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눈으로 보는 문명사



제 1편 헤게모니와 공동체



補論 I : 집합표상과 가치매체


우리는 앞으로 집합표상과 가치매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이 에 관해서는 제1권 <존재로부터의 해방> 제2권<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양>에 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여기에서는 1,2권을 읽지 않은 분을 위하여 간략하게 두 개념을 설명한다.


1. 집합표상( 集合表象 : imagery )
2. 가치매체(價値媒體 : value media)

補論 II : 사회에 관한 근대이론


학자는 상식을 뒤집는 역설을 즐기거나, 반대로 어려운 언어로 상식을 증명하 는 것을 좋아한다. 따라서 이론은 때때로 상상을 증명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론의 진정한 역할은 역설을 상식화시키거나 상식에서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다. 사회를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이다. 사회를 세차원으로 나누는 것은 단순하게 보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근대서구에서 사회를 보는 관 점에 관하여 계몽사상, 헤겔, 마르크스, 그람씨 등의 사상을 대표적으로 살펴보고 이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제시하기로 한다. 그것은 앞으로 우리의 모든 논의의 바탕이 될 것이다.


1. 자연사회와 시민사회 : 계몽사상
2. 헤겔의 시민사회와 국가
3. 마르크스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4. 그람씨의 시민사회와 헤게모니
5. 사회를 보는 관점
6. 사회적 삼재(三才)
7. 세 차원 상호간의 정합성




인지(認知) ********補論 I : 집합표상과 가치매체 **************

1. 집합표상( 集合表象 : imagery )

집합표상이란 인간의 의식의 모든 내용이다. 인간의 일체의 인식이 집합표상이 다. 우리가 아는 것, 믿는 것 등 우리의 모든 생각들의 집합이다. 한마디로 헬렌 켈러가 그 후 오랫동안 배워서 그녀의 의식에 축적된 수 많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집합표상이다. 가령 우리는 도둑질은 나쁘다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의 행동기 준으로 삼는다. 이때 도둑질은 나쁘다라는 생각이 바로 우리의 집합표상이다. 우 리는 돈으로 밥을 사먹을 수 있다고 알고 있다. 이것도 집합표상이다. 이렇게 보 면 권력, 법률, 자본, 가치매체(화폐), 커뮤니케이션 등 모든 것이 그에 관한 집합 표상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법률의 내용을 알고 그것을 지킬 때에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모든 국민이 도둑질은 좋은 것이라 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경찰이 많아도 도둑을 막을 수 없다. 화폐도 화폐가 무엇 인지 알고 그것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만 기능을 발휘한다. 화폐가 무엇인지 모 르는 사람들에게 화폐를 줄테니 당신이 가진 것을 파시오라고 설득해도 소용없 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되어 화폐를 불신하기 시작하면 화폐는 점차 기능을 잃 어 간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인간의 사회나 공동체는 사람들의 집합표상에 기반을 두고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는 집합표상의 축적과 발 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문화는 사회의 공통의 집합표상을 기반하여 형성되는 생 활양식의 총체이다. 사회란 공통의 집합표상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는 인간관계 의 총체이다.

집합표상이 사회의 기초라는 것을 최초로 통찰한 사람은 중국의 공자였다. 그 는 정치의 기초는 집합표상을 바로 세우는 것(正名)이라고 하였다. 서구에서 이것 을 최초로 통찰한 사람은 아마도 듀르케임(E.Durkheim)일 것이다. 그는 하나의 사회에는 개인의 집합표상이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시하여 공통적 집합 표상을 집합의식(collective conscience)이라고 불렀다. 듀르케임은 그의 사회분업 론에서 집합의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일사회의 평균적인 시민들에게 공통된 신념과 감정의 총체, 그것을 우리는 집합의식 또는 공동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 중 략 ----------

따라서 집합의식은 개별적인 의식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지만, 개별적인 의식 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그것은 개별적인 의식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속성 과 존재의 조건 및 발달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회의 심리적 유형이다.} (E. Durkheim 저 De la division du travail social 임희섭 역 사회분업론 삼성출판사 간 세계사상전집 25권 p. 421)

듀르케임은 집합의식을 개인의식과의 관계에서 규정하고 있다. 우리의 집합표 상은 인간의 의식 그 자체를 말한다. 듀르케임의 집합의식은 결국 <공통된 집합 표상>인 셈이다. 주4)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중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집 합표상은 필연적으로 상당한 범위에서 사회적이고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집합표 상은 일체의 의식이기 때문에 윤리적 도덕적 의식에 한정되지 않는다. 집합표상 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2. 가치매체(價値媒體 : value media)

가치란 인간이 원하고 추구하는 모든 것이다. 인류는 사회를 형성하는 방법으 로 이러한 가치의 귀속, 이전, 배분을 매개하는 매개체를 발전시켜 왔다. 화폐는 그 전형적인 예이다. 화폐는 경제적 가치를 매개하는 매개체(intermediary)이다. 따라서 가치매체란 화폐를 가르키는 말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화폐 이외에 주식도 가치매체이다. 주식은 그것이 재산가치를 가진다는 성격에 서는 상품이다. 그러나 주식이 경영권이라는 기업의 권력을 결정하는 의결권이라 는 점에서는 가치매체이다. 그것은 기업경영권이라는 가치를 결정하는 매개체인 것이다. 물질적 부를 얻기 위해서는 매개체인 화폐를 더 많이 얻으면 된다. 마찬 가지로 기업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주식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이 러한 점에서 주식도 화폐와 같은 가치매체인 것이다.

화폐와 같은 가치매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중대한 사회적 범주라는 것이다. 화폐가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화폐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화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별 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화폐, 주식, 투표권 등을 동류의 사회적 범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범주를 가치매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를 해석하는 데 있어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補論 II : 사회에 관한 근대이론 **************

1. 자연사회와 시민사회 : 계몽사상

근대의 계몽사상은 시간적 선후관계 또는 논리적 선후관계를 따져 사회를 자 연사회와 시민사회로 나누었다. 자연사회는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에 자연적 개인 들로 구성되는 사회이다. 로크는 이러한 자연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은 생명(lives), 자유(liberties), 재 산(estates)에 관한 권리를 갖고 있으며, 로크는 이 세가지를 포괄하여 소유 (property)라고 불렀다. 이렇게 규정할 때 인간은 사회적으로 이러한 소유의 총체 로 규정되며,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은 소유적 개인(possessive individual)이다. 이 러한 소유적 개인들이 상호 동의하여 계약을 맺어 국가를 성립시킨다. 이렇게 국 가가 성립하고 국가에 의하여 규정되는 사회가 시민사회 내지 문명사회인 것이 다.

자연사회를 가정할 때 시민사회는 몇가지 체제적 원칙을 규정할 수 있다. 첫째, 국가의 권력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즉 생명, 자유, 재산에 관한 권리--를 침해 해서는 안되고, 반대로 그것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 이것이 자유주 의이다. 둘째로, 권력은 이와 같은 목적에 의하여 제한되고, 이것에 봉사하기 위 해서는 인민의 동의에 기초하여 성립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이다. 말하자면 계몽사상가들에게 있어서 현실의 사회는 몇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 라, 인권과 권력으로 규정되는 하나의 시민사회가 있을 뿐이다. 자연사회는 현존 하는 사회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시간적 또는 논리적 전제(前提)였다. 사회에 대 한 이러한 단순한 관점은 그 후 비판되고 수정되었다.

2.헤겔의 시민사회와 국가

헤겔이 볼 때, 계몽사상이 말하는 자연사회라는 것은 순전한 허구였다. 개인은 사회를 떠나서 또는 사회이전에 독립하여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 의 외관상 자존(自存)은 환각이다. 진리는 전체성에 있다. 이러한 진리로서의 전 체를 헤겔은 절대(絶對)라고 불렀다. 절대는 정신적(精神的)이다. 물질적인 것은 항상 변화하는 것이고 부분적인 것으로 절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절대 야말로 일체를 포괄하고 자신의 외화(外化)로서 일체를 산출한다. 사회나 국가라 는 것도 이러한 절대정신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며, 정신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헤겔은 사회나 국가를 객관정신의 한 단계로서 인륜(人倫;헤겔의 언어로서 객 관화된 이성적 의지;Sittlichkeit)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헤겔에 있 어서 인륜의 범주는 가족, 시민사회, 국가라는 세가지 영역이 있다. 따라서 국가 는 개인들의 사회계약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정신이 자신을 구현하는 하나의 차원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해겔의 관점은 계몽사상과는 다르다. 자연 사회가 먼저 있고 자연사회의 구성원들이 사회계약을 국가를 창설하는 것이 아니 라, 사회와 국가는 정신의 서로 다른 단계라는 것이다.

헤겔은 사회를 시민사회와 국가로 구분하였다. 계몽사상가들이 자연사회라고 하는 것은 헤겔이 볼 때, 사실은 시민사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헤겔의 시민사회 (b"urgerliche Gesellschaft)는 경제적 성격을 가진다. 즉, 욕망과 노동과 재산에 의하여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는 개인들로 구성된 세계이다. 시민사회에서 각 개 인은 욕구의 총체로서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이러한 시민사회는 결코 자존(自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민사회란 본질적으로 '주관적 욕구와 우연적 만족 의 영역'(이것은 헤겔의 언어임)이다. 그것은 결국 갖가지 대립과 무절제와 빈곤 을 수반하는 참상과 윤리적 퇴폐를 드러내게 된다. 또 시민사회에서 인간은 본질 적으로 불평등한 존재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결과 분 배는 불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헤겔은 경제적 영역에서의 자유가 필연적으로 빈 부의 격차를 야기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시민사회는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고 더 높은 단계에서 그것을 완성시키는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헤겔에게 있어서 국가는 인륜적(人倫的) 이념의 현실태(現實態)이다. 국가는 자기를 사유하고 인식하며 스스로 자신을 실현하는 인륜적 정신이다. 헤겔은 계 몽사상가와는 달리 국가가 개인의 천부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 이 아니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국가는 시민사회보다 더욱 고차적인 인륜적 범주 이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주관적 정신이라면 국가는 객관적 정신이다. 따라서 개 인과 국가의 관계는 역전(逆轉)된다. 개인은 국가의 성원(成員)으로서만 스스로 객관성과 진리, 그리고 인륜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국가는 개인에 대하여 최 고권을 가지며 개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국가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헤겔에게 있어서 사회는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로 규정된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계몽사상가들의 그것(국가)이 아니라 사회의 경제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3. 마르크스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헤겔이 계몽사상가들의 자연사회를 허구로 보았다면, 마르크스는 헤겔의 절대 정신을 일종의 허구라고 보았다. 헤겔의 절대정신을 관념론에 기인하는 오류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사회를 유물론적으로 해석하였다. 유물론적으로 보면 헤겔의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는 뒤집어진다. 국가는 더 높은 차원의 인륜적 범주도 아 니고, 객관정신이라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오히려 시민사회야말로 주요한 범주 이며, 국가는 종속적이고 시민사회의 창조물에 불과하게 된다. 국가는 사회의 경 제적 차원에 토대를 둔 권력체계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질적이고 경제적 인 시민사회야말로 더욱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시 민사회의 규명에 몰두하였다.

마르크스가 발견한 바에 의하면, 시민사회의 본질은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었 다. 마르크스는 철학적 규정에서 떠나 경제학적 분석으로 이행한다. 시민사회가 사실은 자본주의체제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시민사회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구분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 이라는 관점으로 이행하였다. 시민사회의 본질인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분석할 때, 핵심적인 문제는 자본의 소유와 운동(運動)이다. 시민사회(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본질적 특징은 자본의 사적(私的) 소유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소유관계(계몽사상가 들의 재산권)를 착취(搾取)를 야기하는 핵심적인 생산관계로 규정한다. 계몽사상 가들이 천부의 인권으로 규정하였던 지고한 재산권이 마르크스에서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 된다. 국가는 이러한 시민사회를 토대로 성립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국 가는 재산권을 보장하는 자본가계급의 권력기구라는 것이다. 한편 사회의 문화적 차원(의식) 역시 경제적 토대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었다. 즉 의식이 존재를 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는 하부구조(토대)와 상부구조의 관 계가 되었다. 사회의 경제적 차원이 사회의 하부구조이고 토대이며, 사회의 정치 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은 사회의 상부구조이다. 그리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었다. 국가는 하부구조(토대, 헤겔의 시민사회)의 성격에 의 하여 결정되는 것이며, 결코 시민사회의 결함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 가란 시민사회의 본질적 실체를 불완전하게 은폐하고 있는 가면(假面)이고 외피 (外皮)일 뿐이라는 것이다. 국가는 시민사회의 무기력한 정치적 앞잡이이며, 부르 조와의 공동위원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국가의 정치적 과정을 이루는 서구 민 주주의란 브르조와 독재의 위장형태(僞裝形態)라는 것이다.

4. 그람씨의 시민사회와 헤게모니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의식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경 제적 요소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었다. 역사의 발전을 인간의 의식을 중심으로 규정하는 것은 바로 헤겔의 오류였으며, 그것은 절대정신과 같은 관념론적 환상 에서 도출되는 잘못된 결론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혁명을 이룩할 수 있는가 하 는 실천적 관점에 서 있던 그람씨가, 이탈리아에서 부딪친 현실은 마르크스의 이 론과는 다른 것이었다.

비록 헤겔의 인륜이나 절대정신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과는 관계가 없지만, 그 람씨에게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적인 의식(우리는 그것을 집합표상이라 불렀다)은 혁명의 중대한 장애였다. 노동자계급의 집합표상(의식)도 계급의식이 전부가 아니 었으며, 계급의식 자체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국민의 일반 적 집합표상(의식) 자체에 대하여 어떠한 작용을 가할 수 없다면 혁명은 불가능 한 상황이었다. 그람씨는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살아서 작동하고 있는 집 합표상(의식)의 힘을 인식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단순히 경제적 토대와 국 가의 강제력으로 형성된 구조물이 아니라, 그것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또 다른 차원으로서 자본주의에 정합적인 집합표상(의식)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합표상(의식)이 자본주의 자체의 경제적 구조를 유지하는 결정 적인 힘이었다.

그람씨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집합표상(의식)의 차원이야말로 시민사회의 본질 적 성격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시민사회가 아직 원시적이고 무정형(無定形)한 것이 었지만, 서구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국 가가 동요할 때에는 당장 시민사회의 견고한 구조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문제가 아 니라,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국민의 집합표상에 대하여 지적(知的) 도덕적 헤 게모니를 획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혁명적 실천이 가 능한 것이었다.

그람씨에 의하여 시민사회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헤겔의 경 제적 상호의존체계도 아니고, 물질적 관계의 복합체로서의 자본주의적 하부구조 도 아니다. 시민사회는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관계의 총체 또는 정신적이고 지적 인 삶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사회의 문화적 차원 또는 집합표상의 차원이라고 불렀던 것에 해당한다. 그람씨의 시민사회란 바로 자본주의에 대한 집합표상의 차원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집합표상이 일반화됨 으로써 자본가계급은 모든 사람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이 자발적인 동 의를 받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유리한 집합표상을 자산(資産)으로 하여 자 발적 동의를 획득하는 상황,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 지배력을 그람씨는 '헤게모 니'라고 불렀다.

5. 사회를 보는 관점

이상의 근대적 논의를 보면 사회를 세차원으로 나눈다는 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시민사회라는 개념자체가 사회의 정치적 차원, 경 제적 차원, 문화적 차원으로 마구 변경되어 온 셈이다. 즉 계몽사상가들에게 시민 사회는 국가가 성립한 정치적 사회라는 의미였다. 헤겔에게 시민사회란 사회의 경제적 차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시민사회란 경제적 하부구조라는 의미였다. 그람씨에게 시민사회란 자본주의적 의식의 세계, 우리의 용어로 말하면 자본주의적 집합표상의 세계이다. 결국 그람씨의 시민사회는 우리의 관점에서는 사회의 문화적 차원이다. 결국 동일한 시민사회라는 개념이 처음에는 사회의 정 치적 차원, 다음에는 경제적 차원, 그 다음에는 문화적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사상의 흐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요한 점은 사회의 정치적 차원, 경제적 차 원, 의식의 차원이 사회의 중요한 범주라는 것이다. 헤겔은 사회의 정치적 차원 (국가)야말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경제적 차원(자본주 의적 하부구조)이야말로 결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한편 그람씨는 오히려 사회의 집합표상의 차원(자본주의적 의식의 차원)이 결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서 로 다르게 규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계몽사상가들에게 있 어서 사회를 규정하는 관점은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가 하는 당위적 관 점이었다. 이러한 당위적 관점을 사실관계--자연사회에서 연유하는 시민사회--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한편 헤겔은 당위적 관점과 사실적 관점이 포괄되어 있다. 즉 사실적으로나 당위적으로나 시민사회보다 국가가 결정적이고 우월한 것이었 다. 마르크스의 관점은 사실의 관점이다. 즉 사회의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 한다는 것이다. 그람씨의 관점은 사실의 관점과 전략의 관점이 포괄되어 있다. 즉, 사회에는 집합표상(의식)의 차원이 결정적이며, 따라서 혁명은 의식의 차원에 서 지적 도덕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6. 사회적 삼재(三才)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것과는 다른 새로운 사상에서 사회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것은 모든 서구근대적인 관점을 떠나 동양(유교문명권)의 사상에 기반하는 것 이다. 우리가 사회를 세개의 차원으로 나누는 것은 동양의 삼재사상(三才思想)의 관점이다. 삼재사상이란 일체의 존재나 현상을 천지인(天地人) 세개의 바탕으로 규정하는 것이다.(우리가 앞으로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유교문명권을 지칭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정치적 차원, 경제적 차원, 문화적 차원 각각의 본질적 의미는 (근대서구적인 시민사회 등의 의미가 아니라) 동양의 천지인(天地人)의 의미이다. 사회의 정치적 차원이란 삼재에서 인(人)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 것은 인위적으로 전체를 조화(人의 和)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정치 의 본질을 인위적 조화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권력과 법률은 이러한 인위적 조 화를 이루는 수단이고 매개양식이다. 둘째로 사회의 경제적 차원이란 삼재의 지 (地)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정한 법칙성(地의 理)에 의하여 규제되는 물질적 장(場)을 의미한다. 자본이나 가치매체(화폐)는 이러한 법칙성을 형성하는 매개요소이다. 세째로, 사회의 문화적 차원이라는 것은 삼재의 천(天)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행동을 야기시키는 원천(天의 時)이며, 천(天)이란 바로 인간의 의식(집합표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제1권에서 이미 사회를 이러한 관점에서 세개의 차원으로 나누고, 각 차원의 매개양식으로서 권력과 법률, 자본 과 가치매체,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으로 규정하였다.

7. 세 차원 상호간의 정합성

삼재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의 각 차원이 상호간에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은 논의할 필요가 없다. 각 차원은 서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전체적 연대 성(連帶性)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즉, 상호규정적(相互規定的)이다. 무엇이 무 엇을 규정하는가 하는 것은 구체적인 시공간적인 상황에 의하여 좌우된다. 어떠 한 경우에는 경제가 정치를 결정하고 어떤 경우에는 정치가 경제를 결정한다. 따 라서 그것은 일반법칙의 문제가 아니다. 굳이 일반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차원은 다른 두차원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삼재사상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의 각 차원은 다른 차원과 정합성(整合 性)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차원은 다른 두차원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두차원에 부합(附合)하는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상호간에 정합적이 기 때문에 사회와 체제가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는 것이다. 집합표상(사고 방식)이 바탕이 되는 문화적 차원이 다른 차원에 정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람씨(Gramsci)에 의하여 지적되었다. 즉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 인간의 집합표상(의식)은, 그것이 노동자의 집합표상이라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체제에 부합하고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지키는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 에 대해서, 우리는 각 차원이 상호간에 정합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합성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정합성이 완전하다면 어떠한 사회도 변화가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적 변화는 이러한 정합성이 불완전 한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사회, 체제, 문명 등의 문제는 이러한 정합성을 규명 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정합성의 내용을 규명함으로써 변혁의 열 쇠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체제에 관한 논의 역시 이러한 삼재사상 에 바탕을 두고 진행될 것이다.

주4) 우리는 듀르케임과 다른 관점에서 사회적 연대를 규정한다. 사회적 연대란 인간을 사회로 통합하는 양식이다. 이러한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는 요소가 사회의 매개요소이다.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은 사회를 동합하는 기초적인 매개요소이다. 자본과 가치매체, 법률과 권력 역시 사회를 통합하는 매개요소이며, 말하자면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는 매개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매개요소, 헤게모니 자산 그자체가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는 수단인 것이다. 듀르케임이 말한 기계적 연대란 그 사회가 공통의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에 의하여 주로 통합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기적 연대란 가치매체(화폐)에 의한 사회적 연대를 말하는 것이다. 유기적 연대 - 가치매체에 의한 사회적 연대 - 에서도 공통의 집합표상은 필요하다. 동시에 기계적 연대에서도 넓은 의미의 사회적 분업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의 구분은 적절한 구분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적 연대를 다르게 분류한다. 주로 권력과 법률에 의하여 사회적 연대가 이루어지는 사회는 연대성이 낮은 사회이다. 로마문명이 그러하였다. 권력과 법률보다는 주로 자본과 가치매체애 의하여 사회적 연대가 이루어지는 것이 더욱 연대성이 높은 사회이다. 왜냐하면 권력적 법률적 억압이 적어지고 자유로운 연대가 확장되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일체의 연대수단이 없이 오직 집합표상과 커뮤니케이션에 의하여 사회가 통합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지극히 원시적인 사회이가나 아니면 낙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회는 권력도, 법률도, 자본도, 화폐도 필요없는 사회이며, 인간은 상호간의 정신적 연대가 완전하여 의사소통만으로 모든 것이 조화적으로 처리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