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대한 '서정성'과 '주관적해석'의 표현 .

고데기동산과 한 인간의 내면 풍경 ................... 윤진섭 (미술평론가)

1.    정물이나 풍경,인체 등 생활 속의 친근한 정경을 화폭에 담아온 김명식이 아홉번째의 개인전을 갖는다. 알다시피 그는 대상의 간명한 생략과 풍부한 색채의 구사로 이미 화단내에 정평이 나 있었고, 이번 개인전은 그의 이와 같은 화풍의 맛을 다시한번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김명식은 구상회화라고 하는, 어찌 보면 우리 화단에서 독자적인 또 하나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분야의 중견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구상전 금상과 중앙미술대전 특선, 미협전 특별상 수상 등 화려한 그의 경력이 말해주듯이 지난 20년간 그가 이 분야에서 거둔 성과나 기여한 공로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그 만큼 그는 화풍의 면에서 볼 때 한눈을 팔지 않고 외곬으로 정진해 온 작가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약간 빗나가는 것 같지만 구상회화는 주로 구상전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회화의 한 분야에 속한다. 이는 국전이나 목우회의 사실적인 화풍과는 달리, 대상의 형태 왜곡이나 화면의 질감 표현에 주력하면서 그 특징적 양상을 구축해 왔다. 추상성과 구상성을 겸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반추상이라는 말로도 부를 수 잇는 이 계열의 화풍은 엄격한 대상의 재현이나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정념의 표출(추상)보다는 대상에의 정감적 접근이란 관점에서 분명한 차별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 방법론은 대상에 대한 팽팽한 거리감의 확보나 긴장(사실적 재현회화), 또는 아예 구체적인 대상의 설정 자체를 용인하지 않는 추상과는 달리, 이 양자의 특성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가운데 작가의 화의를 펼 수 있다는 점을 갖고 있다. 물론 여기서 필자가 사용하는 '구상회화'라는 용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상과 비구상의 분류적 개념이 아니라, 특정한 양식을 통칭해서 부르는 편의적 개념을 일컫는다.
    포토리얼리즘이 대상에 대한 엄격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객관적 엄밀성과 명징한 과학성을 확보하는 것과는 다리, 구상회는 어디 까지나 '작가의 입장에서 본'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보이는 데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데로 그리는 것이다. 대상의 과감한 형태왜곡이나 색채의 비현실성은 바로 이와 같은 견지에서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대상에의 심상적 접근' 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마음으로부터 떠오르는 이미지를 화폭에 옮긴다는 뜻으로 새겨도 무방할 것이다. 김명식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실주의 작가가 아니라, 느끼는 데로 그리는 것이다. 대상의 과감한 형태왜곡이나 색채의 비현실성의 바로 이와같은 견지에서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 우리는 이을 가리켜 '대상에의 심상적 접근' 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마음으로부터 떠오르는 이미지를 화폭에 옮긴다는 뜻으로 새겨도 무방할 것이다. 김명식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실주의 작가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느낀대로 그리는 심상의 작가이다. 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운필의 분방함과 색채의 자유로움은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비롯한다. 그이 근작에서 무르익듯 만개하고 있는 필선의 탄력과 공간 운영의 여유, 대상 포치의 완벽성은 심상 이미지의 표출을 위한 부단한 수련의 산물이다. 이 점은 비교적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잇는 '출항' (1980), '항구의 서곡'(1983)등이 보여주는 화면의 밀도와 비교해 볼 때 확연이 구별된다.

2.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김명식이 작품제작에서 가장 주안점을 두었던 것은 화면의 구성과 질감(텍스춰)의 표현이었다. '꽃은 피고'(1979), '도시의 서곡'(1981)연작, '출항'(1984)연작 '항구의 서곡'(1983), '김선장의 조반'(1985) 등 일련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와 같은 특징은 캔버스 표면과 유화물감, 그리고 붓이나 나이프와 같은 도구를 둘러싼 실험의식을 엿보게 해 준다. 제목이 연상시키는 이야기를 은유와 상징의 수법을 빌어 은은 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서정적인 설화의 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초기작들이 대체로 딱딱하고 엄격해 보이는 것은 중첩되는 화면의 분할과 나이프에 의한 안료구축의 영향 탓이다. 그런 리드미컬한 화면의 흐름을 위해, 또는 전체적인 감각적 효과를 위해 색채를 희생시켰다. 색채는 그것이 원색에 가까울 수록 화면을 장악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위주로 하고 잇는 작품에서는 상당히 절제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무렵 그의 작업은 이야기 성격을 짙게 띠고 있었다. 동심의 세계, 도시의 삶의 단편, 항구의 분위기와 같은 테마들은 나이프의 끝으로 굵어서 내는 상채기들에 의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게 된다. 약간 비릿한 서정성을 띤 그의 이 무렵 작업들은 짙은 암갈색조나 군청, 회색조를 주조로 하고 있다.
    김명식에게 있어서 색채의 회복은, 나이프를 버리고 붓을 사용하면서 비롯되는데, 이때가 대략 86년 무렵이다. 그보다 앞선 85년도는 일종의 모색기로서 붓과 나이프 양자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가 나이프를 버렸다는 사실은 곧 설화성에서 일상적 대상의 세계로, 또는 텍스춰에의 관심에서 색채 자체로 관심의 전이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방'(1986)' '동산'(1985), '실내'(1989), '휴식'(1991)과 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일상적 정경을 소재로 하면서 색채실험을 했던 작가의 고뇌의 흔적을 보여준다. 연두,노랑,빨강, 보라, 파랑 등 거의 원색에 가까우리만치 화사한 색감으로 그려진 그의 정물이나 인물, 풍경화들은 '감가의 즉물화'를 성취하고 잇다. 그것들은 대상으로부터 받은 인상, 대상들이 뿜어내는 심상적 기운이나 분위기가 채 가시기 전에 형상화시켜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으로부터 나온다. 이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김명식 작업의 특징이 재빠르고 분방한 운필과 미끄러지듯 뒤섞이면서 나타나는 색채 혼합의 뉘앙스를 좀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으리라

     3.    금번 청작화랑 초대전에 선보일 '고대기 동산'연작은 유년시절에 자각 체험했던 기억의 잔영을 형상화한 것이다. 강동구 고덕동의 옛 지명인 고덕리를 소리나는 대로 불러 토착화된 이 지명은 작가의 유년시절의 꿈을 간직한 곳이다. 지금은 서울의 부도심권으로 변홰 고층아파트가 빽빽히 들어차 있지만, 작가의 마음속에는 옛날의 모습이 생생하게 간직돼 있다. 그가 그리고자 하는 풍경은 공해에 찌든 오늘의 모습이 아니라, 옛날의 싱싱하고 해맑은 모습이다. 따라서 그것은 심상적 이미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새가 지저귀고 밤이면 동산위에 해맑은 보름달이 둥두렷이 떠오르던 그곳은 작가에게 있어 잃어버린 꿈의 본향이다. 작가는 그것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80년대 중반이후 작업의 논리적 귀결로서 보다 추상화된 근작들은 향후 전개될 회화적 실험의 단조를 이룬다. 김명식의 '고데기 동산' 연작은 보다 극단적인 대상의 해체와 거친 파필의 사용으로 대상의 겉모습보다는 그것의 핵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서 나타나고 잇는 대상에의 접근법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정감적 접근이다. 그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기 보다는 대상을 마음속으로 끌어당김으로써, 자유로운 이미지의 변용을 시도한다.
    거의 낙서화에 가까우리만치 분방한 선묘와 형태의 해체 현상을 보이고 잇는 그이 작업은 두가지 점에서 그 특징을 보여준다. 하나는 색채의 변화요, 다른 하나는 내용의 변모이다. 색채의 변화는 이제까지의 작업에서 고유색이 견지돼 왔던 것과는 달리 근작에와서는 색채의 자율성과 함께 절대적 가치가 부여되고 잇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이전까지는 사물의 묘사에서 시원스런 색면과 함께 윤곽선이 부수되엇다고 한다면, 근작에 와서는 윤곽선이 사라지고 오로지 색면에 의한 대상의 구축이 이루어지고 잇음을 볼 수 잇다.
내용상의 변화는 종전까지 관심을 두어왔던 일상적 삶의 정경이나 정물, 풍경으로부터 설화를 바탕으로한 대상들(산이나 마을,개,새 등)의 결합이 등장되고 잇다는 점이다. 밝고 명랑한 색채와 자유로운 운필에 의한 대상 표현으로부터, 어둡고 무거운 색조를 바탕으로 거친 필치를 드러내고 있는 그의 근작들은 향후 전개될 김명식 회화의 변화를 암시한다. 이는 최근 조심스럽게 시도하고 잇는 입체작업과 함께, 보다 묵직해진 한 작가의 내면세계를 살펴 보는데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