는 존재론(存 在論)이 없다.2)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변역(變易)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변역은 기본적으로 역동성의 발현과 관계장의 수용의 이미지 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역동성의 근원이 하늘이었으며 수용적 장(場)의 근원 이 땅이었다. 따라서 세계는 하늘과 땅의 상호교류과정으로서의 연대성이며, 모든 사물들은 이러한 연대적 전체에서 무상하게 변화하는 위상(位相)에 의 하여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부분에 불과하다.
모든 사물은 하늘의 역동성이 지상(地上)에 실현되는 것이였으며, 하늘이 이들을 낳고 대지(大地)가 이들을 그 위에 실으며 이들을 품어서 기른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연대성 속에서 크게 위치를 잡으면, 그 상호작용에 의 하여 변역이 그 가운데에서 행하여진다. 이러한 연대성이야말로 과정적으로 생성소멸하는 사물의 원리이고, 가치적 차원에서의 정당성의 문(門)이다. ( 天地設位 而易行乎其中矣 成性存存 道義之門). 하늘은 모든 것을 생성시 키는 역동성이기 때문에 존귀함이며, 땅은 모든 것을 수용하여 완성시키는 장 (場)이기 때문에 겸손함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하늘과 땅이 정립되는 것이 세 계에 대한 주역의 집합표상이다.(주역은 이미지의 構成에 의한 인간의 집합 표상이다. 그리고 최초로 하늘과 땅의 이미지에서 乾坤이 定해진다 :天尊地卑 乾坤定矣). 이러한 하늘과 땅의 연대성 위에 수많은 사물들이 구조적으로 자 신의 지위에 의하여 벌려서 있으며, 그럼으로써 세계는 연대성에서의 위상에 있어서 차이성이 있는 모습이었다(卑高以陳 貴賤位矣). 하늘의 역동성과 땅 의 고요함은 모습을 달리하여 사물과 현상에 항상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주역의 집합표상에서 강건한 경향과 유연한 경향으로 판단된다 (動靜有常 剛柔斷矣). 하늘에서는 역동적인 무형의 정보(情報)들이 형성되고 땅에서는 변화의 구체적 형상(形)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정보와 형상이 교류함으로 써 변화가 나타난다(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 하늘의 창조적 역동성은 번개와 천둥에 의하여 땅을 충격하여 만물을 생성하게 하고, 바람과 비로서 내려 땅을 윤택하게 하여 만물을 자라게 하고, 하늘의 해와 달이 운행함으로 써 땅 위에는 계절의 변화가 야기된다(鼓地以雷霆 潤地以風雨 日月運行 一寒一署). 하늘의 도(道)는 남자를 이루고 땅의 도는 여자를 이룬다. 하늘의 역동성은 모든 사물의 야기시키는 시작(始)을 아는 정보적(情報的) 성격을 가 지는 역동성이며, 땅은 모든 사물을 규정하고 완성시키는 능력과 규제가 작용 하는 장(場)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늘의 집합표상에서 용이하게 세계를 해석할 수 있으며, 땅의 집합표상에서 간결한 실천적 능력을 배울 수 있다. ( 乾道成男 坤道成女 乾知大始 坤作成物 乾以易知 坤以簡能). 이것이 주역 의 세계에 관한 집합표상이다.2)
우리는 동양적 집합표상을 사건과 연대성, 역동성과 관계장의 세계로서 연 대적 집합표상이라고 규정한다. 물론 동양적 집합표상에 있어서 사건, 연대성, 총체적 관계장, 창조적 역동성, 공간, 시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개념들은 서구적 집합표상에서 출발하여 동양적 집합표상에 이르는 도정에서 우리가 창조한 이미지이다. 그것은 동양적 집합표상을 현대적 언어 로 번역하기 위하여 창조한 매개양식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개념들과 동등(同 等)한 이미지를 가진 개념들이 오랫동안 동양인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사용되 어 왔다. 우리가 이제까지 사용하여온 사건(事件)의 개념은 '연기(緣起)' 라 는 개념과 동등하고, 연대성(連帶性)의 개념은 '도(道)'나 '공(空)'의 개념과 동등하다. 그리고 창조적 역동성은 하늘(天), 무(無), 양(陽), 인(因)에 동등하 다. 한편 총체적 관계장이 땅(地), 유(有), 음(陰), 연(緣)에 동등하다.3)
불가(佛家)에서는 보리알이 싹이 트는 사건과 같은 경우 보리알, 적합한 지면, 공기, 온도와 습기와 영양을 제공하는 여러가지 존재물들, 등 보리알을 둘러싼 이러한 여러가지 존재물들의 총체적 관계장에 대하여 '연(緣)' 이라 는 집합표상을 사용해 왔다. 바삭하는 소리에 있어서 대나무, 돌멩이, 공기 등 의 관계망이 연(緣)이다. 이에 대하여 보리싹이 트는 변화를 야기하는 생성의 원동력, 이러한 총체적 관계장 속에서 실현되는 역동적 창조성에 대하여 '인 (因)' 이라는 집합표상을 사용해 왔다. 바삭하는 소리에 있어서 그러한 소 리를 야기하였다고 생각되는 대나무, 돌멩이, 공기 등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 역동성이 인(因)이다. 물론 이것은 방편적 설명일 뿐 인(因)은 존재물 속에 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 그것은 역동적 창조성이 내재화된 것이며, 내재화 한 역동적 창조성이다. 이러한 '인연(因緣)'으로 야기되는 모든 사건은 '인연 생기(因緣生起)' '연기(緣起)' 라는 개념으로 규정되었다. 모든 사물은 이처 럼 인연에 의하여 연기하는 무상한 것들이며, 동시에 그러한 무상한 연기가 세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한 보편적 규정이다. 이것이 연기법(緣起法)이 다.
연기법은 세계를 존재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다. '바삭하는 소리'는 대나 무에도 돌멩이에도 공기에도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소리를 야 기하는 원동력은 아예 존재라든가 (존재의 반대 이미지로서) 무(無)라든가 하 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연기법이란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부정(否定)이다. 나 아가 세계의 모습도 존재와 존재 사이에 성립하는 존재론적 인과관계를 초월 한다. 인과관계는 이러한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넘어서는 인과 비존재의 차원 을 포괄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이처럼 존재론적 인과관계를 초월하는 인과응보의 원인이 카르마(업:karma)이다. 한 순간의 생각과 행동도 카르마를 야기하고 축적하며 인과응보를 야기하는 것이다.
연기법에 있어서는 인간 역시 존재가 아니라 연기이다. 자신을 존재로 생 각하는 것은 존재론적 집합표상의 카르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기법은 인 간에게 존재적 자아(存在的 自我)에 대한 집착(執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집착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부 정은 세계에 대한 거대한 긍정에 이른다. 그것은 존재론적 자아를 초월하여 세계의 연대성에 이르는 뗏목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연기법에서 진정한 자아 는 세계의 연대성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혜가와 향엄은 존 재론적 자아의 집합표상의 카르마에서 벗어나 자신과 우주의 연대성에 직접 합치하는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4)
창조적 역동성과 총체적 관계장에 동등한 집합표상으로서, 노자(老子)는 유(有)와 무(無)의 이미지를 제출한다. 노자의 유는 결코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노자의 무는 결코 존재의 부정으로서 '없음'이 아니다. 노자에 게 있어서 무는 시초(始初), 근원(根源), 야기(惹起), 시작함(始) 등의 이미지 이다.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기동(機動)인 것이다. 한편 노자의 유는 양육, 기름, 완성시킴, 포용함, 어머니(母)로 표현되는 모성적(母性的) 연대성이다. 그리하여 무는 자연을 기동시키는 것이고, 유는 만물을 포용하는 장(場)이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전자가 역동성의 표현이라면 후자는 관계장의 표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에서, 일체의 사물을 야기시키는 역동성의 오묘 함을 관찰할 수 있으며, 유에서, 무상한 흐름이 형성하는 정합성(整合性)의 구 조를 관찰할 수 있다.(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요).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은 존재성을 초월하는 수용적 장에서 야기되는 역 동성의 모습, 연대성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빈 그릇(沖), 계곡의 신(谷神), 풀무(탁약), 비어있는 수레바퀴의 바퀴통(三十輻共一곡 當其無)등 많은 비유로 설명된다. 그것은 무의 역동적 창조성과 유(有)의 연장적 존재장 이 결합하여 세계를 형성하는 연대성이고 바로 도(道)이다. 그리하여 노자 의 관점은 사물과 세계가 유무(有無)의 결합, 역동성과 연장성의 결합, 공간 성에 실현되는 시간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존재에 집착하지만, 진실에 있어서는 이러한 집착을 벗어나 세계의 수용적 역동성(창조성)에 자 신을 실을 때, 인간은 덕(德)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 (無爲)는 인간이 존재적 자아의 관점에서 작위(作爲)할 것이 아니라, 세계의 연대성(道)이 연출하는 역동적 창조성에 자신을 실으라는 것이다. 무상한 세 계에서 존재를 유지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할 때 진실한 자신 의 발견되고, 모든 것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無爲而無不爲). 존재에의 집착이 아니라, 비존재(無)의 역동성이야말로 그것이 희미(希微: 노자 14장) 하여 쉽 게 인식되지 않을지라도 세계의 진실한 모습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