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연대, 무명(無明), 물질적 풍요(豊饒)
5.2.1. 대상 원리의 원인(原因)사회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원리는 연대의 원리이다. 사회는 대상의 원리에 기초하여 형성될 수 없다. 도부섬의 사회에 있어서도 연대의 원 리는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그곳에서도 친족집단으로 이루어지는 최소 한의 연대범위가 있으며, 이러한 연대적 집단과 그 상호관계로서 사회 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도부섬의 사회에 있어서도 지역간의 교역(交 易)이 있으며, 사기적(詐欺的) 수법으로 교역을 악용하는 사람이 있어 도 여전히 교역은 이루어진다. 연대의 원리가 전혀 적용되지 않으면 사회 자체가 붕괴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연대의 원리는 사회의 기반 을 이루는 원리이며 전체적(全體的) 원리이다. 이에 대하여 대상의 원 리는 부분적(部分的) 원리이다. 대상의 원리는 어떠한 수준의 연대성이 확보되어 있는 상태에서 비로소 작동할 수 있는 부분적 원리이다. 그럼 에도 인간의 사회에 대상의 원리가 횡행(橫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시멘족의 사회와 비교하여 도부섬에서 대상의 원리가 지배적인 것 은 우선 사유제도(私有制度)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다. 부시멘 족은 사냥터를 공유(共有)하는 데 반해, 도부섬의 사람들은 토지를 사 유(私有)할 뿐만 아니라, 그 토지 위의 얩을 사유하고, 얩의 씨도 사유 하며, 독초와 심지어는 주술(呪術)까지 사유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면 사유제도야말로 연대성을 파괴하는 제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은 피상적(皮相的)인 것이다. 많은 농경민족이 토지를 사유하지만 도부섬의 사회와 같은 것은 아니다. 사유를 전제로 하는 농촌공동체의 농민들이 항상 대상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농민들은 인 간적 연대성 속에서 살아간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따라서 사유제도가 반드시 인간의 연대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權力)은 인간의 연대성을 파괴한다. 한 사람이 지배하고 다수 의 사람들이 복종하는 관계야말로 인간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권력의 작동방식은 대부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을 강요해 왔으며, 권력장치에 의하여 대량 학살이나 전쟁이 이루어졌 다. 그러나 권력이 항상 연대의 원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더 큰 범위(範圍)의 사회적 연대를 위한 인간사회의 질서이기도 하다. 권력은 대상의 원리를 억제하기 위한 연대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도부 섬의 사회는 권력 제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음에도 대상의 원리가 지배 적이다. 오히려 권력제도가 존재한다면 적어도 살인과 같은 노골적인 대상의 원리가 정당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이 대상의 원리의 근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그 사회는 대상 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의 혼란 이다. 이기적(利己的)이라는 것은 반드시 다른 인간을 대상(對象)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인간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을 해치지 않으면 안 될 때, 우리는 그가 타인을 해치지 않 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직 염세주의자(厭世 主義者)나 성자(聖者)만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하여 타인을 살려야 하는 그러한 상황인 경우에는, 그가 아 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여전히 타 인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즉, 이기주의와 대상의 원리는 무관한 것이다. 연대의 원리나 대상의 원리나 모두 인간이 자신의 삶을 추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대상의 원리가 작동하는 사회에 있어서는 타인을 손해보게 함으로써 자신을 이롭게 하는 사회이다. 반 대로 연대의 원리는 타인의 손해가 나의 이익의 조건(條件)으로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는 이기주의 가 반드시 타인을 해치고 타인을 대상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 다.
연대의 원리나 대상의 원리는 특정한 사회제도나 인간의 본성에 의 하여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의 원리의 본질적 의미는 인간과 인 간의 관계 이외의 것에 가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소외 (疎外)시키고 존재를 우상화(偶像化)하는 것이다. 소유 자체가 대상의 원리를 야기(惹起)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 소유가 인생의 유일한 의미라는 가치전도(價値顚倒)가 대상의 원리를 야기한다. 인간 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소유에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소유는 삶 의 전부가 될 수 밖에 없다. 권력이 대상의 원리를 야기하는 것이 아 니라 권력에 대한 집착, 권력이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될 때, 그것이 대 상의 원리를 야기하는 것이다. 화폐(貨幣)가 대상의 원리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가 삶의 유일한 가치가 될 때, 그것에 대한 집착과 가 치전도가 대상의 원리를 야기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보다 우 선하는 그 무엇을 우상화하는 것이며, 다른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며, 그 무엇을 위하여 다른 인간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상의 원리이다. 이러한 가치전도, 인간관계 이외의 그 무엇이 최우선의 가치 를 갖는다는 것, 이것은 바로 무명(無明)의 하나로서 사회적 무명이라 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무명(無明)은 집합표상의 카르마이다. 그것은 집합표상이 그 자신의 존재성을 주장하는 경향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허위의식(虛僞意 識)이며 환상이다. 도부섬의 사람들의 집합표상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 은 잠재적으로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이고 적대자이다. 이러한 집합 표상의 카르마가 현실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집합표상은 그에 정 합적(整合的)인 다른 허위의 집합표상을 야기한다. 얩의 씨는 도망갈 수도 있고, 나의 밭의 소출이 적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얩에게 주술을 걸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문명인이라고 하여 도부섬의 사람 들과 전혀 다른 집합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물 건을 소유한다는 것은 우리와 그 물건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 와 다른 인간과의 관계이다. 소유는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어떤 대 상을 배타적(排他的)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유권은 물건에 대한 관계가 아니라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계이다. 화폐를 소 유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협력과 연대를 청구할 수 있는 권 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화폐는 종이쪽지에 불과할 뿐이고, 우리의 삶을 의지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이다. 그리고 사회는 화 폐를 매개체로 하여 모든 사람들의 노동을 결합하고 통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노동하지 않으면 화폐는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는 화폐를 획득하는 것을 걱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노동할 것인지 아닌 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화폐가 바로 가치이며, 화폐가 나 자신이고, 다른 인간은 화폐를 얻기 위한 대상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 것이 바로 우리의 화폐에 대한 집합표상의 카르마이고 무명(無明)이 다. 그리고 이러한 무명(無明)이 대상의 원리를 야기한다.
대상의 원리의 원인은 사회적 무명이다. 그러나 무명은 순전히 인간 의 의식상태만은 아니다.1) 무명은 사회적 존재장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인연으로 하여 야기되는 것이다. 소유제도, 권력장치, 화폐제도, 등가 교환과 시장체제 등 사회제도나 사회체제가 인간의 사회적 의식과의 관 계에서 무명을 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체제와 사회적 의 식의 관계(關係)에서 무명과 대상의 원리를 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적 무명(無明)이 완전히 제거되고 순전히 연대의 원리에 의하여 형성되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낙원(樂園)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사회가 아니다. 중 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현실의 연대성을 고양(高揚)하는 것이다. 사회적 무명을 제거하고 연대의 원리를 현실화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탐구야말로 인간사회에 관한 근원적인 주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대성 을 고양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條件)은 물질적 풍요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물 질적 풍요야말로 인간의 연대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어떤 사람은 물질적 빈곤이야말로 무명의 근원이라고 한다. 다른 사 람은 물질적 풍요야말로 무명의 근원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상사회(理 想社會)의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리는 이상사회(理想社會)는 무명 이 제거되고 대상의 원리가 사라지고 연대의 원리가 현실화하는 사회이 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무명으로부터 해탈(解脫)하고, 죄악으로부터 구원(救援)되는 사회이다. 그러나 과연 물질적 풍요가 그러한 사회를 가져다 줄 것인가? 어떤 사람은 물질적 빈곤에 빠져있는 사회에서 인 간은 도덕적일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덕 보다는 자신의 생존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 있어서 인간은 좀더 연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에 있어서 인 간은 희소(稀少)한 물질가치를 둘러싸고 투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는 인간을 물질적으로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물질적 인간에게 있어서 다른 인간은 물질적 가치를 획득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회적 무명의 근원의 문제이기도 하고 이상사회의 성격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2)
부시멘 족과 같이 호혜(互惠) 속의 연대를 추구한다면, 일체의 물질 문명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연대를 되찾는 방법을 하나의 이상에 대한 지향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연대의 원리를 침해하는 일체의 제 도와 문명을 부정하는 것이다. 소유제도는 연대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 인다. 권력 역시 인간의 연대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폐제도도 인간의 연대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인다. 법률 역시 인간의 연대를 파 괴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인위적으로 창조된 사회제도들은 결국 인 간의 연대를 파괴하고 인간을 대상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문명 을 부정(否定)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연대를 회복 하는 길인 것으로 보인다. 모든 죄악은 문명 그 자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유제도가 부정됨으로써 착취가 철폐되고, 화폐제도가 부정됨 으로써 물신주의가 제거되고, 권력이 부정됨으로써 국가가 소멸되고 억 압이 사라진 사회, 그것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자 연으로 돌아가는 이상주의이다. 이러한 이상주의의 관점에서는 물질적 문명이 발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연대를 파괴하는 것이고 인간의 자 연적인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더 많은 물질적 가치, 물질적인 풍요는 인간의 삶을 타락(墮落)시킨다. 이것은 노자(老子)의 견해이기도 하다. 3) 루소(Rousseau)에서 모택동(毛澤東)에 이르기까지 이와같은 계열의 이상주의를 우리는 많이 찾아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물질적인 풍요야말로 인간의 연대를 고양하고 연대의 원리가 작동하는 사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들은 여전히 대상의 원리가 횡행(橫行)하는 것은 아직도 물질적 가치가 부족하고 물 질적으로 빈곤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희소(稀少)한 물질적 가치를 두고 다수의 사람들이 경쟁하고 투쟁하는 것이 바로 대상의 원리가 사 라지지 않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적으로 충분히 풍요하게 된다면 인간은 도덕(道德)과 윤리와 사랑을 찾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것은 모든 근대 서구인들이 믿음이며, 근대문명(近代文明)을 추진해 온 신념이기도 하고, 또 우리들 자신의 무의식적인 전제이기도 하다. 서구 근대인들은 이와 같은 물질적 풍요가 선사하는 이상적 사회가 머지않 은 장래에 도래할 것이며, 역사는 그러한 방향을 향하여 진보할 것으 로 믿었다. 아담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즈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은 물질적 풍요가 인간에게 연대성을 회복하게 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견해를 같이 한다.4) 다만 그러한 풍요에 이르는 도정(道程)에 대하여 서로 견해를 달리할 뿐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에 대하여는 서로 견해를 달리하지만, 역사는 물질적 진보이며, 물질적 풍요가 인류에게 새로운 사회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근대적 신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계열의 이상주의와는 그 견해를 달리한다. 중요 한 것은 물질적 빈곤이나 풍요가 아니다. 인간을 대상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것은 물질적 가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물질적 가치 에 대한 집착(執着)이며, 물질적 가치에 대한 무명(無明)이다. 삶의 진실한 가치는 물질적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 가치는 삶의 진실한 가치를 찾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부시멘 족이 우리 보다 대단히 빈곤(貧困)하지만 우리보다 더욱 연대적이라는 사실을 발 견한다. 반대로 물질적 가치가 부정되는 것이 이상사회의 조건은 아니 다. 우리는 도부섬의 사회가 물질적으로 우리보다 빈곤하지만 대상의 원리가 전형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을 발견한다. 물질적 가치가 삶의 주요한 내용이 되고 그리하여 물질적 가치가 목적이 될 때에, 인 간에 대하여 다른 인간은 물질적 가치를 얻기 위한 대상이 된다.
물질적 풍요가 자동적으로 인간을 낙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 사고방식에서는 물질적 풍요가 충분히 발전하여 어떤 단계에 도 달하면 그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경제적 문제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었다. 물질적 풍요가 충분히 발전하여 모든 물질적 가치가 공기처럼 자 유재(自由財)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이다. 과거의 성인 (聖人)들이 우리에게 가르쳤고 또한 현실이 보여주는 바는, 물질적 풍 요가 선사하는 낙원은 환상이라는 것이다.5) 물질적 풍요의 어떠한 단 계에서도 우리는 또 다시 충족하지 못한 욕망을 경쟁적으로 생산할 것 이다.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욕망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충족은 또 다른 욕망을 생산하기 때문 이다. 욕망으로부터 떠나는 것이야말로 해탈(解脫)에의 길이라고 지적 한 것이 석가였다. 설사 그러한 극단적으로 발전된 물질적 풍요가 가능 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극단적인 물질적 발전을 이루기 이전에 우리 의 지구를 파괴해 버릴 것이다. 아예 그러한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우 리는 서로를 살해(殺害)할 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의 인류는 역사상 그 예가 없을 정도로 발전된 생산력과 풍요 속에 살고 있다.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이나 시저, 진시황 (秦始皇)보다 더 풍요한 삶을 누리고 있다. 현대는 경제적으로 가장 풍 요로운 사회이며 인간의 지식에 있어서나 기술적으로도 과거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된 사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연대성 (連帶性)에서는 별로 진보가 없는 사회이다. 우리는 과거보다 물질적으 로 더 풍요한 만큼 이웃과 더 많은 연대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심하게 상대방을 경쟁과 투쟁(鬪爭)의 대상 (對象)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현대가 이룩한 물질적 풍요가 모든 인 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평화와 정의,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억압하고 있다. 이렇게 풍요로운 사회에 있어서 왜 이렇게 대상의 원리 가 노골화되었는지에 대하여 현대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疑問)은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6)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대상의 원리야말로 풍요의 추진력(推進 力)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물질적 풍요는 자본주의가 대상의 원리에 입각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는 것이다. 사랑과 연대가 모든 사람들의 삶을 보장하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노동(勞動)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 다. 왜냐하면 삶이 사회적 연대에 의하여 보장되는데 굳이 고통스러운 노동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노동의 동기가 붕괴된 사회에서 물질적 풍요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의 원리를 전제로 할때만 물질적 풍요가 가능하다. 대상의 원리는 물질적 풍요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原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렇게 물질적으로 풍요함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원리가 지배적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케 인즈의 말대로, 우리는 풍요한 사회를 위하여 탐욕(貪慾)을 우리의 신 (神)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7)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 풍요는 모든 사람의 풍요가 아니라 일부 계층의 풍요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 체의 지옥인가 아니면 일부(一部)의 천국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 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면 우리는 인간과 사회에 대하여 비관적(悲觀 的)인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회의 가장 기반(基盤)이 되는 것은 노동의 동기이다. 그런데 노동의 동기는 연대의 원리에 의해서는 기동하지 않는다. 즉 사랑이나 연대의식(連帶意識)에 의하여 노동이 기 동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발전과 관리사회주의(管理社會 主義:스탈린적 사회주의)의 붕괴가 그 증거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동 기에 있어서 대상의 원리에 입각하였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물질적 발전이 가능하였다. 때문에 현대의 물질적 풍요는 대상의 원리 가 창출(創出)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경제관계에서 대상의 원리를 제 거한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의 물질적 풍요는 붕괴(崩壞)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근대의 시대적 집합표상의 카르마에서 벗어나면 우리 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먼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재에 우리는 연대적인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충분한 물질적 발전을 이루고 있는 것 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해 있다. 다만 우리의 무명(無明)이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를 폭행(暴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 의와 같은 경제적 동기(動機)를 전제하지 않고도 경제적 풍요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대상의 원리에 입각하지 않고도 물질적 풍요를 유지하 고 발전시킬 수 있으며 연대적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 다만 근대적 집 합표상의 카르마가 우리 시대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풍부한 가능성(可 能性)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2,000년 전의 성인 (聖人)들이 제기한 것이다. 예수와 석가(釋迦)와 묵자(墨子)가 우리에 게 가르친 것이 그것이었다. 묵자는 인간의 연대의식이 사회적 기동의 역동성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8) 우리는 다만 이러한 성인들의 사 상에 사회과학적(社會科學的)인 검토를 추가하여야 한다. 그것은 경제 학적인 검토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우리의 제2부(제1권 하권)의 주제 (主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