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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학 강의 평가서 이君의 글에 답함

생물학 수업을 들으면서 항상 교과서의 일부분밖에 배우지를 못하여 수업이 끝날 때마다 무엇을 배웠는지 확실한 느낌이 들지를 않는 불만이 있다는 의견에 대하여 공감하며 몇 가지를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도 대학 시절 이후로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업을 들었지만 교과서 한 권을 다 배웠다는 그런 수업은 별로 기억에 없읍니다. 대학 때에는 주로 교과서가 있는 수업이었지만 석박사 이후로는 교과서 없는 수업이 主를 이루었읍니다. 교과서라는 것도 그것을 집필한 한 사람의 의견일 뿐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읍니다.

수업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교과서일까요, 아니면 선생님일까요. 수업에서 배워야 할 것은 선생님이지 책이 아니다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교과서를 수업에서 배울 수 없는 까닭은 선생님이 수업에서 교과서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교과서 저자와 생각이 다르거나 하면 교과서대로 가르칠 수 없거나 가르치지 않거나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수업이란 것은 교재와 선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교재를 통하여 선생을 배운다는 쪽이지 선생을 통하여 교재를 배운다는 쪽이 아님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가르친다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스스로 교과서를 집필하거나 아니면 특정 교재 없이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재만 있고 선생이 없는 것을 우리는 수업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요. 고교까지에서는 교과서와 선생이 항상 set가 되어 수업이 이루어지는 탓에 교과서와 선생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특히 고교이하의 선생님들에게는 수업의 자유가 적고 수업 시간에는 이러 이러한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는 제약이 있으니 무리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부터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에서는 학문의 자유를 중시하여 수업의 방법 등에 대하여 교수에게 많은 재량을 허용하고 있어 수업에 관해서는 그 수업의 교강사에게 일체를 일임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읍니다. 그러므로 대학의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를 들어서 열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하나를 배우고 싶지 열을 이해하기 위해 열을 모두 배우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어떤 선생님에게서 종교 경전 수업을 받을 때의 일이었읍니다. 그 선생님은 서론 부분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끝내시고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되니 수업은 이상으로 끝이라는 것이었읍니다. 본론이란 서론에 적혀 있는 essence에 대한 부연 설명에 불과하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읍니다. 경전의 서론은 불과 몇 page이고 본론은 수십 page여서 이제부터 제대로 배우나 보다 하고 있는데 끝이라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서론 설명에서 해 주신 소중한 말씀들은 제 마음 속에 오래 남아 있읍니다. 본론의 강의를 해 주시지 않은 탓에 더 인상 깊게 남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본론을 기대하고 서론을 흘려 들은 뒤 뭐 이런 수업이 다 있느냐고 흥분하는 학생이 있었다면 그 선생님은 아마 한 때라도 온 정신을 다 쏟아서 듣고 있어야 했다고 답하셨을 것 같읍니다. 그리고 인생에는 두 번이란 게 없다란 말씀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수업은 거기서 끝이었읍니다. 종교 경전 공부와 자연과학 수업이 같을 리야 없겠지만 그때의 교훈은 마음 속 깊이 오래 남아 있읍니다. 본질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고 많은 말로써 가르칠 필요는 없다는 교훈이 오래 남게 되었읍니다.

교과서를 집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유혹은 많이 받고 있지만 역시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자주 드는 비유에 이런 고사(故事)가 있읍니다. 중국의 어떤 한 농부가 새가 걸려 있는 그물을 유심히 들여다 본 끝에 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읍니다. 새는 그물눈 한 개에 걸려 있다는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날부터 숲 속 나무 사이로 그물눈 한 개를 걸어두고 새가 걸릴 것를 기다리게 되었읍니다. 새가 그물눈 한 개에 걸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물 눈 한 개로는 새를 잡을 수 없다는 묘한 이 일을 두고 저는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부대 효과의 비유로 삼고 있읍니다. 핵심을 위해서는 교과서의 전부는 필요 없다는, 그러나 그것만 적어서는 핵심을 전달할 수가 없다란 것입니다. 고교 진학 교사가 다수의 합격자를 내기 위해 사용하는 2배수 추천이라는 것도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왜 걸릴 수 있는 정예의 숫자를 응시케 하여 낙방의 고배를 마시는 학생 수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예상 합격자 수의 2배를 응시케하느냐는 것도 잘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과서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다 적어야만 책으로서 성립하게 되는 것이고 수업에는 그 전부는 필요 없다란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교과서 진도 나가는 것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수업을 진행했던 한 때가 있었읍니다. 수년간 해 보고 난 뒤의 감상은 별다른 충족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읍니다. 목표량을 채우기에 급급한 느낌이었고 선생에게도 학생에게도 괴로운 수업이었읍니다. 진도를 채우기 위해 질문도, 반복 설명도 없는 오직 일방적인 주입식 전달만이 있었던 수업이었읍니다. 어차피 만족스러운 수업이 못될 바에야 내가 좋아하는 대로 해 보자는 생각이 생겼고 그 결과 무엇을 얘기하던 그 한 시간 수업을 의미 있고 알찬 것으로 만들어 보자는 식의 수업을 하게 되었읍니다.

격변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아직도 “그 하나”의 지식이 있을까요. 조문도(朝聞道)면 석사가의(夕死可矣) 할 수 있는 그런 발생학적 지식이 있는 걸까요. 만약 그런게 있는 것 같다는 쪽이면 “그 하나”를 철저히 강의하고 철저히 외우게 하여 졸업하도록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정보화 세상에 그런게 어디 있느냐는 식의 생각을 저는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한 지식”이 아닌 생각, 판단, 유추 등의 것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읍니다.

embryo를 두 개 합하면 크기가 두 배가 되는데 태어나는 쥐는 두 배 크기의 쥐가 태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초기 할구를 분리하여 4세포기의 한 할구를 자궁에 이식해도 쥐는 태어날 것이나 1/4 크기의 쥐가 태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않을 것이다보다 안 태어났다는 쪽이겠지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발생학의 한 훌륭한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정상 크기로 태어난 것은 embryo가 크기를 인식하여 난할 속도를 감속하거나 증속할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발생 시계라는 개념으로 빠르면 늦추고 늦으면 빨리 할 수 있는 발생 시계 조절의 개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embryo전체가 자신의 크기를 감지한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므로 구성 세포간의 접촉에 의해 크기를 판단한다는 쪽일 것입니다. 그러나 상세한 것은 나도 아는 바가 없고 잠시 책의 여기저기를 찾아 봐도 알 수가 없군요. 궁금한 것으로서 현재 연구 중인 주제 정도로 해 둬야 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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