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보편적 정신에로의 회귀


근대서구의 정신--개인주의, 합리주의, 물질주의--는 참으로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새로운 문명의 전망에서 본다면 그것은 참으로 편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거짓이다.


1.탐욕에의 반역(叛逆)

개인주의, 합리주의, 번영, 자유, 민주주의 등 근대서구문명을 수식 하는 이러한 화려한 이념의 이면에는 추악한 현실이 있다. 그 화려한 외 피를 벗기고 보면 그곳에는 오직 하나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개인적 이기주의>이다. 근대문명은 인간을 개인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문명의 기초를 두고 있다. 인간을 개 인으로 파악하는 것은 흔히 <개인의 발견>으로 찬양되고 있다. 그리고 이기주의는 합리주의로 포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수식을 하든 상관없이 근대의 모든 이념(정신)의 본질은 개인적 이기주의인 것 이다.

근대정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개인적 이기주의를 정당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경제학이다. 경제학은 몰가치적인 과학을 표방하 고 있지만 사실은 근대정신의 본질인 개인적 이기주의의 이데올로기이 다. 경제학은 근대이전까지의 모든 인류의 <보편적 정신>에 대해 두가지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첫째, 인간에게 사랑과 선과 도덕을 훈계할 필 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탐욕적인 이기주의야말로 공동선을 창조하고 사회를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경제학은 그것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처럼 설명했다. 소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인의 이 기적 행동을 공동선과 발전으로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류의 보편적 정신사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인간은 이제 사랑의 도덕에 얽 매일 필요가 없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되는 것이었다.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이 선이고 발전을 가져온다는 이 계명이야말로 근대정신이었다. 둘째, 경제학은 인간사회의 물질적 부를 증진시키고 그럼으로써 개인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의식을 상식화시켰다. 우리에게 물질적 부가 증진되는 것--즉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 러나 근대이전에 이것은 결코 상식이 아니었다. 근대이전의 모든 정신 들--저 위대한 예수, 석가, 공자, 마호메트 등 성인들까지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물질적 발전에 의하여 가난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 을 말하지 못했다. 그 성인들--그리고 근대이전의 모든 정신들--은 다만 물질적 욕망보다 더 위대하고 중대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 다. 경제학(즉 근대정신)은 바로 이러한 인류의 보편적 정신에 정면도 전했다. 그리고 성공했던 것이다.

이 두가지 정신적 반역이야말로 근대정신이다. 이러한 근대정신에 의하여 근대인(현대인)의 행동은 단 하나의 동기에 의하여 지배된다. 그것은 바로 화폐를 추구하는 정신, 화폐애(貨幣愛)이다. 인간이 화폐에 대한 탐욕을 기준으로 행동함으로써 공동선이 이룩되고 물질적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근대정신의 마지막 사도(使徒) 케인즈는 "우리는 탐욕을 신으로 숭배해야 한다" 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경제가 충분히 발전되면--더 이상 투자가 필요없고, 자본의 희소성이 사라지고, 이자 생활자가 안락사하는 자신의 손자(孫子)대에 이르면---"인류는 마침내 이익보다 선(善)을 택하리라"고 했다( J.M.Keynes{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이것이 바로 근대정신의 핵심 이다.

우리가 숭상하는 근대의 위대한 이념들--근대서구정신--이란 무엇인 가? 그것들은 모두 위와 같은 개인적 이기주의의 정당화이다. 자유주의 란 무엇인가? 그것은 법률의 한계 내에서 모든 인간은 마음대로 자신의 탐욕을 추구할 수 있고 그것이 좋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시장체제란 무엇 인가? 탐욕의 신(神)이 공동선을 창조한다고 신화화한 매카니즘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탐욕을 정당화하는 개인들의 공동체이다(다시 말하면 사랑을 강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합리주의란 무엇인가? 신 을 대체하여 개인적 탐욕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인간정신의 사용방식이다. 물질주의란 무엇인가? 탐욕을 긍정하고 그것을 더 많이 충족시키는 것이 야말로 문명이라는 것, 바로 탐욕의 문명인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비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근대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것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비 판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우리에게 익숙하고 당 연한 근대서구정신은 실로 인류의 보편적 정신사에서 중대한 일탈(逸 脫)이고 예외이고 타락이고 반역이다. 어떻게 탐욕이 정당화되고 사랑이 경멸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탐욕이 아니라 사랑이 진리인 것이다. 우리 는 오랫동안 저 서구의 위대한 문명에 압도당하여 보편적 진리를 잃어버 린 것이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마비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정신적 혼동상태, 저 위대한 미국의 정신이 더 이상 호소력 을 상실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서구근대정신의 진리에 대한 왜곡이 드 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근대정신의 이러한 왜곡은 (케인즈 정책의 결과로서) 소비만능주의에 의하여 폭로되었다. 그에 의하여 노골화한 합 리적 탐욕주의(개인적 이기주의)다 이제까지 실제로 미국을 이끌어왔던 청교도정신을 파괴시면서 미국의 메세지가 빛이 바래고 있는 것이다. 새 로운 문명을 창조한다는 것은 바로 이제까지 배척되었던 인간의 올바른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마비된 온전한 인간정신 을 회복하는 것이다.


2.보편적 정신

그러면 새로운 정신은 무엇인가? 누구도 그것을 규정할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의 준거기준, 명확한 준거기 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류의 정신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성인들이 제시한 준거이다. 근대의 계몽사상가들이나 마르크스 케인즈에 이르는 근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들(聖人)을 능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무 지한 근대인들의 오만에 불과하다(계몽사상가들은 20세기 종교가 소멸할 것으로 생각했고,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했다.) 오늘날 우리가 준거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계몽사상가들이나 그 이후의 모 든 사상가나 지식인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위대한 봉우리, 바로 마호메 트, 예수, 공자, 석가이다.<<<<<<<<<새로운 정신은 마르크스나 케인즈의 정신이 아니라 예수와 석가의 정신이다>>>>>>>

예수와 석가가 한결같이 가르친 것은 <인간은 신神이라는 바다의 물 방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서양 모든 신비주의(합리주의자가 진리 에 대하여 붙인 이름)의 기본명제이다. 석가 예수 이전의 인도의 한 신 비주의자는 이를 간단히 요약했다. "내가 존재했을 때에는 신이 존재하 지 않았다. 이제 신이 존재하고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 서 중세의 왜곡을 제거하고 나면 바로 이러한 진수(眞髓)가 남는다. "이 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라 디아서 2:20)" 인간이 평소에 자아(自我)라고 생각하고 있던 의식을 넘 어서면 바로 그곳에 참으로 진정한 자아를 만난다. 그리고 그 진정한 자 아(眞我)는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참으로 위대한 자아(이름붙여 하느님, 神, 空, 道, 眞我)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전하는 예수의 말 씀은 복음(福音 기쁜 소식)이고, 불교의 화엄경은 그에 도달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으며, 선종(禪宗)의 공안은 그러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질문 이다. 기독교의 중세전통은 이러한 진아(眞我)를 의인화(擬人化)했고, 그리이스철학은 이러한 진아(眞我)를 실재화 또는 이데아화했다. 그러나 진아(眞我)는 자연(그 하나로서 인간)을 떠나서 독립해 있는 것은 아니 다(諸法實相).

근대의 개인주의-합리주의-물질주의(세속주의)는 바로 이러한 진리 로부터의 일탈이었다. 신을 분리해버린 후 세계를 존재론(또는 실재론) 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무엇이 실재냐 하는 것이 아니 라, 신과 나, 신과 자연, 자연과 나의 연대성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과 저것 중의 하나가 진리(실재)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연대성)가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연대성에 입각하여 보면 진리는 합리주의를 넘어서는 데 있고, 가치는 물질주의를 넘어서는 데 있고, 역사의 의미는 세속주의를 넘어서 는 데 있다. 진리는 합리적 자아의식을 넘어서는 데 있고, 가치는 물질 적 탐욕을 넘어서는데 있고, 역사의 의미는 인간정신의 발전에 있기 때 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진리가 아니라, 근대서구정신에 의하여 배척되었 던 인류의 <보편적 정신>에로의 회귀이다. 하지만 그 회귀는 서구 중세 와 근대의 오랜 왜곡을 초월하는 새로운 정신이다.(拙著 {존재로부터의 해방}참조)

이러한 인류역사의 보편적 정신에서 보면, 근대서구정신의 산물인 모든 사회과학은 재해석되어야 하고, 모든 자연과학은 재평가되어야 한 다. 가령 우리의 역사관은 직선적 시간의 관점에 서 있다. 그러나 직선 적 시간이란 허구이다. (직선적 시간이란 존재론적 관점이고, 신의 관점 (연대성의 관점)에서 시간이란 생성이다.) 자유, 민주주의, 소유, 경 쟁, 권리, 의무, 계약, 성장, 발전, 경제, 진보,등등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개념들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공자(孔子)도 재평가되어야 한다. 공 자가 가르친 것은 삶 그리고 인간사회가 의미가 있으려면, 결코 상업사 회(물질주의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상업사회는 인간을 물질화하고 세속화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상인을 억압했다고 하여--봉건 계급을 옹호했다고 하여--비판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공자야말로 그 시 대의 한계 내에서 인간정신을 지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찬양받아야 한 다. 동양문명, 특히 유교문명권 자체를 재평가해야 한다. 유교문명을 정 체된 봉건사회로서가 아니라(그 당시에는 모든 사회가 정체된 봉건사회 였다), 효과적으로 폭력을 억압하고(평화를 유지하고) 인간의 탐욕을 체제적으로 순화시켰던 문명으로 재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공자 도 예수, 석가가 제시한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예수는 교회 앞에서 환전상을 채찍으로 내리쳤으며, 인간은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였다. 석가는 욕망과 번뇌의 불길을 불어꺼는 것이 바로 열반이라고 가르쳤다. 근대서구문명은 바로 공자, 예수, 석가가 가르친 것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일탈한 것이었다. 우리는 저 위대한 성 인들을 복권해야 한다. 근대라는 일탈의 기간 동안 화폐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신(神)과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현실은 이미 우리의 의식을 앞서가고 있다. 지식정보혁명이 이미 상 업사회(물질문명)에서 지식사회(문화사회, 정신문명)에로의 전환을 재촉 하고 있다. 어떤 도정을 거치든 21세기는 상업사회(경제사회)가 아니라 지식사회(문화사회)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의 경향에 맞추어 위대한 성인들의 정신을 서구중세나 서구근대적 관점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 (실로 인류정신의 보편적 관점)에서 올바르게 해석하고 되살리고 발전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정신이다.


3. 개인주의, 합리주의, 물질주의를 넘어서

근대서구문명을 추진해온 합리주의란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합 리적 지식이 삶의 모든 문제에 대답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사회 적 연대로 묶어들이는 공통의 가치관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실제로 삶의 주요한 문제들은 합리적 지식으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 고 신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은 무엇인 가,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이성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대답한다고 해도 서로 대립하는 개념체계만을 만들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과 사회적 연대에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질문(이성이 대답할 수 없는 질 문)의 대답들인 것이다.

이성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성은 개념(결국 언어)과 상상 력에 의하여 규정된다. 우리는 한때 인류의 거의 반수를 지배했던 신 념(마르크스주의)이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념은 합리적 인 것이었고,그 이념을 믿었던 사람들도 충분히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성이라는 것은 결국 개념의 체계(마르크스주의의 제 이론들)에 의 하여 규정된 것이지, 항상 진리와 허위를 가르는 지고한 능력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신념이라는 것이 결국 교육되어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합리적으로 주장되는 진리도 중세의 종교적 진리와 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두 가지다 결국은 증명할 수 없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지 식정보혁명이 이러한 사실을 각성하게 했다. 우리는 폭발하는 지식의 환경 속에 놓이게 되면서 그것들 모두다 다만 하나의 정보로 취급하게 바뀌어져 가고 있다. 그럼으로써 인간정신은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 이외에 감성과 직관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문화 의 부흥, 경제보다 문화가 중요시되는 상황이야말로 이성에 한정되었던 근대의 왜곡을 뚫고 인간정신이 확장되어 제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 것은 합리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하는 것 이 아니라, 이성을 넘어 새로운 정신세계를 여는 것이다.

근대서구문명의 물질주의는 신중심의 세계관에서 탈출한 세속주의였 다. 그것은 물질적 발전이 영원한 것처럼 보여질 때의 환상이었다. 물질 적 발전이 주는 만족은 모든 인간에게 자극적이었고 현실적이었다. 그것 은 이 세상을 고통의 여정으로 보는 종교적 세계관을 내던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그 물질적 만족이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그것은 결코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공허 감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사실 근대서구문명의 물질주의를 추진한 것은 물질적 부가 제공하는 만족감이 아니었다. 근대서구문명의 세례를 받은 인간이 물질적 만족이라는 당근 때문에 그렇게 부의 축적에 광분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반대로 근대서구문명을 추진한 것은 기아 (饑餓)와 도태(淘汰)의 위협이었다. 노동자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가들은 다른 자본가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당 하지 않기 위하여--경쟁에서 지는 것은 곧 파멸인 것이다--미친듯이 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잔인한 기제가 근대의 물질문명을 추진한 힘 이었다. 경제적 발전은 그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이 잔인한 문명이 인 간에게 제공한 대가는 무엇인가? 부는 행복을 보장하는가? 오늘날 인류 는 그것을 반성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인간이 빵과 부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은 오랜 진리이 다. 물질주의는 바로 이것을 부정하는 정신이었다. 모든 인간으로 하여 금 이러한 저속한 상태에 얽어매어 놓고 있는 장치가 이제 그 수명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 환경의 파괴가 이러한 인간들에게 반성의 계 기를 주고 있다.

<<<물질주의와 예수 석가 공자의 대립, 물질주의의 반역 성>>

VI. 국가의 분화와 공동체의 재창조


1. 자율적 질서---공시와 신뢰의 원리

근대적 질서의 원리는 <타율적 질서>를 부과하는 <법과 관료제>의 원 리였다. 인간은 원칙적으로 자유롭고 다만 법이 규정하는 범위에서는 타 율적으로 규제되었다. 이러한 타율적 질서를 형성하는 방법은 법이 규 정되고 관료(권력)에 의하여 그 법이 시행되는 것이었다. 소유와 자유는 바로 이러한 법과 관료제의 원리의 반면이었다. 법과 관료가 개입하는 권역(權力의 圈域) 이외에는 바로 소유와 자유의 영역이었다. 실로 근대 서구문명은 바로 로마의 법률문명의 재판이다. 로마라는 그 광대한 제국 을 하나로 묶은 것은 바로 로마법이었다. 모든 이질성과 차이에도 불구 하고 로마법은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의 기반이었다. 근대서구 문명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자유였고 오직 법만이 공통의 질서를 형성 하는 것이었다. 근대의 국가사는 한편으로는 법과 권력이 개입하는 권역 을 끊임없이 확장되는 역사였으며, 반대로 국가(권력)의 능률과 성과는 저하하는 역사였다. 오늘날 국가는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끊임 없이 확장되었지만 반대로 국가는 민중의 기대에 거의 보답하지 못하고 있다. 증대하는 복잡성과 지식화는 이제 법과 관료만으로서는 사회질서 를 형성할 수 없게 만들었다. 수많은 법과 관료와 기구들이 이제 진부화 되었다. 새로운 시대와 문명은 새로운 질서의 원리를 요구하고 있다. 법 으로서는 인간의 사회적 통합으로 유도할 수 없게 되었고, 관료로서는 모든 것을 규제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질서의 원리는 <자율의 질서>이고, 그것을 형성하는 <공시와 신뢰의 원리>이다. 공시란 어떠한 규범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 는 상태, 정보가 제공될 수 있는 상태에 두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질서를 내용으로 하는 지식정보가 공시되고, 사람들은 그러한 공시 된 지식정보를 신뢰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에 자율적 질서의 사회적 기반이 있다. 오늘날 어떠한 분야에 어떠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는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내용에는 반드시 규범적 지 식이 있다. 가령 택시운전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자동차의 구조와 성능 과 운전법만이 아니라, 교통규칙이다. 이러한 교통규칙이 바로 규범적 지식인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산업이나 직업이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 지이다. 새로운 질서는 모든 개개인들이 스스로 이러한 규범적 지식을 알거나 도달할 수 있는 상태(공시상태)에 이르게 하고, 그들로부터 그에 기초한 자율적 질서를 형성하는 행동을 유도하는 매카니즘이 되어야 한 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사회에서 질서는 유지되지 못한다. 이러한 자 율적 질서는 규범적 지식을 모든 사람들이 준수하리라는 신뢰를 바탕으 로 할 때 이루어진다. 공동체는 이러한 신뢰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반은 바로 공시이다. 새로운 사회에서 자율의 영역은 더욱 확장될 수 밖에 없다. 이제까지 확장되었던 국가의 영역--관료적 규제와 감독의 영역--이 점차로 자율의 영역으로 이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렇게 하지 않으면 법적 관료적 규제만으로 어떠한 것도 이룰 수 없는 상 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회와 문명의 기반은 신뢰이 다. 어떠한 국가도 이러한 신뢰를 확보하는데 실패하면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공자는 정치의 요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병(군사), 식(경 제), 신(신뢰)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국가가 다른 것을 포기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신뢰라고 했다. 왜냐하면 부국강병한 국가 도 신뢰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군대나 경 찰과 같은 폭력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사회이다. 또한 자본과 소유 는 공동체의 무질서를 야기시키는 원천이 되었다(자본과 소유의 질서에 생존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폭력이 증대되는 시대이다). 공시와 신뢰에 기초하는 자율적 질서, 이것이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를 형성하는 원리이 다. 자율적 질서의 세계가 바로 사랑과 연대의 정신이 피어나는 기반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의 원리를 구현하도록 근대체제는 변혁되어 야 한다.


2. 국가의 분화 : 문화공동체, 경제공동 체, 국가공동체

<<<유럽연합--유럽공동체--를 새로운 문명의 맹아로 규정한 다>>>>>>>>

우선 근대국가가 변혁되어야 한다. 근대체제는 국가(국민국가)라는 공동체로 전인류를 평면적으로 분할하였다. 근대이전에 존재하였던 다양 한 공동체와 기독교 보편체제는 시장에 의하여 해체되고, 오직 하나의 공동체, 즉 국가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근대국가가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경제의 세계화에 대응하여 국가연합의 형태를 추구 하고 있으며, 말하자면 국가를 초월하는 공동체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 나 그 배경에는 여전히 근대국가적 이념이 있을 뿐이다. 유럽연합이 완 전하게 성공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미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미 국 자체가 진부한 근대체제이고 기능이 저하한 체제인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국가연합이 아니다.<<<유럽연합이 성공하려면 국가를 초월하는 경제공동체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딜렘마의 해결은 국가의 질적인 변혁이다. 국가라는 근대적 공동체 의 기능을 분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당장 오늘날의 국가는 경제를 조절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경제조절의 권한이 정치적 민주주의로 정당화 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민주주의는 지배와 복종의 정당화 절차이지 경제적 배분의 정당화 절차는 아니다). 그리하여 선진국의 중앙은행은 정부로부터 독립해 있다. 이것은 경제적 기능이 정부로부터 독립하고 있 다는 것이다. 베네룩스 삼국은 하나의 화폐를 사용하고 하나의 중앙은행 을 가지고 있다. 즉 베네룩스 삼국은 세개의 정치공동체(국가)와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의 경제적 권력이 분화되어 경 제공동체와 정치공동체(국가)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문명에로의 길이다.

한편 지식정보사회에 결정적으로 중요해진 부문이 있다면 교육문화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 역시 국가(정부)로부터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독 립된 문화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오늘날 교육문화부문은 과거의 경제 부문 이상으로 중대한 부문이 되었으며, 이것 역시 근대국가나 민주주의 로 해결할 수 없는 부문이다. 근대국가로부터 문화공동체를 분화시켜 근대(국가)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처럼 근대국가를 초월하는 길이 있다면 근대국가를 경제공동체, 문화공동체 그리고 잔여(殘餘)로서 정치공동체(새로운 국가)로 분화시 키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 영역을 달리하여 형성될 수 있다. 가 령 동북아 지역 전체가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 의 문화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다(국가공동체는 그대로 분립되어 있더라 도). 이것은 근대서구문명의 기본적 구조를 변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 리는 자유민주주의가 위대한 이상인 것처럼 알고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 주의란 결국 한 종류의 공동체, 즉 정치공동체(국가)에만 의미가 있는 이념이다. 그것은 그리이스문명과 마찬가지로 결코 정치공동체(근대국 가)를 초월할 수 있는 제도도 이념도 아니다.

근대로 전환하면서 권력을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으로 분화시킨 것 은 인류의 역사에서 거대한 변혁이었다. 새로운 문명에서는 권력이 아니 라 헤게모니(사회적 영향력)를 정치적 헤게모니(권력), 경제적 헤게모니 (자본의 힘) 문화적 헤게모니(지식/정당성의 힘)를 분화시키고, 이를 서로 다른 공동체로 재구조화하는 문제가 새로운 문명창조의 중심이 된 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의 세계구조에서는 정치, 권력투쟁, 인권탄압, 독재, 내전, 전쟁 등은 옛날 이야기가 될 것이다. 가령 전쟁에 관해서 보자. 국가기능이 분화하여 여러개의 국가를 포괄하는 경제공동체 문화 공동체가 성립한다면, 국가간의 투쟁인 전쟁이 성립할 수 없게 되는 것 이다(유럽연합 구성국가 상호간의 전쟁이나 미연방의 주정부간의 전쟁 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구조야말로 근대서구문명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명의 정치적 구조이다. 그리고 인류는 전혀 새로운 역사를 시 작하게 될 것이다. 현실은 이미 그러한 방향으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拙著 {자본주의 우물을 벗어난 문명사} 참조)

자본주의시장체제도 변혁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변혁은 오랫동안 사회주의와의 관계에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진부한 관점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전혀 다른 이유로 자본주의시장체제에 대해서 변혁을 가해야 한다. 그것은 지식정보혁명과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고, 경제가 아니라 문화의 시대(21세기)와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체제의 문 제는 문화체제의 일부, 또는 문화체제의 종속체제로 보아야 한다.

지식정보혁명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소비보다도 지적 문화적 가치 의 생산과 향유가 더욱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근대서구문명에서 는 경제가 문화를 좌우하였다. 간단히 말하여 문화는 경제의 부산물이었 다. 이것이 역전되고 있다. 문화(의식과 커뮤니케이션의 차원, 지식, 교 육, 예술...)가 경제를 좌우하고, 경제가 문화의 부산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지적 문화적 가치가 물질적 재화의 가치보다 더욱 많아 질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경제성장률이나 국민총생산 등의 개념은 무 의미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지적 문화적 가치는 화폐적 양적 계산이 별 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3. 자본주의시장체제의 변혁 -- 부의 정보 화

경제가 문화에 의하여 결정되듯이, 경제체제는 문화체제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냉전의 전기간동안 인류는 경제체제를 두고 논쟁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경제체제가 아니라 문화체제이다. 지식, 교육, 커 뮤니케이션, 문화예술에 관련되는 사회관계를 어떻게 재구조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새로운 문명의 과제이다. 경제체제는 이러한 문화체제와의 관계에서 재규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을 재빨리 인식하고 있는 사회는 오히려 미국이다. 로버트 라이시(Robert B.Reich {The Work of Nation s})는 이제 국가경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미국을 위하 여 필요한 것은 미국기업의 경쟁력이 아니라, 미국국민에게 어떻게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하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서 구중세에서 기원하는 현재의 진부한 교육체제를 변혁하는 것이야말로 체 제변혁의 핵심이다(송한식 공저 {교육대개혁}참조) 교육(즉 문화)부문 이 경제를 결정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경제제일주의, 자본주의시 장체제에 대한 찬양과 비난에 몰두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진부한 사 고이다. 축구경기에서 후반전으로 접어들어 골문이 바뀌었는데, 이것을 모르고 공을 차면 자살골을 먹을 뿐이다.

우리는 새로운 교육체제, 문화체제를 창조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자본주의시장체제를 변혁해야 한다. 굳이 경제체제에 관해서 말한다면 새로운 경제체제는 <참여의 체제>가 되어야 한다. 지식정보기 술은 자본의 배분 매카니즘에 있어서 굳이 모든 자본을 <개인소유>로 환원하지 않고도 개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정보는 소 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될 수 있다. 개인소유를 부정하지 않고도 사회전체의 자본을 확장할 수 있다. 결국 사회전체의 자본이란 정보이다 (국가재정과 마찬가지로 巨視的 자본은 富가 아니라 정보이다). 그리고 이 정보로서의 공동체자본을 개인들의 참여로 배분할 수 있는 정보기술 을 인류는 이미 개발해 놓고 있다.(오늘날 정보기술은 돈을 버는데 이용 될 뿐 사회와 공동체를 재조직하는데 이용되고 있지 못하다). 이렇게 되 면 자본소유 자체가 더 이상 중대한 문제가 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새 로운 경제체제에 있어서는 이제까지의 모든 경제문제--빈부격차, 계급 화, 인플레이션, 성장, 불황과 공황---들을 역사의 이야기, 과거의 에피 소드로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의 배분 자체가 시장의 문제가 아니 라 참여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부를 보존하기 위하여 금융적 투기에 몰두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금융체제 자체가 변혁될 것이기 때문이다. (拙著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양} 참조)

결론 : 신인류--시간과의 싸움

새로운 문명이 열리는 것은 새로운 인류가 나타나는 것에서 시작한 다. 합리적 개인(탐욕적 개인)은 근대서구문명이 창출한 체제적 질곡에 서 생성된 것일 뿐 결코 보편적 인간이 아니다. 근대서구문명이 이미 종 착역에 이른 지금 그 질곡은 정신으로부터 파괴되어 이미 새로운 인류가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세대에서 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정신적 변혁은 낡은 인간의 의식개혁이 아니라 바로 세대의 교체를 통하 여 이루어진다. 낡은 세대가 통탄하고 있을 때 새로운 세대는 코웃음치 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미 새로운 정신 즉 새로운 세대들이 나타나고 있다.새로운 세대는 세계를 존재(실재, 개인주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연대(관계, 공동체의 식)로 본다. 이 새로운 정신은 비록 세계의 한귀퉁이에서 피어나고 있지 만 마침내 낡은 세대가 사라진 이후 온 세상을 가득채우게 될 것이다. 톰 리건 (TOM REGAN : North Carolina State University) 교수는 새로 운 세대에 대해서 <당신에의 세대 : The Thee Generation>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당신에의 세대>, 즉 신세대(新世代)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 그것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세대이고, 물질적 소유에 열중하는 것 이 아니라 공동체적 연대의식에 헌신하는 세대이고, 현란한 소비가 아 니라 봉사(service)의 세대이다. 현세대를 정의하는 문제가 '나를 위하 여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What can I get for me)'라고 한다면, 신세 대의 중심적인 문제는 '당신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What can I do for thee)'라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봉사(service-to-the-other)의 이 윤리는 <인간이란 무 엇인가>를 재규정하는데 뿌리를 두고 있다. 공동체적 연대의식(shared sense)이 개인적 소외의 공허를 대체한다. 오직 타인을 위하여 행동함 으로써만이 사람은 자기자신을 알 수 있게 된다---그 자신이란 만인과 개인을 묶는 유대로부터 고립됨으로써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서 자신을 확인함으로써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로부터 분리된 상 태에서는 자아란 공허한 세포일 뿐이며, <나>라는 단어는 거의 비인칭 (非人稱) 대명사이다. <나는 생각한다 cogito>라는 데카르트의 유해(有 害)한 논리는 이제 죽었다. 그 자리에 새로운 선언이 지금 살아나고 있 다. <나는 공동체 속에 살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rgo vivo in civitate, ergo sum)>

휴머니즘의 오만한 경계선은 이제 해소되고 있다. 생명의 호흡을 가진 자로서, <당신에의 세대>는 우리 모두 생명공동체(the life community)의 멤버임을 인식하고 있다. 개개의 사물은 변함없고 다른 것 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개개의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다른 모든 것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새 롭게 발견되고 있다. 이전의 세대들이 세계를 분리되고 고립된 물질적 (정신적)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면, <당신에의 세대>는 세계를 상호관련된 분자적 생명공동체로 본다.}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독립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개인, 자신의 욕망과 이익이야말로 자유의 의미가 되는 개인은 정신적으로 공 허에 빠지고 마침내 파멸하거나 타락해갈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 연대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새로운 인간은 성자를 지칭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인간들에게 사랑과 연대가 자신과 삶의 필수적인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만을 위하여 사는 삶, 이익과 소유로 자신을 규정하는 삶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비현실적인 것 이다. 왜냐하면 그 실패는 인간의 정신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가하 고, 그 성공은 공허감에 엄습당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정신병 이 만연하고 있다. 우울증, 히스테리, 피해망상, 정신분열....이것들이 바로 탐욕적 개인들의 종착역이다. 오늘날 사회환경은 정신적 건강을 유 지하는 것이 지극히 힘들다. 투쟁과 경쟁은 항상 인간의 고(苦)를 증대 시킨다.

석가는 일찌기 합리적 개인(이기적 인간)으로서의 인간상이야말로 고 (苦)의 원인인 아상(我相)이라고 가르쳤다. 고(苦)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이 이기적으로 성공하거나, 탐욕을 만족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이러한 합리적 개인(탐욕적 인간)을 넘어서는 데에 있다. 근대의 합리적 인간이란 인간의 과학적 본질이 아니라 사실은 초월해야할 환상 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과 연대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사랑과 연 대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일용의 양식인 것이다. 사랑과 연대는 레저 가 아니라 보약이다. 사랑과 연대의 실천에 의해서 우리는 정신적 건강 을 지키고 고(苦)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삶이 유일 하게 의미를 느끼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 으로 사는 것이다. 이 보편적 원리는 이미 예수가 가르친 것이다. "너희 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주어지리라." 당신에 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주는 것이다. 당신이 할 일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주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와 문명은 바로 이러한 사회, 연대사회이다.

그러나 우리가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보면 오히려 건전한 비관주의의 관점에 설 수밖에 없다. 새로운 문명을 향한 징조는 아직 긍정적으로 평 가할 단계가 아니다. 분명히 낡은 것은 붕괴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창조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세기말에 서 있는 인류의 객관적인 상황이다. 우리는 새로운 문명이 창조되는 과정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낡은 문명이 쇠퇴하고 붕괴하는 과정에 서 있는 것이다. 결국 인류의 운 명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낡은 문명이 먼저 쇠퇴하여 붕괴할 것인가-- 그와 함께 인류문명도 끝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문명이 창조되어 인 류를 구원할 것인가? 인류의 운명은 바로 시간적 선후를 다투는 싸움 에 달려있는 것이다. 만약 근대서구문명이 로마와 같이 장기적인 쇠퇴 의 과정을 걷는다면 우리에게 상당한 시간이 부여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노스트라다무스를 비롯한 많은 예언가들의 예언(직관)과 같 이 환경재난, 공황, 전쟁과 같은 급속한 붕괴의 과정을 걷는다면 인류에 게 허용된 시간은 많지 않다. 우리는 앞을 모르는 채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근대서구문명이 파국을 맞기 전에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가? 낡은 근대문명의 반성 에 있어서는 오히려 서구와 미국이 앞서가고 있다. 그러나 로마가 그 오랜 쇠퇴의 기간 동안에도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 수 없었듯이, 우리는 서구와 미국에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창조성의 네메시스 (Nemesis)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북아 시아의 소명은 크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마음은 여전히 서구에 고정되 어 있고, 아직 이 소명에 응할만한 노력을 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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