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역사(歷史)와 미래(未來)
7.1.1. 역사와 미래근대 이전의 사회에 있어서 미래(未來)의 이미지는 현대인이 상상하 는 미래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미래는 변함없는 것이었 으며,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내일은 오늘과 다른 것이 아니었 다. 그들의 미래는 종교가 제시하는 그러한 미래가 전부였으며 그것으 로 충분한 것이었다. 근대의 산업문명이 시작되면서 사회는 급격하게 변화되었고, 그것도 끊임없이 진보(進步)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제 내일은 오늘과 달라지는 것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달라질 미래사회에 항상 대비하고 미래에서 희망을 구하게 되었다. 미래는 모든 인간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였고, 역사적 진보는 종교와 신을 대신하는 합리적 인 구원의 신념이 되었다.
미래에 대한 예측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중대한 집합표상이 되 었다. 인간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하여 과거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미 죽어버린 과거 그 자체에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 가 현재의 현실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고, 미래를 예측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1) 근대의 역사적 연구가 제시하는 미래는 종교적 미래 와 같은 비합리적 초월적 낙원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심지어는 과학적 으로 규정되는 정말 믿을 수 있는 미래였다. 그리고 그렇게 규정되는 미래에 대한 예측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현실적인 구원이었다. 그 것은 사후(死後)의 세계가 아니라 지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 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집합표상은 단순한 합리적 집합표상이 아니라 믿음의 집합표상으로 된다. 내용이 방대하여 반론(反論)을 제기하기 어 렵고, 그것을 믿을 때에는 굳건한 희망이 되는, 그러한 역사해석과 미 래에 대한 신념은, 충분히 종교에 비견(比肩)될 수 있는 믿음의 집합표 상이 되었던 것이다. 2) 그리하여 역사해석은 미래가 자신들의 것이라 는 투쟁적(鬪爭的) 신념이 되었다.3)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사료(史料)를 통하여 과거의 사실을 구성하 고 해석하는 사후적(事後的)인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사전적(事前的)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료들의 바다(海)에 우리의 주관을 투입하여 역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어떤 일반화를 시도할 수 있 다. 필요하다면 많은 사료들을 선택하여 이러한 일반화를 법칙화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일반화된 법칙을 적용하여 미래를 규정하는 것 은 잘못이다. 그것은 사후적인 해석과 사전적인 예측을 혼동(混同)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적절한 사료들을 동원하여 인류의 역사가 원시공산제사 회, 노예제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의 순서로 변해 왔다고 해석하고, 미래는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으로 규정할 수 있 다. 우리는 기준을 달리하여 역사적 과정을 고대사회, 중세사회, 근대 사회로 나누고 미래는 여전히 근대사회의 계속으로 가정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와 달리 원시채취사회, 농업사회, 공업사회로 과거를 해석하 고 미래를 정보사회(情報社會)로 규정할 수도 있다. 또는 역사해석에 서 문명의 단위를 채용하여, 문명의 발생, 문명의 성장, 문명의 쇠퇴, 문명의 해체, 세계국가의 순서로 역사를 해석하고 미래는 세계국가(世 界國家)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또는 아예 지금까지 의 역사 전체를 하나의 단계로 파악하여, 그것은 인류의 전사(前史)이 며, 미래는 인류의 후사(後史)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과연 미래는 공산주의 사회일까, 여전히 근대적 모습의 사회일까, 정보사회일까, 해체기에 있는 서구문명의 세계국가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인류의 후사일까? 우리가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서로 토론 을 하여 올바른 미래를 결정해 달라고 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미래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해석의 타당성에 대하여 논쟁 할 것이다. 즉, 이 모든 방식에서 적용하고 있는 미래예측의 확실성(確 實性)은 과거에 대한 해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 한 해석의 정확성이 미래에 대한 예측의 정확성을 증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미래에 대한 전망이 과거를 해석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 닐까? 4) 과거의 해석에서 도출된 법칙이나 경향이 미래에 적용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역사와 미래--미래를 암묵적(暗默的)으로 전제하지 않는 역 사는 없다는 의미에서 역사--에 관하여 논의할 때 가장 기초가 되는 전 제는, 시간(時間)에 대한 집합표상이다. 과거의 해석에서 도출된 경향 이나 법칙을 미래에 적용할 때에는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전제를 가 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직선적 시간의 집합표상이다. 사회와 독립하 여 그 위를 흐르는 직선적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이러 한 시간을 통하여 발전하는 사회라는 집합표상이 된다. 그렇다면 사회 는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 미래를 놓을 수 있고, 그러한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보와 법칙으로써 예측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한 미래는 어떠한 점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같은 동일성을 가 지고 있는 것이 된다. 마치 백합꽃의 씨앗이 성장하여 꽃을 피우더라 도 그 전체가 하나의 동일성(同一性)으로서의 백합꽃인 것과 같다. 그 리하여 우리는 백합꽃이 어느 시점에 꽃을 피우는 것을 예측할 수 있 는 것과 같이, 미래도 법칙을 가지고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직선적 시간과 아울러 역사적 단위(單位:그것이 국가이 든, 사회구성체이든, 문명이든)를 하나의 존재물로 가정하고 있는 것이 다. 즉, 어떠한 구조와 체계와 과정적 발전양식을 지닌 존재물이 직선 적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집합표상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가 지금까지 존재론적(存在論的) 집합표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직선적 시간과 공간의 구조, 그속에서 운동변화하는 존재물, 동일성과 그 전환으로서의 변화, 이러한 집합표상이 바로 존재론적 집합표상이 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정위의 카르마와 추상의 카르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제거한다면, 역사적 추론에 의한 미래예측은 즉각적으로 한계를 드러낸다.5) 사회는 유전인 자(遺傳因子) 속에 변화방식이 내장된 존재물이 아니고, 역사는 백합꽃 이 아니다.
법칙과 과학의 이름 아래 대중(大衆)에게 신념으로 고취시키는 역사 적 전망은 진부(陳腐)한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과학의 권위로 부여되 는 역사의 법칙과 미래상은 대중에 이르러서는 믿음의 집합표상으로 전 환된다. 법칙과 운명으로 확정되어 있는 미래--- 인간의 의지와는 독 립되어 있으며 어떠한 조건에서도 관철되는 미래-- 에 대한 집합표상이 야말로, 미래의 혜택을 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선민(選民)에게는 가장 결정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의 믿음은 그 자체로서는 힘을 가진다. 그러나 그 힘은 진리성(眞理性)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 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믿음의 실천은 반드시 기대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근대인은 역사에 대하여 과대(過大)한 비중(比重)을 두어 왔다. 그리하여 미래를 창조적 건설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미래 가 자기들의 것이라는 신념(信念)의 투쟁에 그 정열을 바쳐왔다. 이러 한 신념의 카르마에 많은 인간들이 희생되어 온 것이다. 역사의 법칙 에 의해 운명적인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선민(選民)의 신념을 버린다 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6) 그러나 그것은 우상숭배이다.
역사는 존재물의 변화가 아니라 사건의 연기(緣起)이다. 사회적 변 화의 과정으로서의 역사와 미래는 새로운 것으로 출현하는 다양한 연기 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미래를 역사법칙으로 연역하는 것은 창조적 역 동성 즉 무(無)를 존재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창조적 역동성을 존재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와 세계를 단일한 하나의 차 원 즉 존재적 관계장(地)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반화나 법칙화가 가능하고 그것을 미래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 계와 사회에 관한 또 다른 두개의 범주 즉, 창조적 역동성(天)의 차원 과 거시적 전략적 실천(人)의 차원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치와 사실의 연대성으로서의 사회에 대하여 가치를 사실로 환원하는 것이다.
시간(時間)은 인간사회를 규제하는 역사 외부의 어떤 흐름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을 야기하는 창조적 역동성이다. 변화와 생성을 야기하는 다양한 창조적 역동성은 현재의 역동성이다. 과거가 현재의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러한 현재적 시간(창조적 역동성)의 한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경우이다. 그것은 현재화(現在化)된 과거이다. 과거나 미 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인간의 실천결과 산출된 물질적 존재(가령 축적된 자본)나 형성된 체제구조(가령 자본주의체제) 는 현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또는 과거는 그 결과 야기된 인간의 집합표상(가령, 종교나 이데올로 기)으로서 인간을 지배하는 한 현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현 재에 존재하는 과거인 것이다. 한편 미래 역시 인간의 집합표상(가령, 미래에 대한 비젼)으로서, 또는 미래에 가능성을 실현시키기를 기다리 는 존재로서(가령, 현재 투자되고 있는 자본재나 기술혁신) 현재적 의 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현재에 살아 있는 미래이다. 이 모든 것은 끊임없이 축적되고 출현하는 시간(역동성)의 한 내용인 것이다. 그리하 여 역사와 미래를 합법칙적(合法則的)으로 인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와같은 살아 있는 과거와 살아 있는 미래로서의 현재의 영역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측이란 현재적 존재물들의 가능 성의 종합이다. 그러나 미래는 현재적 존재물의 가능성의 종합이 아니 다. 창조적 역동성으로서의 시간은 무형의 역동성이며 인간의 거시적 실천은 현실에 가치를 투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가능성이나 속 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연장선상 에 있는 존재물이 아니다. 시간은 창조적 역동성 그 자체이다. 이러한 점이 할머니의 점심공안이 제시하는 의미이다.
현재에 살아 있지 않는 과거의 경험이나 그 경험을 일반화한 논리는 인간의 현실과 미래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 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경험과 그 일반화를 우 리의 실천에 있어서 하나의 거울(鑑)로, 즉 교훈(敎訓)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리하여 역사는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현재에 살아 있는 과거로서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전략적 실천에 있어서 참고가 되는 교훈과 실천의 거울 로서의 의미이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는 역사를 교훈을 주는 거울로 규 정하여 왔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감계주의(鑑戒主義)이다.7)
존재론적 집합표상을 버리고 미래에 관하여 사전적(事前的) 관점에 설 때, 우리는 미래를 형성하는 새로운 세 가지 힘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미래는 현실에 축적된 창조적 역동성으로서의 시간(天)이 피어나 는 것이다. 창조적 역동성의 차원으로 항상 현실화되기를 기다리고 있 는 민중의 의식과 집합표상의 차원이다. 민중의 창조적 역동성과 그에 서 연원(淵源)하는 미시적 실천들은 현실장의 규제력에 의하여 많은 영 향을 받지만, 역사적 변화의 차원에 서면 그것은 바로 새로운 현실을 형성하는 원천이다. 두번째 미래는 현실의 총체적 관계장(地)이 역동 성을 기동시키는 것이며, 역동성의 기동을 통하여 총체적 관계장이 변 화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미래는 인간의 거시적 실천(人)이 전략적 과 정을 통하여 창조(創造)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비젼과 가치를 설정 하고 사회를 전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인간의 집단적 노력에 의해 창조되 는 것이 미래이다. 구원이 아니라 창조의 자유(自由)와 책임(責任)이 우리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과거와 역사는 그것이 축적되어 현재로 살 아 있을 때 우리의 미래창조에 있어서 하나의 소재이면서 제약조건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제까지 과학으로 취급하였던 역사적 관점은, 이러한 세 개의 차원에 있어서 지(地)의 차원 즉 현실장의 변화에 대한 논리를 미래를 형성하는 힘의 전부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는 인간이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도 현실의 '진정한 살아 있는 인간들'이 창조하는 것이다. 인간이 미래를 창조한다는 것은 인간이 역 사에 대하여 주체적(主體的) 입장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역 사적 필연에서 해방될 때, 인간에게 열려지는 지평(地平)은 바로 인간 자신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이다. 역사창조의 주체라는 것은 물론 미래 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는 상 황(狀況)을 전제하는 개념이며 상황 속에서 가치를 실현시키려는 전략 적(戰略的)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전략은 상황 속에서 주체의 목적을 관철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 상황 속에서 주체의 비젼을 실현하려 는 태도이다. 이러한 전략적 태도는 상황에 적합한 전략목표(비젼)를 창조하는 것이며 전략목표를 상황에 실현하는 것이다. 역사적 지평에서 가치와 전략적 상황을 구성하는 천시(天時)와 지리(地利), 그리고 전 략의 주체적 요소로서의 인화(人和)가 미래를 결정하는 요소이다. 이것 이 역사와 현실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의 삼재사상(三才思想)이다.
미래는 관계장에 기동하는 역동성이며, 인간이 주체적으로 창조하는 시공간의 종합이다. 그것이 천시, 지리, 인화이다.
첫째, 천시(天時)는 대중의 집합표상과 모든 자연물들과 문화물들이 내포하고 있는 창조적 역동성(力動性)이다. 그것은 민중의 원망, 바램, 민중의 의식 등 인간의 집합표상, 자연과 인간이 창조한 제반 문화물들 이 끊임없이 재형성하는 시간(역동적 창조성)이다. 그것은 확정된 인과 관계가 아니라 사전적(事前的)인 일체의 가능성이다.8) 민중의 전통과 문화, 정당성의 집합표상, 시대의 흐름에 대한 의식, 분노와 고통, 바 램과 원망, 조그만 소망과 삶에 대한 태도, 노동과 실천의 미시적 동 기, 이 모든 집합표상의 차원이 천시(天時)의 차원을 형성한다. 이러한 물질과 인간의 가능성으로 함축되어 있는 창조적 역동성은 사회현실의 적절한 공간적 관계(地)를 만나면 현실로 출현하는 것이다. 민중의 정 감을 포함한 집합표상의 차원이야말로 현실을 규정하고 미래를 결정하 는 거대한 시간의 원천(源泉)이다. 비록 구체적으로 존재적 형태가 결 정되어 있지 않고 정확하게 어떠한 방식으로 실현해야 할 것인지, 그리 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규정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민중의 시 간은 어떠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모든 가능성들은 상호간에 정합성을 형성하는 포괄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천시(天時)이다. 대 중의 의식은 과거의 존재상황을 축적하고 미래에 대한 원망(願望)을 포 함하는 것으로, 현실에 출현을 기다리는 거대한 에너지, 원천적 시간 이다. 그것이 물질적으로 무형이라고 하더라도 정작 현실적 변화의 방 향을 결정해 나가는 에너지로서의 무(無)이다. 그것이 존재적으로 무형 이고 무규정적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은 결코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 니라, 이러한 시간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구체적 가능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이고 확정된 인과관계로 추론할 수 없으나 분명 히 범위와 방향을 가진 추세(趨勢)이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은 민중의 의식이 이러한 천시(天時)를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민중이 형성 하는 이러한 천시의 범위와 방향성은 역사적 대세(大勢)이며 누구도 이 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사회적 현실은 항상 존재장(存在場)의 논리가 있다. 가령 자본주의사회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있으며,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회 주의의 논리가 있다. 경제체제 뿐만이 아니라 정치체제나 기타 모든 사 회체제적 요소들이 종합되어 체제논리(體制論理)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체제적 논리만이 아니라 모든 기존의 존재들이 형성하는 장 (field)의 논리, 장의 규제성(地理)의 차원이 있다. 이러한 장의 규제 성은 개인의 동기와 의지를 초월하고 개인의 실천을 구속(拘束)하는 것 이며, 모든 개인의 동기와 의지와 바램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신을 관철 하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적 현실은 개인의 의식과 의지와는 독립되어 있는 어떤 객관적 법칙에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과거의 축적이 며 현실의 실재적 흐름이고 미래의 형성에 존재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다. 이제까지의 역사의 과학적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모든 역 사적 합법칙성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의 장(場)의 규제력이 지향하는 방향성이다. 가령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의 발전에 관한 법칙은 (그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는 논외로 하고) 바로 이러한 현실장의 논리와 규제성(地理)에 대한 것이다. 이처럼 현실장이 형성하고 있는 장의 논 리와 그 변화의 방향성이 지리(地利)를 형성하는 것이다. 주체적 전략 적 실천이 현실장이 지향하는 방향성에 합치할 때, 그것은 존재적 상황 이 제공하는 유리함(地利)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세째, 역사에 있어서 인(人)의 차원은 미래에 대하여 사회변화의 주 체(主體)로 정립된다. 그것은 가치를 실현하려는 전략적 집단이며, 가 치실현을 위하여 현실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주체적 집단이다. 그것은 현 실장의 규제력에 구속되는 미시적(微視的) 실천이 아니라, 민중의 역동 성을 구체적인 실천의 형태로 기동시키고, 이를 통합하여 현실장을 의 도하는 방향으로 종합하려는 거시적(巨視的) 실천을 지향하는 인간집단 의 창조적 노력이다. 이러한 집단은 권력집단일 수도 있고 정당일 수 도 있으며 계급일 수도 있고 사회운동단체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떠한 집단인가 하는 것은 실천(實踐)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 집단은 현실장의 규제 속에서 미시적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고 거시적 변혁을 추진할 수도 있다. 그리고 미시적 이익의 추구가 거시적 변동을 야기할 수도 있으며 거시적 변동의 추구가 실패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인위적 차원(人의 차원)의 본질적 특성의 하나는 그것이 항상 다수(多 數)라는 것이다. 역사는 다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다 수가 모인 곳에서 미래가 형성된다. 이러한 주체적 전략적 집단들, 또 는 그 집단 내부의 결속관계를 인화(人和)라고 부른다.
근대적 집합표상에서 미래를 현실의 변화(變化)로 보는데 대하여, 우리는 미래를 생성(生成)으로 본다. 미래는 기존의 공간을 연(緣)으 로 하는 시간의 출현이다. 미래는 어떠한 시간을 출현시켜 공간을 변화 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동시에 현실장을 어떻게 변화시킴으로써 어떠한 시간을 창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과 공 간의 교류--천지교감(天地交感)--를 위하여 인간은 주체적으로 어떠한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이야말로 모택동(毛澤東)이 정강산(井岡山)에서 부딪친 문제이고 그가 중국적 사고방식으로 특이하 게 해결한 문제이기도 하다.9) 미래의 문제는 민중의 역동성을 기동 (機動)시키는 문제이고, 현실장의 논리를 변혁(變革)하는 문제이며, 그 것을 위하여 인간의 거시적 실천을 조직(組織)하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